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에 전북의 이야기가 나올까. 국보 제76호 이순신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1545∼1598)이 친필로 작성한 일기로 7권이다. 제1권은 『임진일기』로 1592년 5월 1일부터 1593년 3월까지, 제2권은 『계사일기』로 1593년 5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제3권은 『갑오일기』로 1594년 1월 1일부터 7월 28일까지, 제4권은 『병신일기』로 1596년 1월 1일부터 10월 11일까지, 제5권은 『정유일기』로 1597년 4월 1일부터 10월 8일까지, 제6권은 『정유일기속』으로 1597년 8월 4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이며 약간의 중복된 부분이 있다. 제7권은 『무술일기』로 1592년 9월 15일부터 10월 7일까지로 이는 7년의 난 동안 왜적과 싸우면서 계속해 썼다. 이는 ‘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초본으로, 내용중에는 수군통제에 관한 군사비책과 전황을 보고한 장계의 초안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어 당시 군사제도에 대해 연구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난중일기와 전북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순신장군은 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서울 의금부 옥문을 나와 4월 21일 여산에 도착, 22일 전주, 23일 임실, 24일 남원, 25일 운봉을 거쳐 구례로 경로를 바꾸게 된다. ‘전주에서 일찍 떠나 오원역(烏原驛)에 닿아 역관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아침을 먹었다. 얼마 후 도사(都事)가 왔다. 날이 저물녘 임실현으로 가니 현감이 예를 갖추어 대접했다. 현감은 홍순각(洪純慤)이다(난중일기 중)’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하면서 슬치를 넘어 관촌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곳은 오원역이 있던 곳으로 말에게 먹이를 주고 잠시 쉬었을 것이다. 관촌(館村)은 객지에서 묵는 숙소라는 뜻인 객관(客館)의 뒷 글자에서 유래가 됐다.
봉동생강은 1597년 이순신장군이 드셨음이 ‘난중일기’를 통해 확인된다. 전주판관 '박근'이, 백의종군때 이순신장군에게 선물한 것이다. ‘오전에 삼례역(완주군 삼례읍 삼례리)의 역장과 역리의 집에 이르렀다. 저녁에 전주 남문밖 이의신(李義臣)의 집에서 잤다. 판관 박근(朴勤)이 와서 봤다. 부윤(府尹, 오늘날 전주시장)도 후하게 접대했다. 판관이 비올 때 쓰는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와 생강 등을 보내왔다’
이는 정유년(1597년) 4월 22일(양력 6월 6일, 임오, 맑음)자 ‘난중일기’ 기록이다. 21일 여산 관아 노비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이순신장군은 다음날 삼례역을 거쳐 전주로 이동한 것이다. 난중일기는 이 해 9월 20일 위도, 21일 고군산도를 찾았으며, 22일엔 무장현감 이람 등이 와서 보았다고 기록했다.
이순신장군이 고창을 찾아왔을까. 다음은 앞선 병신년(1596년) 기록이다. ‘9월 12일 을사 비바람이 크게 불었다. 늦게 나서서 기에 오른지 10리쯤 되는 냇가에 이광보와 현여경이 술을 갖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도 왔다. 저물 무렵 무장(고창)에 이르러 잤다. 13일 병오 이중익과 이광축이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 종일 이야기 했다. 14일 정미 맑음. 하루를 더 묵었다. 15일 무신 맑음. 체찰사가 무장현에 이르렀기에 들어가 인사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16일 기유 맑음. 체찰사 일행이 고창에서 점심먹고 장성에 와서 잤다’고 나온다.
장군은 이외에 익산, 완주, 전주, 임실, 남원, 고창, 위도, 부안 등을 찾았다. 봉동생강은 이순신장군이 드셨으며, 홍보를 하고, 생강빵과 생강치킨 등을 개발하고 판매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자료이다. 난중일기 원문과 번역문을 붙여 널리 소개하면 좋겠다. 불행하게도 전북 도민들과 무수히 많은 행정가, 정치인, 그리고 지역민 등은 난중일기의 중요성은 모른다. 아니 한 번도 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전북교육청, 완주교육청 교육장과 장학사에게도 알려 지역향토사를 가르치고 알리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난중일기를 조목조목 읽으면서 우리네 역사도 잘 모르면서 일본과의 싸움을 한 올해가 아니었나 싶어 깊이 반성해본다.
이순신장군은 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서울 의금부 옥문을 나와 4월 21일 여산에 도착, 22일 전주, 23일 임실, 24일 남원, 25일 운봉을 거쳐 구례로 경로를 바꾸게 된다. ‘전주에서 일찍 떠나 오원역(烏原驛)에 닿아 역관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아침을 먹었다. 얼마 후 도사(都事)가 왔다. 날이 저물녘 임실현으로 가니 현감이 예를 갖추어 대접했다. 현감은 홍순각(洪純慤)이다(난중일기 중)’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하면서 슬치를 넘어 관촌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곳은 오원역이 있던 곳으로 말에게 먹이를 주고 잠시 쉬었을 것이다. 관촌(館村)은 객지에서 묵는 숙소라는 뜻인 객관(客館)의 뒷 글자에서 유래가 됐다.
봉동생강은 1597년 이순신장군이 드셨음이 ‘난중일기’를 통해 확인된다. 전주판관 '박근'이, 백의종군때 이순신장군에게 선물한 것이다. ‘오전에 삼례역(완주군 삼례읍 삼례리)의 역장과 역리의 집에 이르렀다. 저녁에 전주 남문밖 이의신(李義臣)의 집에서 잤다. 판관 박근(朴勤)이 와서 봤다. 부윤(府尹, 오늘날 전주시장)도 후하게 접대했다. 판관이 비올 때 쓰는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와 생강 등을 보내왔다’
이는 정유년(1597년) 4월 22일(양력 6월 6일, 임오, 맑음)자 ‘난중일기’ 기록이다. 21일 여산 관아 노비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이순신장군은 다음날 삼례역을 거쳐 전주로 이동한 것이다. 난중일기는 이 해 9월 20일 위도, 21일 고군산도를 찾았으며, 22일엔 무장현감 이람 등이 와서 보았다고 기록했다.
이순신장군이 고창을 찾아왔을까. 다음은 앞선 병신년(1596년) 기록이다. ‘9월 12일 을사 비바람이 크게 불었다. 늦게 나서서 기에 오른지 10리쯤 되는 냇가에 이광보와 현여경이 술을 갖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도 왔다. 저물 무렵 무장(고창)에 이르러 잤다. 13일 병오 이중익과 이광축이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 종일 이야기 했다. 14일 정미 맑음. 하루를 더 묵었다. 15일 무신 맑음. 체찰사가 무장현에 이르렀기에 들어가 인사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16일 기유 맑음. 체찰사 일행이 고창에서 점심먹고 장성에 와서 잤다’고 나온다.
장군은 이외에 익산, 완주, 전주, 임실, 남원, 고창, 위도, 부안 등을 찾았다. 봉동생강은 이순신장군이 드셨으며, 홍보를 하고, 생강빵과 생강치킨 등을 개발하고 판매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자료이다. 난중일기 원문과 번역문을 붙여 널리 소개하면 좋겠다. 불행하게도 전북 도민들과 무수히 많은 행정가, 정치인, 그리고 지역민 등은 난중일기의 중요성은 모른다. 아니 한 번도 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전북교육청, 완주교육청 교육장과 장학사에게도 알려 지역향토사를 가르치고 알리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난중일기를 조목조목 읽으면서 우리네 역사도 잘 모르면서 일본과의 싸움을 한 올해가 아니었나 싶어 깊이 반성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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