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전북
완주군이 ‘봉동 생강’을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나섰다. 봉동은 예로부터 생강의 고장이며 이곳에서 생산된 생강은 임금님에게 올리는 진상품이었다고 한다. 봉동 생강은 저장 방법과 독특한 맛에서 다른 지역과 판이하게 다르다. 생강의 유래를 보면 전라감사로 내려온 이서구(李書九, 1754~ 1825)가 관내 순시를 위해 봉동(鳳東)읍까지 행차, 봉실산(鳳實山)의 산세와 지형을 두루 살핀 적이 있다. 그는 봉실산의 이름을 만덕산(萬德山)의 옛 기봉산리(基鳳山里) 들판을 보고, 이 근처에서 장차 향기로운 풀(香草)이 자라 사람에게 큰 복을 주는 풀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한다. 그 뒤 과연 향내 나는 풀이 자라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봉동의 생강이 됐다고 한다.
또, 1,300년전 신만석이 중국에 사신으로 건너가 봉성현(鳳城懸)이라는 곳에서 생강 뿌리를 얻어가지고 돌아와 지금의 전남 나주와 황해도의 봉산(鳳山)에 심었으나 재배에 실패했다. 이에 지명에 봉자가 있는 이곳 봉상(鳳翔)으로 내려와 심은 결과 재배에 성공, 오늘날 봉동 생강이 나오는 기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초기의 기록에 나타난 완주지방의 토산품으로 석류,강(薑), 울금, 봉밀(蜂蜜) 등 농산물과 지(紙),칠 등의 공산품 및 수산물로서 위어(葦漁)가 이었다(동국여지승람). 조선중기에 이르러서는 도(稻), 어(魚), 강(薑), 저(苧), 대나무(竹), 칭(秤)이 있었다(택리지). 조선후기에는 석류, 은행(銀杏), 호도(胡桃), 울금(鬱金), 구기(拘杞), 봉밀(蜂蜜), 생강(生薑), 배, 밤, 감 등의 농산물과 지물(紙物) 등의 공산품이 진상됐다(완산지). 봉동생강과 전주 배를 주 원료로 한 ‘이강주(梨薑酒)’가 임금께 진상하는 조선시대 3대 명주 중 하나로 유명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봉동생강은 1597년 이순신장군도 드셨음이 ‘난중일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전주판관 '박근'이, 백의종군때 이순신장군에게 선물한 것이다. ‘오전에 삼례역(완주군 삼례읍 삼례리)의 역장과 역리의 집에 이르렀다. 저녁에 전주 남문밖 이의신(李義臣)의 집에서 잤다. 판관 박근(朴勤)이 와서 봤다. 부윤(府尹, 오늘날 전주시장)도 후하게 접대했다. 판관이 비올 때 쓰는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와 생강 등을 보내왔다’
이는 정유년(1597년) 4월 22일(앙력 6월 6일, 임오, 맑음)자 ‘난중일기’ 기록이다. 21일 여산 관아 노비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이순신장군은 다음날 삼례역을 거쳐 전주로 이동한 것이다. 이 때 보낸 생강은 타 지역의 것일 확률은 거의 없으며, 위의 기록을 통해서도 100% 봉동생강이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엔 이순신이 몇번이나 전북을 찾았을까, 모두 4회로 분석된다.
난중일기 병신년(1596년)
<1>
9월 12일 을사 비바람이 크게 불었다. 늦게 나서서 기에 오른지 10리쯤 되는 냇가에 이광보와 현여경이 술을 갖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도 왔다. 저물 무렵 무장(고창)에 이르러 잤다.
13일 병오 이중익과 이광축이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 종일 이야기 했다.
9월 14일 정미 맑음. 하루를 더 묵었다.
9월 15일 무신 맑음. 체찰사가 무장현에 이르렀기에 들어가 인사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9월 16일 기유 맑음. 체찰사 일행이 고창에서 점심먹고 장성에 와서 잤다.
9월 17일 경술 맑음.입암산성으로 갔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년)
<2>
4월 21일 일찍 떠나 은원(논산군 은진면 연서리)에 이르니 김익이 우연히 왔다고 한다. 임달영이 곡식을 사러 은진포로 왔다고 하는데, 그 꼴이 몹시 궤휼하다. 저녁에 여산(익산군 여산면) 관노의 집에서 자는데. 한밤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생각에 견딜 수가 없다.
