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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부안의 음식 스토리를 찾아 처음으로 공개하다

 

 

눈이 펑펑 내리는데 기녀의 춤사위를 보면서, 사냥꾼이 변산에서 잡아온 꿩과 사슴을 안줏거리로 소주 한잔을 하는 기분이 어떨까. ‘부안 관아의 후선루가 완성되자 한겨울이 찾아왔다. 누각이 높아서 멀리 조망하기에 넉넉한지라 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날씨가 춥지 않은 해라 얼음이 얼 낌새가 없어 몹시 울적해졌다. 십이월이 되자 연일 큰 눈이 내렸다. 한두 손님과 함게 후선루에 올라 놀기로 했다. 잔치 자리를 넓게 깔아 술잔과 그릇을 후선루에 올라 놀기로 했다. 잔치 자리를 넓게 깔아 술잔과 그릇을 차려 놓으니 비취 소매의 기녀는 추위에 떨고 화로에서는 불기운이 이글거렸다. 바로 이때 변산에서 돌아온 사냥꾼은 꿩과 사슴을 안줏거리로 바쳤다.(삼당재유고)’

 

표암 강세황의 둘째 아들 강흔(1739~1775, 필사본 삼당재유고(三當齋遺稿) 전함)1769년 가을 부안현감으로 부임했다. 강흔은 부안읍지를 만들고 후선루(候仙樓)를 새로 세우고 낙성식을 열었다. 관아의 후선루가 완성되자 한겨울이 왔다. 그래서 이름을 하설루(賀雪樓)로 바꾸었음이 '하설루기(賀雪樓記)'를 통해 드러난다. 이 당시 부안 관아엔 이 누정 외에 부풍관(扶風館), 역락헌(亦樂軒), 단소헌(但嘯軒), 망월루(望月樓), 제민헌(濟民軒) 등의 건물이 있었다. 변산에서 돌아온 사냥꾼은 꿩과 사슴을 안줏거리로 바쳤다는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다.

조선시대 고래는 귀한 선물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세종실록> 1419년 음력 822(세종 1) 자는 상왕이 내시 최한을 보내어, 황엄에게 흰 숫돌과 고래수염을 선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산군은 1505819(음력) 전라도의 바다에 면한 고을들에 명하여 고래를 사로잡아 오라고 명한다. 산 고래를 잡아 진상하지 못하자 부안현감 원근례는 잔약해서 잘 보살피지 못했다며 그를 파직한다. 고래를 잡을 수 있는데 못 잡았다면 무능하다는 이유로 파직할 수 있다.

 

*/부안 현감 원근례가 잔약해서 잘 보살피지 못하였다 하여 파직하게 하다/

 

傳曰(전왈) : 전교하기를,

扶安縣監元近禮(부안현감원근례) : "부안 현감(扶安縣監) 원근례(元近禮)

殘劣不能治事(잔렬불능치사) : 잔약해서 잘 보살피지 못하니,

其罷之(기파지) : 파직하라."했다.

王命全羅道沿海郡縣(왕명전라도연해군현) : 왕이 전라도의 바다에 연한 고을들에 명하여

生捕鯨鯢(생포경예) : 고래를 사로잡게 하였는데,

近禮自募捕之(근례자모포지) : 근례가 잡기를 자청하여

出入海島(출입해도) : 해도(海島)에 드나들었으나

數月不得(수월불득) : 두어 달이 되어도 잡지 못하고

縣事多廢(현사다폐) : 고을 일이 많이 그르쳐지매,

監司成世純啓罷(감사성세순계파) : 감사(監司) 성세순(成世純)이 계청(啓請)하여 파직(罷職)한 것이다.

近禮武人(근례무인) : 근례는 무인(武人)으로서

賂任士洪(뢰임사홍) : 임사홍(任士洪)에게 회뢰(賄賂)하여

得授本職(득수본직) : 본직에 세수되었었는데,

聞其罷(문기파) : 파직됨을 듣고는

憤恚而死(분에이사) : 분하여 죽었다.

