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산성마을과 문화예술&역사 스토리
전주 동고산성과 남고산성에는 백제의 부흥을 꿈꾸었던 견훤의 숨결과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후백제의 수도 전주를 알 수 있는 동고산성(전라북도 기념물 제44호). 그곳에는 견훤왕궁터(피난성)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고산성이 자리한 승암산 중턱에 견훤의 후백제 도성터가 발굴됐는데, 전체 188칸으로 고대 단일 건물 중 최대 규모입니다. 특히 발굴 당시 출토된 연꽃무늬의 수막새와 암막새에는 전주성(全州城)이라 쓰여져 있어 이곳이 견훤왕궁터(피난성)였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고산성 견훤왕궁터를 중심으로 승암산 정상에는 치명자산 성지가 자리잡고 있으며, 전주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동고사도 있어 후백제의 역사에서부터 천주교 순교 성지까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남고산성은 고덕산 자락을 따라 쌓아진 산성으로, 후백제 견훤이 도성인 전주의 방어를 위해 쌓았다고 해 견훤성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조선 순조 13년(1813)에 고쳐 쌓으면서 남고산성이라 불렀습니다.
또 남고산성이 위치한 남고산에는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 등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이중 만경대는 산성의 서문을 향해 우편으로 높게 솟아 있는 바위의 봉우리로, 남쪽 바위 벼랑에는 고려말 정몽주가 남긴 우국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고산성과 남고산성은 전주한옥마을과 가까워 이 일대에서 후백제에서부터 조선시대, 근·현대사까지 천년전주역사를 담아갈 수 있습니다.
국립무형유산원 뒤편 남고산성 길을 따라가면 전주 산성마을이 나타난다. 현재 산성마을은 수려한 자연풍경과 역사·문화적 자원을 갖고 있지만 문화재 규제로 개발행위가 제한되면서 상당수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산성벽화마을 충경사 - 삼경사 - 천경대 - 동포루지 - 남고산 - 북장대 - 억경대 - 서문지 -남고사 - 만경대 - 서암문지 - 관성묘로 이어지는 천 년의 기억을 뒤돌아 보는 길이 다시 복원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전주의 비보풍수
풍수지리상 전주는 배역지지(背逆之地)입니다. 배산임수는 풍수지리의 근본입니다. 집이나 마을이 남향을 하듯 읍성도 남향으로 들어서야 합니다. 그런데 전주는 주산이 성황산(지금은 승암산으로 호칭)이고 좌청룡과 우백호의 지맥이 북서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전주의 물줄기는 다른 곳과 반대로 남동출북서류하고 있습니다.
배산임수 형국에서는 남동(坤)쪽이 툭 트인 자리이어야 하는데, 전주는 읍성에서 바라보면 곤지산 방향은 장막으로 앞을 가리듯 산세로 둘려있다. 읍성 구조 상 답답한 면도 있지만 오히려 읍성과 산세가 안성맞춤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주의 산세와 읍성은 천지 조화와 음양상생의 기운이 우주적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처음 전주읍성을 조성할 때에 풍수좌향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풍수에서 좌향과 비보가 중요하듯이 읍성풍수에서도 좌향과 비보풍수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전주의 풍수좌향은 사신도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사신(四神)은 네 마리의 신성한 영물을 가리킵니다. 사신은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를 가리키며 이들은 모두 상상의 동물입니다.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서도 이 사신을 등장시켜 수호를 바라는 염원을 나타내기도 했었는데, 이런 현상은 비단 그림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에도 나타납니다.
전주 지명에도 사신도가 배열되어 있는데, 동쪽으로는 기린, 남쪽으로는 봉황, 서쪽으로는 용, 북쪽으로는 거북을 두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사신도에서 백호가 기린으로 대체되었을 뿐 각 방위에 따른 영물의 배치가 명확학비다. 동쪽의 기린봉은 산세가 곧게 솟아났으며, 남쪽의 봉황암은 고지도에서확인되고 있으며 봉황암 앞에는 봉황지가 있었으며 현재 효자동 근처였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전주의 서쪽은 완산칠봉의 용이 서쪽으로 향하여 용트림하고 있으며 용의 머리부분이 현재의 용머리고개(龍頭峴)가 있습니다. 북쪽으로 읍성 내에 현무지(玄武池)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지리적으로 기린봉의 산세가 도솔봉으로 이어오다가 읍성쪽으로 내려와 금암동(전 KBS방송국 전주총국)에 거북바위(龜岩)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전주의 비보풍수는 진북동의 비보사찰․비보석불․비보숲과 내외 수구막이와 덕진연못을 들수 있습니다. 진북사는 전주의 사고사찰가운데 북고사(北固寺)에 해당한다. 진북사는 전주의 진북동에 위치합니다. 진북동은 북쪽을 진호하는 풍수지리지명입니다.
