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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전북경물한시(하)] 부안 밤바다 아름다운 절경 노래

변산서 벌목 감독때 시 '부령포구' 지어


산골인 마령과 진안 사람들은 얼굴이 잔나비 같고, 꾸짖거나 나무라면 놀란 사슴처럼 금방 달아날 듯 사람됨이 질박(質朴)하여 꾸밈이 없고, 술상이나 음식은 문화가 뒤떨어진 야만적인 풍모기 엿보인다고 하였다. 산을 감돌아 운제까지 갔고, 운제를 지나 고산까지 가는 데는 길이 좁고 고개가 만 길이나 높이 솟아 있어 말을 타고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이 대목은 〈여지도〉 고산현의 형승을 그려내는 부분에서 이규보의 〈남행월일기〉를 그대로 원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낭산에서 금마군으로 가려고 했을 때 지석(支石) 즉 고인돌이란 것을 구경했다고도 하였다. 고인돌이란 옛날 성현이 고인 기적(奇迹)이라 했는데, 일제 때 흔적 없이 사라져버려 지금은 전해오지 않는다. 낭산 땅은 고려 때 지명이며, 조선 성종 조에는 여산현이라 했는데 현재까지도 그 지명이 불리어 오고 있다.

이규보는 부안 객사, 마령객사, 전주객사, 변산노상, 낭산고을, 오수역, 인월역, 남원 원수사, 임실군수에게, 순창 적성강, 보안현, 옥야현, 갈담역, 고부태수 오천유에게, 보안현 진사 이한재에게 등 60 여수가 넘는 많은 작품을 동국이상국집과 백운소설에 담아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전주목에 부임한 지 1년 4개월 만에 면직을 당하기도 했는데, 고종 17년(1230년)에 또 한 사건에 연루되어 부안 위도에 유배를 당하였다.

그러나 8개월 만에 풀려나와 이듬해 고종 18년(1231년) 12월, 63세 때 재목창의 나무베기 감독직인 작목사(斫木使)로 다시 부안으로 오게 되었다. 그가 우리나라 재목창인 부안 변산에 있으면서 한낱 벌목의 감독직인 작목사로 일하는 자신을 한심스러워 하면서 7언시를 남겼다.

호위하는 수레 속에 권세부리니 그 영화 천박하고
벼슬이름 작목사라니 부끄럽기 그지없네
변산은 자고로 하늘이 내린 천부라 했는데
좋은 재목 골라서 동량으로 쓰리라

최씨 무단정권 아래 세력을 잃어버린 선비들의 초라한 말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안타까워진다. 이듬해 정월 변산 바닷가로 나가니 바다 멀리 군산(群山)섬과 고슴도치같은 위도, 비들기섬 구도(鳩島) 등이 보이는데 하루아침이면 모두 다다를 수 있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순풍을 맞으며 쏜살같이 가면 중국도 먼 곳이 아니라는 주민들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산속을 지나 얼마를 가노라니 보안(保安) 땅에 이르렀는데 밀물이 한꺼번에 밀려와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고도 하였다. 밀물이 마치 천군만마처럼 밀려와 급하게 산으로 도망을 하여 겨우 위기를 모면했지만 바닷물이 산까지 쏜살같이 밀려와 타고 있는 말의 배 밑까지 순식간에 닿았다고 했으니 이 땅은 이규보가 그린 것처럼 조수간만의 차가 심했음을 알만하다.

보안은 지금 부안 곰소항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바다를 굽어보니 날씨가 맑다가 흐렸다하여 변화무쌍함으로 파란 물결과 푸른 산들이 들락날락하고 붉은 저녁노을로 하여 바다가 붉으락 푸르락 마치 만첩병풍을 두른 듯이 아름다웠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두 세 사람의 친구와 더불어 이를 시로 읊지 못했음을 한스러워 했다. 그러나 부안의 주사포구를 지나다가 휘영청 밝은 달이 해변의 모래사장을 비추어 밤바다가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나머지 시 한 수가 술술 흘러나와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이 시가 〈동문선 〉권 14에 ‘부령포구(扶寧浦口)’라는 시제로 다음과 같이 실려 전한다. 부령은 지금 부안의 옛 지명이다.

아침저녁 들리는 건 물소리뿐
바닷가 촌락 너무도 쓸쓸하네
맑은 호수 한가운데 달 도장 찍혔구나
포구는 탐내듯 드는 밀물 들이켜서
물결 찧어 옛 바위 닳아내 숫돌을 만들었네
부서진 배는 이끼 낀 채 다리가 되었구나
이 강산 온갖 경개 어디 다 읊을 수 있나
화가를 데려와서 단청으로 그려봤으면

파도소리 부서지는 한가로운 어촌 마을의 정경이 마치 한 폭의 화폭처럼 아름답다. 길옆 호수 위엔 휘영청 밝은 달이 그림처럼 떠 있는 게 어쩌면 달 도장을 찍어놓은 것만 같다. 포구는 밀물이 세차게 부딪히는 바람에 바위가 흡사 숫돌처럼 매끄럽게 닳아졌고, 배는 부서져 마치 사람이 일부러 다리를 놓은 듯이 누워있었다고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강산의 경개를 시로 다 읊을 수 없으니 화가를 불러다가 그림으로 그려야지 몇 줄의 시로는 그 아름다움을 묘사할 수 없다는 이규보의 한탄이 베어난다. 고려의 대시인인 이규보도 부안 밤바다의 아름다운 절경을 한 줄의 시에 그려낼 수 없었다는 걸 보면 부안 변산의 바닷가는 예나 지금이나 정말 절경이었음을 알만하다.

무단정권의 회오리 정국에서 걸맞은 자리를 찾지 못한 이규보는 스스로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자호하고 전국을 구름처럼 떠돌았고, 우리나라 명시들에 대한 평설과 시론을 엮은 〈백운소설(白雲小說)〉을 펴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소설이란 용어를 썼지만, 이는 장르적인 명칭이 아니라, 시에 관한 자신의 시론과 시에 얽힌 이야기를 엮은 시화(詩話)집에 불과하다. 하지만 12살에 중국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하고 고병(高騈)의 휘하에 들어가 ‘황소격문(黃巢檄文)’을 써서 중국을 감동케 한 최치원을 당서 〈예문지(藝文志)〉 열전에 싣지 않고 그보다 훨씬 뒤떨어진 자국의 심전기(沈佺期) 등을 올려놓은 부당성을 제기한 비판 의식은 특기할 만하다.

즉 옛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 서로 시새움을 하지 아니할 수 없었겠지만, 그건 최치원이 외국의 외로운 선비로서 중국에 들어가 명망 있는 선비들을 깔아뭉갰던 탓이라는 자국에 대한 높은 자존과 자긍심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유자후(柳子厚)의 문체와 바탕을 평함에 있어 ‘무릇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반드시 글에 있다고 하고서 일찍이 내가 말하기를 그 글을 보아서 마땅히 그 사람을 공경하고 그 문체를 헤쳐보아 그 바탕을 볼 것이다’라는 당나라 유자후의 글을 인용하면서 더욱 그런 마음이 절실했다는 이규보의 독자적인 시론도 엿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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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2.14 23:02  수정 2014.03.20 17:3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