 

조선은 고래잡이를 하는 포경국가였을까. 여러 기록은 조선이 고래잡이를 하는 포경국가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아무튼 부안의 고래가 유명했던 것은 사실같다.

허균의 도문대작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요리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안의 도하와 오징어, 녹미가 상당히 유명했다.

 

도하(桃蝦): 부안(扶安)과 옥구(沃溝) 등지에서 난다. 색이 복숭아꽃 같은데 맛이 매우 좋다.

오징어[烏賊魚]: 서해에서는 일부 지방에서만 잡히는데 흥덕(興德)과 부안(扶安)에서 잡히는 것이 가장 좋다.

녹미(鹿尾 사슴의 꼬리) : 부안(扶安)에서 그늘에 말린 것이 가장 좋고, 제주도의 것이 그 다음이다

 

"나의 외가인 강릉에는 방풍이 많이 산출되는데 2월이면 그 고장 사람들이 새벽이슬을 타고 방품의 새싹을 따서 햇빛을 쏘이지 않는다. 잘 대낀 쌀로 죽을 쑤어 반숙이 되면 방풍을 넣고 한 소큼 더 끓인다. 차가운 사기그릇에 퍼담아 따뜻할 때 먹으면 입안에 단맛과 향기가 가득하여 3일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참으로 속간의 제호의 상품이다 내가 후에 변산 부안에서 이것을 만들어 보았으나 강릉의 방풍죽 맛에 따를 수가 없다

 

도문대작을 보면 방풍죽 이야기가 나온다. 왜 허균은 변산을 갔을까. 또 방풍죽이란 무슨 맛 일까.

일찍이 청렴하기로 소문난 암행어사 박문수는 부안을 '물고기, 소금, 땔나무가 풍부해 부모 봉양하기에 좋으니 생거부안(生居扶安)’이로구나'하고 격찬하는 등 부안은 인정이 넘치는 고장이다.

 

노령에서 북으로 뻗은 한 가닥의 맥이 부안에 와서 문득 바다로 들어간다. ··북쪽은 큰 바다이고 안쪽에는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변산이다. 산봉우리와 골짜기 평지와 벼랑을 가릴 것 없이 소나무가 높게 자라 햇빛을 가린다. 바다에서는 소금을 굽고 고기를 잡으며 산중에는 기름진 밭이 있다. 거기서는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돈으로 사지 않아도 구할 수 있다. 변산에는 산이 많은데 큰 산밑에는 큰 마을을 이룰 만하고 작은 마을에는 고사(高士)가 숨어 살 만하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변산에 대해 이처럼 썼다. 대개 경치가 좋은 곳 치고는 살기 좋은 곳은 없는 법인데, 변산은 살기도 좋고 경치도 좋은 천혜의 복지다.

<도문대작>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이 방풍죽의 맛이었다. 도대체 어떤 맛이기에 교산 허균 같은 인물이 향기가 입에 가득하여 3일 동안은 가시지 않는다세속에서는 참으로 상품의 진미라 극찬하였는지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방풍죽에 관해서는 <도문대작>뿐 아니라 <증보산림경제>에도 이른 봄에 나는 방풍의 새싹으로 죽을 쑤면 그 맛이 매우 향미롭다고 나와 있고, 이외에 다수의 옛 요리서에 그 흔적이 발견된다.

육당 최남선이 지은 <조선 상식>에는 강릉의 방풍죽이 평양의 냉면, 진주의 비빔밥, 대구의 육개장 등과 함께 지방의 유명한 음식으로 소개되어 있을 정도이다.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먹을거리지만 과거에는 흔히 해먹는 음식이었던 모양이다. <동의보감>은 방풍을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달면서 매우며 36가지 풍증을 치료할 뿐 아니라 오장을 좋게 하는 등 여러 증상에 효험이 있는 약용식물로 기술하고 있다.