4고사(四高寺)
동고사 : 전하는 말에 의하면 후백제 견훤왕조시대 이전부터 창설된 절이라고 합니다. 그 처음 위치로는 승암산 배부분, 지금의 동고사 자리로 여겨진다. 도량 천년의 연륜을 산다는 귀목나무 머리를 짚어 유지(遺址)라고도 말합니다.
서고사 : 서산(황산·황방산)의 중턱에 있는 사찰로 유명한 ‘효자천(孝子泉)’이 있습니다.
남고사 : 남고산성 내에 위치한 절로 만경대,천경대,억경대 등에 둘러쌓여 있습니다.
북고사(진북사) : 완산칠봉 중 용두봉의 자락이 북으로 흘러내리는 유연대 북서단 속칭 부엉바위절(호랑이 아가리터)라 부르는 곳(진북터널 옆)에 있습니다. 관찰사 이서구 선생의 고사가 담긴 절로 경내엔 오백년 내내 숲정이 바람 속에서 다소곡이 지키는 미륵불의 품에 선 고요가 흐릅니다.
전주 읍성의 북쪽을 진호하는 사찰인 진북사와 사면석불 가운데 북면불이 조성되어 있으며, 진북사 건너편에는 숲정이라는 비보숲이 있었습니다. 건허수지(乾虛藪止)에 비보숲을 조성한 것입니다. 비보숲은 물을 흘러나가도 지기는 걸러내는 기능을 합니다.
비보숲은 수구막이에 위치합니다. 전주에는 내수구와 외수구가 있습니다. 수구맥이에 비보숲이 조성됩니다. 수구맥이란 풍수지리상 배산임수의 지세에서 물줄기가 마을입구로 빠져나가면서 마을이 지기가 허해지는 것을 막아준다는 풍수장치를 말합니다. 전주의 지기가 북서쪽으로 유실되는 것을 방어하고자 진북동에 비보숲을 조성합니다.
전주의 수구맥이는 외수구와 내수구로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내수구는 기린봉에서 내려오는 검암천과 전주천이 합수되는 곳이며, 외수구는 다시 전주천과 오봉산에서 발원하는 삼천천이 만나는 곳이다. 이곳에 추천대가 있어 자연경관이 수려합니다.
비보숲은 요즘 코어텍스와 같은 섬유질을 말합니다. 진북동은 전주 읍성의 풍수비보상 가장 중요한 지역입니다. 진북사는 화산의 암애 측벽에 위치하였으나 아파트 증축으로 폐허되었다가 다시 그곳에 복원되고 있습니다. 청룡맥이 질주하다가 전주천을 만나자 멈추어 선 것이다. 산(남성)이 수(여자)를 만나면 모든 게 멈추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기린맥은 읍성을 품고 북서쪽으로 질주하다가 물을 만나 지맥이 멈춰 선 곳이 건지산입니다.
건지산(乾止山)은 건방위에 멈추어 선 산의 지명입니다. 건지산 맞은 편에 가련산(可連山)이 있습니다. 건지산과 가련산을 제방으로 연결하여 덕진연못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덕진연못은 인공적으로 파서 만든 연못이 아니라 제방을 쌓음으로서 물이 고여 만들어진 연못입니다.
전주의 북서쪽 허결하여 전주의 지덕이 누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방을 쌓은 것입니다. 이와같이 전주의 풍수 비보는 조선 후기 전라도 관찰사였던 이서구가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중앙대 송화섭교수는 “전주 읍성과 풍수체계가 파손 유린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 침략기이다. 경기전에 소학교를 세우고 오목대와 이목대를 절단냈으며 용머리고개로 길을 내고 심지어는 동익헌을 없애고 길을 내었다. 조선왕조의 본향인 전주의 풍수지리 구도를 훼손시켜 조선왕조의 국혼을 파멸시키고자 했던 의도가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되었음을 밝힌다”고 했습니다.
