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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만경대

층대가 산꼭대기까지 모두가 암석이라 / 말에서 내려 걸음걸음 높은 데로 올라가니
진포는 아득히 학의 물가에 연하였고 / 변산은 희미하게 큰 바다에 꽂히었네
層臺通頂盡巖嶅 卸馬登臨步步高 鎭浦微茫連鶴渚 邊山隱約揷鯨濤

 

기이함 찾는 건 방일한 시 생각에 의지커니와 / 먼 데를 바라보매 어찌 눈 피로함을 사양하랴
오래 앉았으매 청풍이 두 겨드랑이에 나오니 / 坐久淸風生兩腋서왕모에게서 빙도를 얻어먹은 듯하구나
搜奇政倚詩魂橫 望遠何辭眼力勞 坐久淸風生兩腋 擬從金母嚼氷桃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단서를 제공하고 부관참시를 당한 사림파의 영수요 1487년 부터 1년 동안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면서 두루 순시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전주 만경대(萬景臺)오르고 읊은 시다.

지도는 1800년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회화식 지도 광여도(廣輿圖)이다.

천년고도 전북 전주시를 지켜온 고덕산(高德山·603.2m),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과 대성동, 완주군 구이면과 상관면 등에 걸쳐 있다.

남고산성(南固山城),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에 있는 901년에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것으로 일명 견훤산성(甄萱山城) 혹은 고덕산성(高德山城)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누각하나 없을 리 만무하다. 그것도 오래전에 고덕산(高德山) 북쪽 기슭에 만가지 경물을 조망하는 전주 남고산성의 천경대, 억경대와 함께 장대(將臺) 만경대(萬景臺)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주부(全州府) 산천편에 이렇게 적고 있다.

 

"고덕산(高德山) 북쪽 기슭에 있다. 돌 봉우리가 우뚝 솟아 마치 층운(層雲)을 이룬 듯이 보이는데,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사면으로 수목이 울창하며 석벽(石壁)은 그림같이 아름답다."라고....

 

고려의 마지막 수호자이자 조선의 정신적 건국자라고도 칭하고 있는 절인의 대명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 충숙왕 복위 6∼1392 공양왕 4)가 오르고 암석 사이에서 만경대(萬景臺) 글씨와 우국시(憂國詩)를 읊은 것을 영조 22년(1742) 진장(鎭將) 김의수(金義壽)가 시를 벼랑에 새겨 놓고 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천인(千仞)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올라오니 품은 감회 이길 길이 없구나.
청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니 부여국(扶餘國)이요, 황엽이 휘날리니 백제성(百濟城)이라.
千仞岡頭石逕橫 登臨使我不勝情 靑山隱約夫餘國 黃葉?紛百濟城

9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를 슬프게 하고, 백년 호기는 서생(書生)을 그르치게 하는구나.
하늘가로 해가 져서 푸른 구름이 모이니, 고개 들어 옥경(玉京 서울)을 바라볼 길 없구나.
九月高風愁客子 百年豪氣誤書生 天涯日沒浮雲合 矯首無由望玉京

 

시는 당시 서울인 개경을 바라보며 지은 시가 지금도 돌벽에 그대로 남아 있다. 정몽주는 조선 태조 이성계(1335~1408년)가 전승 기념으로 전주 오목대에서 큰 잔치를 베풀면서 중국 초패왕을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해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 즉

 

"큰 바람이 일어나서 구름이 날아 오르다 / 위세가 해내(海內)에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네./ 어찌하면 용맹한 무사를 얻어 천하를 지키게 할까 大風起兮雲飛楊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읊으며 흉중에 고려를 엎고 조선을 개국할 뜻을 묻어두었던 천하제패의 꿈을 은연중 드러내며 피력하자 정몽주는 말을 달려 남고산 만경대 올라 기울어가는 고려를 걱정해 지은 것으로 수 많은 희노애락이 녹아 있는 곳이다.

정치적으로 이성계와 반대편에 섰던 정몽주는 이 시를 지은 뒤 몇 년 후에 이성계 일파에 죽임을 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몽주를 죽였던 태종이방원은 많은 정적들을 제거한 후에 충성의 표상으로서 정몽주를 지목하는 모순성을 드러낸다.