4월 22일 오전에 삼례역(익산군 삼례면)의 역리의 집에 이르렀다. 저녁에 전주 남문밖 이의신의 집에서 자다. 판관 박근이 와서 봤다. 부윤(전주시장)도 후하게 접대했다. 판관이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와 생강을 보내주었다.
4월 23일 일찍 떠나 오원역(임실군 오천면 선천리)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저물어서 임실현에서 잤다. 임실현감이 예에 따라 대우했다. 현감은 홍언순이다.
4월 24일 일찍 떠나 남원에 이르렀다. 읍에서 십오리쯤에서 정철(丁哲)들을 만났는데, 그들과 남원부 오 리 안에까지 이르러 작별하고 십 리 바깥 동쪽 이희경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 슬픈 회포를 어찌 말하랴.
4월 25일 비가 많이 올 듯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운봉(남원군 운봉면)의 박롱의 집에 들어가니, 비가 많이 퍼부어서 출두할 수가 없다. 여기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벌써 순천으로 떠났다”고 했다. 곧 사람을 금오랑 있는 곳으로 보내어 머물게 했다. 운봉현감(남간)은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
4월 26일 일찍 아침밥을 먹고 길을 떠나 구례현 손인필의 집에 이르니, 구례현감(이원준)이 급히 나와 보고는 대접하는 것이 매우 은근하다. 금오랑(이사빈)도 와서 봤다.
<3> 정유일기1
9월 20일 배를 몰아 고참도(古參島, 위도)에 가니 피난민들이 무수히 배를 정박하고 있었다. 이광보(李光輔)도 와서 만나고 이지화(李至和)
부자도 왔다.
9월 21일 새벽에 출발하여 고군산도(古群山島, 선유도)에 가니, 호남순찰사(박홍로)는 내가 만나러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서 배를 타고 옥구로 갔다고 했다.
10월 3일 새벽에 배를 출발해 돌아오다가 변산(邊山, 부안 변산반도)을 거쳐 곧장 법성포로 내려가니 바람이 매우 부드럽고 따뜻하기가 봄날과 같았다. 저물어서 법성포 선창 앞으로 갔다.
<4> 정유일기2
9월 20일 새벽에 출항해 곧장 위도(蝟島: 위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 황득중과 종 금이 등을 보내어 종 윤금을 찾아서 잡아오라고 했더니, 과연 위도 밖에 있었다. 그래서 묶어다가 배 안에 실었다. 이광축, 이광보가 와서 봤다. 이지화 부자가 또 와서 봤다. 날이 저물어서 잤다.
9월 21일 일찍 떠나 고군산도(옥구군 미면 선유도)에 이르니, 호남순찰사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로 갔다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광풍이 세게 불었다.
9월 22일 맑은데,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대로 머물렀다. 나주목사 배응경, 무장현감 이람이 와서 봤다.
9월 23일 승첩한 장계의 초본을 수정했다. 정희열이 와서 봤다.
9월 24일 몸이 불편하여 신음했다. 김홍원이 와서 봤다.
9월 25일 이 날 밤에 몸이 몹시 불편하고, 식은 땀이 온 몸을 적셨다.
9월 26일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이 날 밤에는 식은 땀이 온몸을 적셨다.
9월 27일 송한, 김국, 배세춘 등이 승첩장계를 가지고 뱃길로 올라 갔다. 정제는 충청수사에게 부찰사로 보낼 공문을 가지고 같이 같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내내 아팠다.
9월 28일 송한과 정제가 바람에 막혀 되돌아 왔다.
9월 29일 송한 등 계본(啓本), 장달(狀達)을 가진 판관 정제는 바람이 순조로워 도로 올라갔다.
※계본[啓本] - 조선시대 임금에게 제출한 문서.
장달(狀達) - 장계(狀啓) 왕명을 받고 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자기 관하(管下)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던 일. 또는 그런 문서
이를 통해 보면 이순신장군이 고군산에 가장 오래 머물렀음을 알수 있다. 이 무장도 며칠 묵었으며, 또, 백의종군로를 가며 들른 전북의 지명과 과정도 뚜렷하게 들어난다.
난중일기에 드러난 지명으로는 여산, 삼례역, 전주 남문밖, 오원역, 임실현, 남원, 운봉, 고군산도, 위도, 옥구, 무장, 고창, 입암산성, 고참도(위도), 금모포(부안군 보안면 구진)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중익, 이광축, 이광보, 황득중, 판관 박근, 전주 남문밖 이의신, 정철, 이희경, 박롱 등 난중일기의 등장 인물은 연구의 대상이다.