전주 산성마을과 문화 역사 이야기 ‘물, 공기 숲이 좋은 삼경사’
전주 산성마을 인근 남고사에서 전주부중으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는 전원적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라 하여 ‘남고모종(南固暮鐘)’으로 일컬어지며 ‘완산8경’의 하나로 꼽혔습니다.
또, 이 일대는 충경사, 동문지, 북장대, 억경대, 만경대, 남고진사적비, 남고사, 삼경사 등 문화유산이 기라성처럼 많습니다.
충경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충경공 이정란(1529~1600)의 공적을 기리는 사우(祠宇)입니다. 삼경사(三景寺)의 창건 연대나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三景寺'란 이름은 초대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효봉(曉峰, 1888~1966) 스님이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스님이 이곳에 와보니 "물, 공기 그리고 숲"이 좋아서 삼경사라 했다고 전합니다.
완산부지도에 남고산성, 후백제 역사 공간 전주부자리 충첩돼 나타나
보물 제1876호 완산부지도(국립전주박물관 소장)는 전주성을 지도의 중앙 우측에 배치시키고 중앙을 여백으로 처리한 것은 다른 지도에서 전주성을 중앙에 배치한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중앙 우측에 그려져 있지만 내용상 중심인 전주성의 모습은 다른 지도에서 구현하지 못했던 치밀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곽의 성벽 뿐만 아니라, 객사, 선화당, 동헌 등의 건물과 함께 경기전, 조경묘의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으며 이와 함께 관아 사이로 묘사된 민가들은 민본을 중시했던 조선의 이념을 보여준다. 지도에서 상세히 묘사된 남고산성은 후백제의 역사 공간이 전주부의 지리에 중첩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산성마을 일대 문화재 5점 보유
이곳에는 모두 4점의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적 제294호 전주 남고산성, 전라북도 기념물 제72호 남고사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5호 관성묘, 전주시의 향토문화유산 1호 만경대 암각서, 전주시의 향토문화유산 제2호 남고진사적비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적 제294호 전주 남고산성
사적 제294호 전주 남고산성은 전주 남쪽에 있는 고덕산과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로 불리는 봉우리를 둘러 쌓은 산성입니다. 남동쪽으로는 남원·고창으로 통하는 교통상의 중요한 곳을 지키고, 북쪽으로는 전주를 내려다 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이곳에 고덕산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조선 순조 13년(1813)에 성을 고쳐 쌓고 남고산성이라 했습니다. 이 성은 유래가 매우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보입니다.
순조 13년에 보수공사가 있을 때 성 안에는 4군데의 연못과 25개의 우물이 있었으며, 민가 100여 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곳을 지나가다보면 우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문은 동·서에 있었으며 각기 3칸, 6칸 규모의 누각형 문이 있었습니다. 서쪽에 비밀문이 하나 있었으며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포루가 설치되어 있고, 관청, 창고, 화약고, 무기고를 비롯한 각종 건물이 즐비하게 있었다. 지휘소인 장대는 남·북에 각각 설치되었으며, ‘남고사’란 절이 있었습니다. 현재 성의 둘레는 약 5.3㎞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성벽이 많이 허물어졌고 ‘남고진사적비’가 산성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011년 7월 28일 남고산성이 전주 남고산성으로 명칭이 변경됐습니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72호 남고사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72호 남고사지는 신라 문무왕 8년(668)에 명덕(明德) 스님이 세웠다고 하는 남고연국사(南固燕國寺)가 있던 자리입니다. 「연국(燕國)」은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산성 지역에 자리잡은 절에 많이 사용되던 명칭입니다. 조선 후기부터는 남고사로 불리었는데, 이 절의 승려들이 「남고산성」을 지키는데 한 몫을 담당했습니다. 옛 남고사 터는 현재의 남고사 대웅전 서쪽 전방의 건물이 있는 곳이다. 현재 남고사 건물은 약 100여 년 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79년에 대웅전 등을 다시 지어 지금의 절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5호 관성묘(關聖廟)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5호 관성묘(關聖廟)는 사당으로, 「삼국지」로 우리에게 낯익은 관우 장군을 무신(武神)으로 받들어 제사 지내는 곳으로, 「주왕묘(周王廟)」 또는 「관제묘(關帝廟)」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나라에서 관우를 신봉하는 신당이 널리 전파된 것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진인이 서울의 남묘에 관우를 조각한 신상을 안치한 데서 비롯됩니다. 전주의 관성묘는 고종 32년(1895)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과 남고산성을 책임지던 무관 이신문이 제안해 각 지역 유지의 도움을 받아 건립했습니다.