 

김시습이 젊은 날 호남지역에 유람하면서 만경대에 오르고 남유록(湖南錄)에 남겼다.

 

萬景臺上好風煙 十里平湖在眼前 千古興亡棋半局 百年成敗草連天
落霞孤鶩暮山外 斷雨片雲殘照邊 景物自然多感慨 上方鍾磬正淸圓/梅月堂詩集卷之十

 

또 시문에 뛰어나 고봉 기대승과 비견되었고, 혼천의기(渾天儀記)를 짓는 등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규봉(圭峯) 백단(栢潭) 구봉령(具鳳齡 1526 중종 21~1586 선조 19) 5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며 만경대(萬景臺) 누각에 올랐다.

 

아스라이 빼어난 경치 푸른 하늘에 떠있고 / 천지가 만 리에 활짝 트여 상쾌하게 보이네
성 가득한 봄빛은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고 / 떨어진 꽃 채색구름 속에 붉은 비 되어 내리네
迢迢勝景跨靑空 快眼乾坤萬里通 春色滿城新畫出 落花紅雨綵雲中

 

영조 때 문신 창백헌(蒼白軒) 권적(權 樀 1675~1755)이 이곳에 올라 정몽주의 긴 감흥을 차운해 남기고 있어 이 시기에도 있었음을 알리고 있다.

 

아득한 봄 날씨에 노인의 의기가 충만하여/한가론 날 만경대에 오르니, 내 마음이 서글퍼.
이름난 도회지는 성조가 창업한 터전이요/황폐한 보루는 견훤 왕이 말달리던 성(城)일세.
漠漠春天老氣橫 登臨暇日感余情 名都聖祖興龍地 廢壘甄郞躍馬城

만리 산하를 바라봄에 끝 닿는데 없고/스무해 불효 후회(風樹) 남은 생을 어이할꼬?
가인아 이제 슬픈 노랠랑 부르지 마오/일백번 고쳐죽어도 임 향한 일편단심 구천에 사무치리.
萬里山河騁遠矚 卄年風樹奈餘生 佳人且莫歌悲曲 百死忠魂杳九京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부(全州府) 산천편에 만경대를 두고 "봉우리가 우뚝 솟아 마치 층운(層雲)을 이룬 듯이 보이는데,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사면으로 수목이 울창하며 석벽(石壁)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서쪽으로 군산도(群山島)를 바라보며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한다. 동남쪽으로는 태산(太山)을 지고 있는데 기상이 천태만상"이라고 적고 있다.

또 서울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이광사(李匡師)아들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 1736 영조 12∼1806 순조 6)이 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지리전고(地理典故) 산천의 형승편에 "부(府)의 동남쪽 10리 거리인 고덕산(高德山)의 북쪽 기슭에 있다. 석봉이 기이하게 빼어나고 형상이 층층으로 겹쳐진 구름과 같다.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다. 사면에 숲이 울창하고, 석벽은 그림과 같다. 서쪽으로 여러 산도(山島)를 바라볼 수 있고,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하며, 동남쪽은 태산(太山)을 등지고 있어서 경치가 천태만상이다."이라고 적고 있다.

그랬으니 당대 거두의 문인묵객들이 이곳을 피해가기는 힘들었을 터, 한유에 비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문신이요 대 학자로 빠질 수 없는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 세종 21∼1488 성종 19)도 조선(朝鮮) 이태조(李太祖)의 고향인 패향(沛鄕)에 대한 십영(十詠) 중 만경대를 3영으로 치고 읊으면서 감흥을 흘러냈다.

 

천 길이나 높은 대가 창공에 솟아 있어 / 위아래 천지 사이에 만 리가 탁 트였구나
견훤의 흥망에 관한 일을 말하지 마소 / 청산은 말이 없고 새만 높이 나노라네
臺高千仞倚靑空 俛仰乾坤萬里通 莫說甄郞興廢事 靑山黙黙鳥飛中

 

그의 감회는 님의 생각에 더욱 간절했다.