완주군이 ‘봉동 생강’을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나섰다. 봉동은 예로부터 생강의 고장이며 이곳에서 생산된 생강은 임금님에게 올리는 진상품이었다고 한다. 봉동 생강은 저장 방법과 독특한 맛에서 다른 지역과 판이하게 다르다. 생강의 유래를 보면 전라감사로 내려온 이서구(李書九, 1754~ 1825)가 관내 순시를 위해 봉동(鳳東)읍까지 행차, 봉실산(鳳實山)의 산세와 지형을 두루 살핀 적이 있다. 그는 봉실산의 이름을 만덕산(萬德山)의 옛 기봉산리(基鳳山里) 들판을 보고, 이 근처에서 장차 향기로운 풀(香草)이 자라 사람에게 큰 복을 주는 풀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한다. 그 뒤 과연 향내 나는 풀이 자라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봉동의 생강이 됐다고 한다.
또, 1,300년전 신만석이 중국에 사신으로 건너가 봉성현(鳳城懸)이라는 곳에서 생강 뿌리를 얻어가지고 돌아와 지금의 전남 나주와 황해도의 봉산(鳳山)에 심었으나 재배에 실패했다. 이에 지명에 봉자가 있는 이곳 봉상(鳳翔)으로 내려와 심은 결과 재배에 성공, 오늘날 봉동 생강이 나오는 기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초기의 기록에 나타난 완주지방의 토산품으로 석류,강(薑), 울금, 봉밀(蜂蜜) 등 농산물과 지(紙),칠 등의 공산품 및 수산물로서 위어(葦漁)가 이었다(동국여지승람). 조선중기에 이르러서는 도(稻), 어(魚), 강(薑), 저(苧), 대나무(竹), 칭(秤)이 있었다(택리지). 조선후기에는 석류, 은행(銀杏), 호도(胡桃), 울금(鬱金), 구기(拘杞), 봉밀(蜂蜜), 생강(生薑), 배, 밤, 감 등의 농산물과 지물(紙物) 등의 공산품이 진상됐다(완산지). 봉동생강과 전주 배를 주 원료로 한 ‘이강주(梨薑酒)’가 임금께 진상하는 조선시대 3대 명주 중 하나로 유명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봉동생강은 1597년 이순신장군도 드셨음이 ‘난중일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전주판관 '박근'이, 백의종군때 이순신장군에게 선물한 것이다. ‘오전에 삼례역(완주군 삼례읍 삼례리)의 역장과 역리의 집에 이르렀다. 저녁에 전주 남문밖 이의신(李義臣)의 집에서 잤다. 판관 박근(朴勤)이 와서 봤다. 부윤(府尹, 오늘날 전주시장)도 후하게 접대했다. 판관이 비올 때 쓰는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와 생강 등을 보내왔다’
이는 정유년(1597년) 4월 22일(앙력 6월 6일, 임오, 맑음)자 ‘난중일기’ 기록이다. 21일 여산 관아 노비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이순신장군은 다음날 삼례역을 거쳐 전주로 이동한 것이다. 이 때 보낸 생강은 타 지역의 것일 확률은 거의 없으며, 위의 기록을 통해서도 100% 봉동생강이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엔 이순신이 몇번이나 전북을 찾았을까, 모두 4회로 분석된다.
난중일기 병신년(1596년)
<1>
9월 12일 을사 비바람이 크게 불었다. 늦게 나서서 기에 오른지 10리쯤 되는 냇가에 이광보와 현여경이 술을 갖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도 왔다. 저물 무렵 무장(고창)에 이르러 잤다.
13일 병오 이중익과 이광축이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 종일 이야기 했다.
9월 14일 정미 맑음. 하루를 더 묵었다.
9월 15일 무신 맑음. 체찰사가 무장현에 이르렀기에 들어가 인사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9월 16일 기유 맑음. 체찰사 일행이 고창에서 점심먹고 장성에 와서 잤다.
9월 17일 경술 맑음.입암산성으로 갔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년)
<2>
4월 21일 일찍 떠나 은원(논산군 은진면 연서리)에 이르니 김익이 우연히 왔다고 한다. 임달영이 곡식을 사러 은진포로 왔다고 하는데, 그 꼴이 몹시 궤휼하다. 저녁에 여산(익산군 여산면) 관노의 집에서 자는데. 한밤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생각에 견딜 수가 없다.