사당 안에는 관우의 상이 있고, 그 양쪽 벽에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그린 벽화가 있었습니다. 관우의 신성을 믿는 사람들은 매년 초 이곳을 찾아 한 해의 행운을 점치기도 합니다.
산책로를 따라가면 나타나는 관성묘의 주련을 통해 이곳이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또 이곳을 관우의 혼령이 지키고 있음을 한눈에 알게 합니다. 하지만 이곳이 소장하고 있던 석지 채용신의 도둑맞은 ‘삼국지연의도’를 찾지 못해 아쉬움이 큽니다.
전주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 만경대 암각서
‘만경대 암각서(전주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 萬景臺라는 글자와 함께 정몽주가 지었다는 우국시(憂國詩, 아래)가 새겨져 있습니다.
千仞岡頭石逕橫 登臨使我不勝情 천길 산등성이머리 돌길 돌고 돌아 홀로 다다르니 나의 시름 이길수 없네
靑山隱約扶餘國 黃葉繽紛百濟城 푸른산 뚜렷이 알지 못하니 부여국이요 누른 잎이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네
九月高風愁客子 百年豪氣誤書生 9월 소슬바람이 나그네 시름깊고 백년 호탕한 기상을 서생은 그르쳤네
天涯日沒浮雲合 矯首無由望玉京 하늘가 해는 기울고 뜬구름 모이는데 하염없이 고개들어 개경만 바라보네
오목대에 걸려 있는 대풍가 시판(詩板)
태조 이성계가 오목대 잔치에서 읊었던 '유방의 대풍가(大風歌)' 편액은 오목대 안에 걸려 있으며 2004년에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 1924~2008) 선생이 글씨를 썼습니다.
大風起兮雲飛楊 (대풍기혜운비양) 큰 바람 일어나니 구름이 나는도다.
威加海內兮歸故鄕 (위가하내혜귀고향) 위엄을 해내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도다.
安得猛士兮守四方 (안득맹사혜수사방) 어떻게 하면 용맹스런 군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 수 있을까
남원 황산대첩을 대승으로 이끌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이성계는 전주 한옥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오목대에서 연희를 베풀면서 한나라를 창업했던 유방이 불렀던 "대풍가"를 읊어서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넌지시 비추었습니다.
이서구시 쓴 시도 보이는 바, 1820년 그가 전라관찰사로 두 번째 부임해 그해 가을 만경대에 올라 정몽주의 시와 관찰사 권적이 차운(次韻)한 시를 보고 그 옆 암벽에 새겼다고 합니다.
萬家霜樹擁重城 만가상수옹중성 집집마다 서리 맞은 나무 겹겹이 성을 둘렀네.
西風浙瀝秋聲至 서풍절력추성지 서풍이 비를 뿌리니 가을이 이르고
落日滄茫海氣生 낙일창망해기생 수평선에 해가 지니 바다기운 돋아나네.
爲是圃翁昑眺地 위시포옹금조지 여기는 포은이 시를 읊던 곳
天崖獨自望神京 천애독자망신경 하늘가에서 홀로 서울을 바라보네.
전주시 향토문화유산 제2호 남고진사적비(南固鎭史跡碑)
남고진사적비(南固鎭史跡碑)는 동서학동 산228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적비입니다. 2009년 10월 30일 전주시의 향토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됐습니다. 이 비석은 남고산성의 축성경위와 남고진 설치에 관한 기록으로 1846년(헌종 12)에 세웠습니다. 남고산성 성터 안에 자리한 이 비석은 최영일(崔英一)이 찬(撰)하고, 창암 이삼만(李三晩)이 썼습니다.
남고산성 성벽을 가다보면 만나는 만경대 바위에는 고려말 정몽주의 '천길 바위머리 돌고 돌아'로 시작하는 우국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전주 남고산성에는 산성의 능선을 따라 억경대. 만경대, 천경대 등 세봉우리가 있어 여말(麗末)의 충신 정몽주가 지은 우국시(憂國詩)가 새겨져 있는 벼랑이 있습니다.