 

아직도 견랑의 종횡무진한 의기가 생각나서 분분했던 성패에 은연중 맘 상하네
하루 아침에 가문의 재앙이 일어나니 /수백 번 싸웠던 철옹성도 별수 없네
尙想甄郞意氣橫 紛紛成敗暗傷情 一朝自作蕭墻禍 百戰終非鐵甕城

천명 받은 진인이 백수에서 일어났거늘 어떤 늙은 간물이 창생을 그르친단 말인가
용이 일어났던 풍패의 땅에 올라보니 더욱 간절한 님 생각에 옥경을 바라보네
大數眞人興白水 老奸何物誤蒼生 登臨豐沛龍興地 益切思君望玉京/사가시집卷之十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단서를 제공하고 부관참시를 당한 사림파의 영수요 1487년 부터 1년 동안 전라도관찰사로 지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머물르고 붓초리를 휘둘르고 있다.

 

만 길 봉우리의 성문을 두루 보면서 / 남고사(南高寺) 안에 승상을 빌려 앉았노라니
강산의 웅장 수려함은 한토인 줄 알겠고 / 들쭉날쭉한 누관들은 패향(전주)이라 일컫누나
流眺城闉萬仞岡 南高寺裏借繩床 江山雄麗知韓土 樓觀參差稱沛鄕

천 두둑 밀 보리는 초여름을 바라보고 / 몇 집의 가취 소리엔 석양이 되어 가네
굳이 흥망 성쇠의 일을 논할 것이 없어라 / 오늘의 번화함은 사방에 으뜸이라오
千隴來牟將孟夏 幾家歌吹欲斜陽 不須料理興衰事 今日繁華冠四方

이 년의 직무 속에 귀밑이 희어졌는데 / 돌산 봉우리에서 술잔을 손에 쥐니
푸른 눈의 선승은 채소 다발을 제공하고 / 빨간 치마 기녀는 꽃가지를 꼬는구나
二年簿領鬢成絲 碧眼禪僧供菜把 碧眼禪僧供菜把 蒨裙歌妓撚花枝

버들꽃은 봄날의 개인 뒤에 성해지고 / 소나무 이슬은 해 저문 때에 내리도다
한가롭게 노니는 것을 괴이타 여기지 마소 / 부절 깃대 다 떨어지고 임기가 찼다오
柳綿撲撲春晴後 松露霏霏日仄時 莫怪優游仍嘯傲 節旄落盡及苽期/점필재집 시집 제22권

 

도승지 동강(東江) 신익전(申翊全, 1605~1660)도 이곳에 올라 시를 남겼다.

 

悠悠往迹劇萍浮 一十年前此裏遊 尙憶臺高窮大海 偏怜峯峭鎭雄州
登臨已是成今古 俯仰堪嗟等蜹蝣 勝地相逢不同賞 詠君詩什足寬愁次
李生滋登完山萬景臺韻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저항적 방일(放逸)의 생활을 즐기다가 32세의 나이로 요절했던 생육신으로 통하는 절인 남효온(南孝溫 1454 단종 2~1492 성종 23)도 이곳에 오르고 만감의 감회를 남겼다.

 

신라 말엽 완산 땅은 도적의 소굴이 되어/견훤이 칼을 잡고 간계를 부렸네.
대동강 물로 말 마시게 하려던 평생의 그 뜻/이루지 못하고 속절없이 죽고 빈 누대만 남았네.
羅季完山爲賊藪 於菟撫劍騁姦回 平生飮馬浿江志 未就而亡空有臺

보잘것없는 땅 차지한 지 사십 년 세월/머리카락 성글어도 그 뜻 얼마나 장대한가.
안록산처럼 만년에 아들놈의 액운을 만났으니/북쪽으로 옮겨가서 왕건에게 의탁했네.
竊據幺麽四十霜 頭毛種種意何長 祿山晩遭猪兒厄 人物北遷靑木王

아침나절 다하도록 봄눈 하얗게 내리는데/정오 지나 누각에 올라 술 한잔 돌리네.
조물주 어린아이 나그네 눈을 시기하여/일부러 바람을 시켜 돌아갈 길 재촉하누나.
終朝春雪白皚皚 過午登臨酒一回 造物小兒猜客眼 强敎風伯促歸來