4월 22일 오전에 삼례역(익산군 삼례면)의 역리의 집에 이르렀다. 저녁에 전주 남문밖 이의신의 집에서 자다. 판관 박근이 와서 봤다. 부윤(전주시장)도 후하게 접대했다. 판관이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와 생강을 보내주었다.
4월 23일 일찍 떠나 오원역(임실군 오천면 선천리)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저물어서 임실현에서 잤다. 임실현감이 예에 따라 대우했다. 현감은 홍언순이다.
4월 24일 일찍 떠나 남원에 이르렀다. 읍에서 십오리쯤에서 정철(丁哲)들을 만났는데, 그들과 남원부 오 리 안에까지 이르러 작별하고 십 리 바깥 동쪽 이희경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 슬픈 회포를 어찌 말하랴.
4월 25일 비가 많이 올 듯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운봉(남원군 운봉면)의 박롱의 집에 들어가니, 비가 많이 퍼부어서 출두할 수가 없다. 여기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벌써 순천으로 떠났다”고 했다. 곧 사람을 금오랑 있는 곳으로 보내어 머물게 했다. 운봉현감(남간)은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
4월 26일 일찍 아침밥을 먹고 길을 떠나 구례현 손인필의 집에 이르니, 구례현감(이원준)이 급히 나와 보고는 대접하는 것이 매우 은근하다. 금오랑(이사빈)도 와서 봤다.
<3> 정유일기1
9월 20일 배를 몰아 고참도(古參島, 위도)에 가니 피난민들이 무수히 배를 정박하고 있었다. 이광보(李光輔)도 와서 만나고 이지화(李至和)
부자도 왔다.
9월 21일 새벽에 출발하여 고군산도(古群山島, 선유도)에 가니, 호남순찰사(박홍로)는 내가 만나러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서 배를 타고 옥구로 갔다고 했다.
10월 3일 새벽에 배를 출발해 돌아오다가 변산(邊山, 부안 변산반도)을 거쳐 곧장 법성포로 내려가니 바람이 매우 부드럽고 따뜻하기가 봄날과 같았다. 저물어서 법성포 선창 앞으로 갔다.
<4> 정유일기2
9월 20일 새벽에 출항해 곧장 위도(蝟島: 위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 황득중과 종 금이 등을 보내어 종 윤금을 찾아서 잡아오라고 했더니, 과연 위도 밖에 있었다. 그래서 묶어다가 배 안에 실었다. 이광축, 이광보가 와서 봤다. 이지화 부자가 또 와서 봤다. 날이 저물어서 잤다.
9월 21일 일찍 떠나 고군산도(옥구군 미면 선유도)에 이르니, 호남순찰사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로 갔다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광풍이 세게 불었다.
9월 22일 맑은데,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대로 머물렀다. 나주목사 배응경, 무장현감 이람이 와서 봤다.
9월 23일 승첩한 장계의 초본을 수정했다. 정희열이 와서 봤다.
9월 24일 몸이 불편하여 신음했다. 김홍원이 와서 봤다.
9월 25일 이 날 밤에 몸이 몹시 불편하고, 식은 땀이 온 몸을 적셨다.
9월 26일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이 날 밤에는 식은 땀이 온몸을 적셨다.
9월 27일 송한, 김국, 배세춘 등이 승첩장계를 가지고 뱃길로 올라 갔다. 정제는 충청수사에게 부찰사로 보낼 공문을 가지고 같이 같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내내 아팠다.
9월 28일 송한과 정제가 바람에 막혀 되돌아 왔다.
9월 29일 송한 등 계본(啓本), 장달(狀達)을 가진 판관 정제는 바람이 순조로워 도로 올라갔다.
※계본[啓本] - 조선시대 임금에게 제출한 문서.
장달(狀達) - 장계(狀啓) 왕명을 받고 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자기 관하(管下)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던 일. 또는 그런 문서
이를 통해 보면 이순신장군이 고군산에 가장 오래 머물렀음을 알수 있다. 이 무장도 며칠 묵었으며, 또, 백의종군로를 가며 들른 전북의 지명과 과정도 뚜렷하게 들어난다.
난중일기에 드러난 지명으로는 여산, 삼례역, 전주 남문밖, 오원역, 임실현, 남원, 운봉, 고군산도, 위도, 옥구, 무장, 고창, 입암산성, 고참도(위도), 금모포(부안군 보안면 구진)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중익, 이광축, 이광보, 황득중, 판관 박근, 전주 남문밖 이의신, 정철, 이희경, 박롱 등 난중일기의 등장 인물은 연구의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