정몽주는 서기 1380년(우왕6년) 당시 우리나라 남부 지방에서 노략질을 하던 왜적을 토벌하러온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 이성계(李成桂)장군의 종사관으로 있었습니다.
이성계가 운봉전투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개선하는 길에 선조들의 고향인 전주 오목대에 들려 종친들을 모아 크게 연회를 베풀면서 장차 새나라를 세울 야망이 담긴 노래를 부르자 듣고 있던 정몽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홀로 이곳 만경대에 올라 멀리 북쪽 하늘을 쳐다보며 기울어져가는 고려의 국운을 한탄하는 우국시를 읊었다고 합니다. 우국시를 남긴지 꼭 12년 만에 선죽교에서 선혈을 뿌리고 순사했고 고려왕조는 막을 내렸습니다.
남고산성의 7개 송덕비
뿐만 아니라 남고산성에는 모두 7개의 송덕비가 있습니다. 그 중 6개는 서암문지에, 1개는 구 남고진 별장청 입구 도로변에 있습니다. 관찰사 서상경(1870년), 판관 강준수(미상), 별장 최영우(1869년), 이신문(1886년), 송동욱(1856년) 김0서(1858년), 장00(미상)의 비가 바로 그것입니다.
남고산성 송덕비
구분 |
이름 |
비문 |
연대 |
위치 |
관찰사 |
서상경 |
관찰사서공상경선정비 |
1870년 |
서암문지, 서문지 |
판관 |
강준수 |
판관강후준수영세불망비 |
미상 |
서암문지 |
별장 |
최영우 |
별장최후영우청덕선정비 |
1869년 |
도로변 |
|
이신문 |
별장이후신문청덕불망비 |
1886년 |
서암문지 |
|
김0서 |
별장김0서청덕선정비 |
1858년 |
서암문지 |
|
장00 |
별장장후00영세불망비 |
미상 |
서암문지 |
|
송동옥 |
별장송후동옥선정비 |
1856년 |
서암문지, 서문지 |
1891년 새겨진 관성묘 하마비
예전에 세워진 사찰의 일주문이나 천왕문 앞에서 종종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라는’는 의미의 ‘하마비(下馬碑)’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하마비가 부처님이 계시는 신성한 곳이므로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의미로 세워 두었을까? 하는 데는 의문이 있습니다.
전주에는 전주향교와 경기전, 조경묘, 조경단, 관성묘 등 모두 5개의 하마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주 관성묘 입구엔 앞쪽에 대소인원개하마라 쓰여 있고, 옆면엔 광서17년(1891) 신묘5월립이 라고 쓰인 하마비가 있습니다. 전주의 하마비 가운데 가장 연장자는 전주향교의 것으로 뒷면에 ‘정덕기묘구월일입(正悳己卯九月日立)’이라 새겼으니 중종 14년(1519년)에 해당되며, 가장 시기가 늦은 것은 관성묘의 것입니다.
바로 인근엔 '묵로 이용우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911년 경성서화 미술원 1기생으로 입학한 묵로 이용우 묘비의 글은 작촌 조병희, 글씨는 강암 송성용이 썼씁니다.
우당 조중태 (又堂 趙重泰, 1902-1975)는 부안 출신으로 전주에서 활동한 서화가입니다. 그는 정읍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로 이사해 그곳에서 활동했습니다. 초기에는 추당 박호병(秋堂 朴好秉, 1978-1942)에게 배우고, 이후에는 묵로 이용우(墨鷺 李用雨, 1902-1953)가 6.25 전쟁으로 인해 전주에 기거하는 동안 그에게 그림을 지도 받았습니다. 벽천 나상목도 그의 제자중의 한 사람입니다.
전주에서 쉽게 역사문화와 자연환경을 접할 수 있는 전주 산성마을을 통과하는 ‘시나브로 길’은 이처럼 숱한 사연을 보듬고 있는 곳입니다.
문학 작품에 그려진 남고산성 일대(조수삼, 서거정)
오늘날의 전주팔경을 이야기한 인물로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1762~1849)을 꼽을 수 있습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활약한 조수삼은 말년(74세경,1835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2년 동안 호남지방에 머물렀다. 그 당시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들 가운데 현재의 전주팔경과 부합하는 작품들이 그의 문집인 추재집 3권과 4권에 들어 있습니다.