 

그러나 이곳도 임진왜란을 비롯해 전란이 닥칠 때마다 고덕산과 그 줄기에 있는 남고산성은 전주를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을 지닌 한반도에서 치열한 전쟁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전라도 감찰사 지포(芝浦) 이재학(李在學 1745~1806)가 이곳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바위 절벽 높은 곳에 비탈진 험한 길에/높은 대 솟은 곳에 온갖 정감 솟아나네.
하늘이 성조를 내시어 왕업을 일으켰고/이곳은 견훤이 말 달리던 곳이로다.
危石嶒峻鳥道橫 高坮起處愜群情 天開聖祖興龍業 地是甄郞躍馬城

한가한 날 가벼운 차림 숲 속에 취했는데/봄바람에 피리소리 산마루에서 들리네.
저 멀리 확 트인 산하의 형세를 지점하니,/전라도 쉰 셋 고을이 모두 서울을 향해 읍조리네.
暇日輕裘林下醉 春風畵角岫頭生 平臨指點山河勢 五十三州拱帝京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 ~1806)이 찬술한 조선시대의 사서(史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에 전라도 전주의 만경대(萬景臺)는 부(府)의 동남쪽 10리 거리인 고덕산(高德山)의 북쪽 기슭에 있다. 석봉이 기이하게 빼어나고 형상이 층층으로 겹쳐진 구름과 같다.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다. 사면에 숲이 울창하고, 석벽은 그림과 같다. 서쪽으로 여러 산도(山島)를 바라볼 수 있고,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하며, 동남쪽은 태산(太山)을 등지고 있어서 경치가 천태만상이다 라고 전하고 있다.

현재 일대 바위에 새겨진 만경대라는 글씨는 1742년(영조22) 진장 김의수가 각자(刻字)했다고 전한다. 그 스토리텔링을 찾는데 새털같이 많은 시간에 예약한다.

조선 중기 문신으로 영의정에 올랐지만 전남 진도 땅에서 운명을 달리한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만경대(萬景臺)에서 읊은 시로 또다른 전자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들쭉날쭉 교목 숲에 저녁 연기 둘렀는데/만경대 밑 지나는 나그네, 만단의 시름 겨워
지령은 임금을 내어 왕기 아직 서렸고/산 모습 범같이 앉아 웅장한 성을 수호하네.
參差喬木暮煙橫 萬景臺邊過客情 地以龍興留旺氣 山如虎居鎭雄城

긴 세월 자손이 번성, 왕업을 창건했고/한 지역 삼·뽕 농사 후대 생업 편안하네.
조선왕조 발상지가 이로부터 융성하니,/뉘와 함께 여기가 서울이 될지 모르왜라
千秋瓜瓞基洪祚 一域桑麻樂後生 岐邑沛鄕從此盛 不知誰與此爲京

 

양곡 소세양(1486 성종 17 ∼1562 명종 17)도 만경대에 올라서서 읊은 그 감회가 처랑하다.萬景臺次圃隱韻

 

높이 반허공에 걸친 만경대에 올라 기대어 섰노라니 곧 십년 전 생각나네
삼면으로 구름 낀 산에 새로 비가 지나고 해지는 전주성에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
巃嵸陟入半空橫 徙倚偏驚十載情 三面雲山新過雨 萬家煙火夕陽城

 

홀로 늦가을 국화옆에 서 있는데 /오마타고 다시 오니 흰머리 생겨났네
슬프도다 내 고향은 어디쯤 있을까 용화에서 머리 돌리니 곧 기경이라
孤筇獨立黃花晩 五馬重臨白髮生 惆悵鄕閭在何許 龍華回首卽箕京

 

뛰어나 고봉 기대승과 비견되었고, 혼천의기(渾天儀記)를 짓는 등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규봉(圭峯)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1526 중종 21~1586 선조 19)이 1583년(선조16) 5월, 전라도 관찰사 자격으로 올랐다.

