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룡이 조선 태조 이성계로부터 조선 개국 이후 재령백(載寧伯)의 작호를 받은 사실이 확인됐다.
1395년 조선 태조(太祖)는 개국 공신인 무신 강순룡을 보국숭록대부·재령백에 임명하는 내용의 고신(告身)을 내린다. 이는 고신은 조선시대 왕이 관원에게 품계나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문서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고위직 공무원에게 주는 임명장으로, 그 임명 내용만 간단히 적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고신 관련 문헌자료를 모아 다음달 3일까지 장서각 1층 전시실서 ‘고신, 조선시대의 임명문서 읽기’ 기획전을 연다.
전시는 고려, 조선시대 문서들의 작성자와 서체를 분석해 고신이 정립된 과정을 보여준다. 고신(告身)은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문서를 말한다. 고신은 4품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상에게는 교지(敎旨) 형식으로 문서를 작성하고 왕의 어보인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어 관교를 발급하는 형식과 5품에서 9품 관원에게는 왕의 명을 받아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임명하는 형식이 있다.
낱장 문서에 지나지 않는 ‘고신’이라서 얼핏 보면 단순한 임명장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통치시스템 중 하나인 율령(律令)과 그것을 둘러싼 정치적 위계를 표상하는 기호들이 가득하다. 이 전시는 조선시대 전형적인 양식의 '고신'이 정립되기까지의 중국 당나라부터 조선까지 임명문서를 양식(樣式), 문서의 작성자(作成者), 문서를 작성한 서체(書體), 문서에 찍힌 보인(寶印)의 네 가지 소주제로 나누어 분석하여 조선시대 고신의 양식적 기원을 밝혔다.
'조선 태조 4년(1395) 강순룡 왕지(康舜龍王旨,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는 1395년 12월 22일에 강순룡康舜龍을 특진(特進)·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재령백(載寧伯)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강순룡의 누이동생은 신덕왕후(神德王后)로 이성계의 비이다. 이성계의 정변과 집정 과정에서 도움을 주어 조선 개국 이후 재령백(載寧伯)의 작호를 받았다. 이 문서와 관련하여 『영조실록』권60, 영조 20년(1744) 12월 24일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 강순룡의 후손 강치경(康致卿)이 태조의 어필교지를 바쳤다. 상上이 말하기를, “이 교지 가운데 인전(印篆)을 보고 그 연월을 상고하니, 곧 성조께서 나라를 창업한 초년이었다. 병자호란 이후에 청국의 보인(寶印)을 사용하였는데, 지난번에 상신 이이명의 품달로 비로소 괴원(槐院)에 해창위(海昌尉)가 모사하여 주조한 황조(皇朝)의 보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 [朝鮮王寶]의 전서(篆書)를 보니 또 기이하다. 지금은 조신(朝臣)의 교지에 모두 [施命之寶]를 사용하는데, 그 내력이 이미 오래 되었다. 이것은 비록 고칠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이미 보전(寶篆)을 보았으니, 더욱 어찌 이를 없애 버리겠는가. 국가의 교명(敎命)과 왕후,세자의 책례(冊禮)때에는 마땅히 이것으로 사용하라.”고 하고, 이어서 상방尙方에 명하여 모사하고 주조하여 바치게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20년(1744) 12월 24일)'
이 기사는 강순룡이 받은 문서를 어필(御筆)로서 영조에게 바친 기사이다. 곧, 강순룡의 후손은 이 왕지를 태조 이성계의 친필(親筆)로 여겨서 국왕 영조에게 올렸고, 영조도 이를 그렇다고 여겨서 모각을 하였다. 그러나 강순룡의 왕지는 이조(吏曹)의 영사(令史)가 작성했다. 이조의 직무가 1-9품까지의 유품(流品)을 전선(銓選)하는 일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조선 21대 왕 영조(英祖)가 조선 초기 작성된 고신을 태조가 직접 썼다고 여긴 이야기도 소개된다. 1334년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가 고려인 이달한을 무덕장군·고려국만호부만호에 임명하는 내용의 문서도 임명 사실만 간단히 적었다. 이 문서는 티베트 문자에 기초해 몽골말을 표기한 파스파 문자로 작성돼 있다. 당시 원나라는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아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