남고모종(南固暮鍾)
城郭鍾聲何處聞 성곽의 종소리 어디에서 들리나
上方斜日下方曛 상방에 석양이 드니, 문턱이 따뜻하네
回頭更欲尋初地 머리 돌려 다시 초지를 찾으려니
惟見空山多白雲 텅 빈 산에는 흰구름만 보이네
남고모종은 남고산 남고사의 저녁 종소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남고산성은 전주 남쪽의 고덕산과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로 이어진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산성입니다. 이 산성의 안쪽에 남고사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종을 치는 이유는 모든 중생이 종소리를 듣는 순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생겨나 악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상방(上方)은 관아의 우두머리가 거처하던 방을 이르던 말이고, 하방(下方)은 벽의 맨 아래쪽 기둥사이를 가로지른 나무를 이릅니다. 초지(初地)는 십지(十地)의 처음 단계로, 번뇌를 끊고 마음속에 환희를 일으키는 경지로서 환희지(歡喜地) 라고도 합니다. 저녁에 해가 지면서 절에서 들리는 종소리를 듣고 초지를 찾으려고 했지만 산에는 무심히 흰 구름만 보이고,찾고 싶은 초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화자가 찾으려는 ‘환희지’는 ‘남고사’를 의미한다.전주 시내에서바라보는 남고사는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결구는 이런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전주 지역의 승경과 관련한 용어로는 ‘패향십영’,‘전주팔경(혹은 완산팔경), 전주십경,완산32경’등이 있다.이중 문헌 속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조선초 서거정이 전주부의 승경을 노래한 패향십영(沛鄕十詠)입니다.
경기전(慶基殿)
手提金尺靖東韓 손수 금척을 쥐고 동한을 평정하셨기에
閟殿眞容爲奉安 깊고 그윽한 신전에 진용을 봉안하였네
好是龍興根本地 훌륭하다 예가 바로 용흥의 근거지이니
千秋蕉荔謹黃丹 노란 파초 붉은 여지를 천추에 올리리다
견훤도(甄萱都)
猾賊當時事險微 교활한 적은 당시에 음험을 일삼았는데
蕭墻奇禍不堪譏 뜻밖의 집안 재앙은 가소롭기 그지없네
可憐四十年間業 가련도 하여라 사십 년 동안 벌인 사업이
城郭依稀鶴語非 성곽마저 희미해 학의 말대로는 아니로세
만경대(萬景臺)
臺高千仞倚靑空 천 길이나 높은 대가 창공에 솟아 있어
俛仰乾坤萬里通 위아래 천지 사이에 만 리가 탁 트였네
莫說甄郞興廢事 견훤의 흥망에 관한 일을 말하지 마소
靑山黙黙鳥飛中 청산은 말이 없고 새만 높이 나는구나
기린봉(麒麟峯)
山河磅礴瑞輪囷 산하의 충만한 기세에 상서가 우뚝해라
仙李盤根弈葉春 선리가 뿌리를 내려 대대로 봄이로다
豐鎬由來形勢異 풍호는 예로부터 형세가 유독 달랐거니
請君來此看麒麟 그대는 이곳에 와서 기린봉을 보게나
봉황암(鳳凰巖)
甄家兩顆不才兒 견훤의 집 두어 자식은 못나기 그지없어
梟獍爲心豚犬姿 효경 같은 심술에 돈견 같은 자질이었네
當日鳳凰去何處 그 당시엔 봉황이 어느 곳으로 갔던고
如今覽德自來儀 지금은 덕을 보고 스스로 내려왔는걸
건지산(乾止山)
虎擲龍疲一霎空 용과 범의 싸움이 한순간에 끝나버리고
江山依舊雨昏濛 강산은 예전대로 비만 자욱이 내리누나
傷心莫問濟羅事 상심되거니 백제 신라의 일은 묻지 마소
多少峯巒露碧䓗 하 많은 산봉우리만 우뚝우뚝 푸르구려
덕진연(德津淵)
以德名津語不空 덕으로 이름 지은 그 말이 헛되지 않았도다
澤民曾有濟時功 백성에게 은택입혀 세상 구제한 공이 있네
誰知泓臥龍行□ 그 누가 알리오 깊은 못에 용이 누워서
十雨時能又五風 때로 능히 십우와 오풍을 행사하는지
공북정(拱北亭)
北望神州稽首欽 북으로 대궐 향해 경건히 머리 조아릴 제
華山高聳碧抽簪 우뚝 솟은 화산은 흡사 벽옥잠 같아라
南州冠蓋多於織 남쪽 고을 관리들은 유독 많기도 한데
戀闕思君只此心 대궐과 임금 사모하는 그 마음뿐이었네
제남정(濟南亭)
濟南佳麗惱人多 제남정 화려한 경치는 퍽 사람 들뜨게 하여
憶昔瞢騰盡醉過 내 옛날 잔뜩 취해서 곤드레가 된 적 있네