 

장한 마음에 일찍이 천하도 좁게 여겼는데 / 홀로 봉우리 위에 오르니 한바탕 웃음이 이네
이제 알았네, 가슴 속에 막힌 것이 없으면 / 아득한 천지에 티끌하나 없게 되는 것을
壯心曾是隘寰垓 獨上峯頭一笑開 始覺胸襟無滯礙 乾坤萬里絶纖埃

 

조선후기의 시인 이서구(1754 영조 30 ∼1825 순조 25)도 오른다. 가을바람을 맞서며 정몽주를 추모하는 긴 회포를 흘러내고 있다.萬景㙜 謹次圃隱先生元韵

 

높은 누대에 기대어 저녁구름은 걸려있고 /슬프고 외로운 신하의 나라를 떠난 정이어라
수 겹의 푸른 산은 광야를 에워싸고 /집집마다 단풍은 성을 거듭 둘러쌌네
高臺徙倚暮雲橫 惆悵孤臣去國情 數疊靑山圍曠野 萬家霜樹擁重城

서풍은 서걱거리며 가을 바람소리내고 지는 해엔 아득한 바다 기운 생겨나네
포은이 시를 읊으며 바라본 곳이기에 /천애에서 나 홀로 신경을 바라보네
西風淅瀝秋聲至 落日蒼茫海氣生 爲是圃翁吟眺地 天涯獨自望神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산천의 형승(形勝)에서 전라도 전주의 만경대(萬景臺)를 부(府)의 동남쪽 10리 거리인 고덕산(高德山)의 북쪽 기슭에 있다. 석봉이 기이하게 빼어나고 형상이 층층으로 겹쳐진 구름과 같다.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다. 사면에 숲이 울창하고, 석벽은 그림과 같다. 서쪽으로 여러 산도(山島)를 바라볼 수 있고,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하며, 동남쪽은 태산(太山)을 등지고 있어서 경치가 천태만상이다 라고 적고 있다.

이곳은 의식있는 절인들의 순례지이기도 했다.

 

조선 말기의 좌찬성, 대제학 등을 지냈던 문신으로 김윤식(金允植)·민태호(閔台鎬)와 함께 당대의 문장가로 유명하였던 미산(眉山) 한장석(韓章錫 (1832 순조 32 ∼1894 고종 31)이 1874년에 명을 받들고 3월에 출발하여 4월 중순 까지 41일동안의 조선시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식년시 이외에 실시된 임시과거를 증광시(增廣試), 호남시사(試士)를 주제하면서 쓴 남행집 서문(南行集小序)에서 "을축(乙丑), 서장대(西將臺)에 올랐는데 수십 걸음 앞에 돌연히 솟구쳐서 암석이 우뚝하고 멀리 바라봄에 확 트여서, 아래로 완성(完城)이 한 폭의 그림처럼 굽어 보여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정포은(鄭圃隱) 선생의 만경대(萬景臺)라는 세 글자가 있고 또 새겨진 시가 있는데 은은히 분별할 수 있었다."다고 적고 머물며 시를 읊었다. 萬景臺次圃隱先生石上詩

 

허공에 닿은 산성에 가파른 길 있고 雉堞連空鳥道橫
높은 가을날 멀리 바라보니 호기가 동하네 高秋遠眺動豪情
깊은 이끼는 포은의 천년 묵은 자취요 苔深圃老千年石
한조각 구름은 견훤의 성 한 조각이라 雲斷甄郞一片城

풍경소리는 청산의 외로운 성에서 일어나고 畵角靑山孤壘起
푸른 연기 붉은 단풍은 집집에 있네 蒼烟紅樹萬家生
석양에 홀로선 천애의 길손이여 斜陽獨立天涯客
어느 곳에서 멀리 한양을 바라보는가 何處迢迢望玉京12)

 

전라남도 화순 동복출신 전라감찰사를 지냈던 우의정 수촌(水邨) 오시수(吳始壽 1632 인조 10 ∼1681 숙종 7)도 올라 그 감회를 나타낸다.萬景臺踏靑

 