방풍은 산과 들에도 나지만 바닷가 모래언덕에서 해풍을 맞고 자란 갯방풍을 윗길로 친다. 하균의 외가가 있던 강릉 경포대 해안에는 방풍이 많이 났던 모양이다. 과문일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부안에서 방풍죽을 판매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를 상품화할 수는 없을까.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부안태수 김윤제로부터 새우젓과 생선을 받았다. 부 안이 새우젓과 생선으로 유명한 까닭이다.

 

부안태수 김윤제(金允悌)'보내준 새우젓과 생선에 고마움을 보내며(謝扶安守金允悌 惠蝦醯及魚)'

 

'자주빛 새우의 빛깔은 복숭아 보다 좋고

정히 가을 정원 연줄기를 꺾어내는 시절을 만났으니,

이 맛을 아이들이 알까 걱정되니

그대 북쪽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마시게나.

 

가을비 내린 지 열흘이 지나 흙 속 벌레 꽃을 갈아 먹고

반찬은 오래되고 싫증나 오이와 가지는 쌓아놓았네.

대광주리 가득 고기들을 멀리서 보내주니

오히려 아내와 아이들 마주하며 스스로 자랑한다오'

 

소세양은 양곡문집(陽谷文集) 4권을 통해 부안태수 김윤제(金允悌, 1501~1572)로부터 새우젓과 생선을 받은 사실을 글로 남겼다.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조선 학자로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 본관은 문화, ()의 아들이다.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는 우반동(愚磻洞)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 있다. 변산반도를 형성한 변산(邊山)의 산자락을 따라 질펀한 평야가 널려 있고, 평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많은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우반동의 중앙으로 흐르는 냇물이 바로 반계(磻溪)라는 물줄기다.

우반동으로 이거한 그는 이듬해(1654) 진사시(進士試)2등 제3인으로 합격했으나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시험에 나갔던 것으로 이후로는 다시 과장(科場)에 나가지 않았다. 경화사족(京華士族: 한양에 기거하는 문사권력층) 출신의 유형원이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관직에 나가는 것을 거부한 데는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부친의 참화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된다.

변산 아래는 바닷가였다. 생선과 게가 많이 산출되는 곳이므로 그는 밥상을 대할 때마다

 

'전에 가세가 빈한해 어버이에게 좋은 음식을 올리지 못한 때가 많았는데 지금 이것이 있으나 누구에게 드리랴

 

하고 돌아가신 부모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린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누이가 서울에 살았는데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의식(衣食)을 함께 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전장(田莊)에서 들어오는 곡식과 다. 변산릐 생선과 게를 보내주었다. 늘 살림이 모자라진 않았는지 돌보며 마음쓰기를 마치 효자가 모친을 생각하는 것 같이 했다고 한다.

그는 '동진(東津) 시골 주막에서 나그네 회포(東津野店客懷)'란 시를 지었다.

 

'들이 넓고 하늘은 아득히 먼데

긴 강물은 바다로 흘러 들어가네.

 

하늘가에 돌아오는 기러기 있어

너무도 처량해 고향 생각나는구나'

 

'동진'이란 부안에 있는 지명으로, 그쪽으로 흐르는 강도 동진강이라 했다. 그는 '김제 연정(蓮亭)에서 고을원 심구옥(沈久玉)과 밤에 술을 마시며 읊음(金堤蓮亭, 與州倅沈久玉, 夜飮口號)'이란 작품을 남겼다.

 

'공중에 매달린 누각 높은 사다리

연못에 어른어른 달빛이 내려않으려는 듯.

 

거문고 타고 나니 연잎에 이슬이 젖는데

벽성(碧城)의 가을 쓸쓸한 밤이로다'

 

'벽성'은 김제의 별칭이며, 이곳에 벽골제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블로거 이종근이 저작권 갖고 있는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