무성한 풀을 사랑하여 반나절을 머무르며 愛此離離半日淹
신록에 앉아서 휘장을 펼치노라 坐來新綠襯帷襜
작은 언덕의 연기는 베짠 것 같고 煙沈短壟還如織
긴 언덕의 바람은 꼭 술 취한 것 같네 風動長堤又似酣

두 발로 걸을 때마다 푸른 풀은 무성한데 雙屐過時靑苒苒
지팡이 닿는 곳마다 푸르름이 섬세하네 一筇携處碧纖纖
해마다 성남쪽의 풀을 다 밟아도 年年踏罷城南草
잠시 후 거울 속 흰머리 늘어감을 느끼네 半覺霜毛鏡裏添

 

이곳에는 무수한 문인묵객들의 순례지였다. 그들의 속트림을 엮으면 전집으로 부족할 방대한 대 서사시다.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평론가였던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1677 숙종 3∼1724 영조1)이 1722년 스승이요 장인이었던 장인이었던 이조판서를 지낸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 1657 효종8~1723 경종3)의 강진군 유배지에 다녀오면서 이곳에 들렸다.

 

登南高寺萬景臺 用圃隱韵
危臺長嘯海山橫 自有登臨感慨情 斜日歸鴉金馬國 高風落木甄萱城
野平遠樹千重出 天闊浮雲萬里生 王迹肇基元此地 鬱䓗佳氣接神京
頭陀草冊九 / 南行集[上]

 

윤상진(尹尙鎭)도 이렇게 감흥을 나타낸다.

 

층층 벼랑 하얀 벽이 반공에 걸렸는데/흰 구름만 아득히 그리움이 사무치네.
한 시대 번화했던 여기 전주부인데 / 천년의 드높은 기상 옛 견훤성이라.
層崖粉壁半空橫 雲海蒼茫豁遠情 一代繁華今沛府 千年伯氣古甄城

드높은 가을 하늘 쓸쓸히 떨어지는 나뭇잎에/해 저문 저녁노을 겹겹이 피어나네.
바위 위엔 시만 남고 사람은 이미 떠났으니/오색 구름 어느 곳이 바로 서경이던가?
高秋落木蕭蕭下 薄暮殘煙再再生 石上留詩人已去 五雲何處是西京

 

나학경(羅學敬 1801-1875)은

 

느릿느릿 비탈진 들길을 오르노라니/늦가을 풍경이사 고금이 같을세라.
산과 물이 막다른 곳에 다시 평지가 틔고/빙 두른 암벽을 보니 여기 바로 남고성.
紅葉無心留遠客 黃花似惜老浮生 圃翁往蹟詩留意 義氣崢嶸白玉京

 

붉은 낙엽은 무심히 나그네를 붙들고/누런 국화꽃은 이 늙은이를 애달프게 하네.
포은이 지난 발자취에 시만 남아있는데/임을 향한 의기는 정녕 우뚝 솟았네.
緩步登登石逕橫 九秋秋色古今情 溪山盡處旋平地 岩壁環來是固城/錦村遺稿

 

김종직은 왜 이곳에서 많은 여운이 남았을까? 그가 만경대에서 읊은 시로 또다른 정자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삼 년의 각박한 벼슬길에 귀밑머리 희어지고/낙각산 봉우리에서 술잔을 드노라네.
벽안의 선승(禪僧)은 간결한 소채를 내오고/붉은 치마 기생들은 꽃가지를 들었네.
三年簿領鬢成絲 犖角峰頭把酒巵 碧眼禪僧供菜把 蒨裙歌妓然花枝

 

버들꽃 휘날리는 맑게 갠 봄날 오후/솔잎에 이슬(松露) 내린 서산에 해는 지누나.
속진에 얽매지 않고, 유유자적 개의치 마소./부절 끝 털장식이 빠졌으니 임기가 찼나 보이!
柳綿薄薄春晴後 松露霏霏日昃時 莫怪優游因嘯傲 節旄落盡及苽期

 

참고문헌고전번역서/古典譯. 全州讚歌. 호남문화연구 제48집
문화.오인교

한국매일 南道 정자기행(2926)-전주 만경대(萬景臺):저작권 가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