爲問今時老□□ 묻노라 지금은 ---(이하 원문 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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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심정(快心亭)
畫棟朱甍對碧岑 단청 화려한 정자가 푸른 산 마주했는데
竹林蒼翠轉深深 푸른 대나무 숲 돌아서 깊숙이 들어가네
何時賢尹一樽酒 어느 때나 어진 부윤과 술자리를 열어서
快盡平生未快心 평소 울적한 마음을 유쾌히 다 풀어볼꼬
서거정은 한상 이봉(李封)이 보내준 시에 차운하여 전주의 풍경으로 열가지(패향십영)를 노래합니다. 성화(成化) 계묘년(1483)에 이봉은 전주부윤으로서 전주부 객관 동북쪽에 매월정을 세우기도 합니다.
이봉과 서거정은 자주 시문을 주고받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로 위의 시는 서거정이 당시 전주
부윤이던 이봉에게 보낸 것입니다.
서거정은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발상지라는 의미에서 전주를 ‘패향(沛鄕)또는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합니다.
이는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이 패군(沛郡)풍읍(豐邑)이었던 데서 전하여 제왕(帝王)의 발상지(發祥地)임을 가리킵니다. 서거정이 꼽은 전주의 열 가지 경치는 경기전(慶基殿), 견훤도(甄萱都), 만경대(萬景臺), 기린봉(麒麟峯), 봉황암(鳳凰巖), 건지산(乾止山), 덕진연(德津淵), 공북정(拱北亭), 제남정(濟南亭), 쾌심정(快心亭)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현재의 전주팔경과 겹치는 것은 ‘기린봉(麒麟峯), 덕진연(德津淵), 건지산(乾止山)’정도입니다. 서거정이 노래한 공북정, 제남정, 쾌심정 등은 후대에 이르러 누정이 사라지면서 팔경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전주 지우산 공장 35곳...그중 하나 자리한 곳에 사대문예술문화원 둥지
애시당초엔 전주시 방문자센터로 널리 활용되기를 희망했지만 현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에 이택구가 7년 여에 걸쳐 직접 디자인하고 손수 꾸민 공간으로, 풀 한 포기에까지 손 안 미친 곳이 없습니다.
지금은 사대문예술문화원 회원들의 공동 작업 공간으로 쓰고 있으며, 머지않아 1층에 갤러리를 열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자리는 전주 지우산 공장이 자리한 곳으로 3동의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바로 위로 올라가면 500평 남짓한 곳에 대나무가 남아있어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주에서는 1960년대만 해도 35곳에 달하는 공장에서 수많은 장인들의 분업으로 한 달에 수천 개의 지우산을 생산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값싼 비닐우산의 보급과 천우산, 중국 수입산이 들어오면서 문을 닫게 됐다고 합니다.
그 누구는 이곳의 대나무가 동학농민군들이 죽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말하기도 하며 어느 누구는 전주 부채를 만들 때 썼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곳을 오고가다가 한 잔의 차가 생각난다면 전혀 부담을 느끼지 마시고 발걸음을 옮겨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신다면, 먼 훗날 화선지에, 캔버스에 쓱싹쓱싹 감사의 마음을 듬뿍 담아 화답해 드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도도한 물결에 이 조그만 종이 조각배를 살포시 접어 산성마을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함께 살듯한 정을 오롯이 담아 슬로시티(slow city) 편지를 보내는 오늘.
애써 서두르지 않고 한 뼘의 여유를 지닌 채 세상의 파고를 무사히 뛰어넘을 수 있도록 님 오시는 길목에 나지막한 화초담 하나 쌓으며 ‘다운 시프트’(Down Shift)로, 앙증맞은 굴뚝 하나 곁에 둔채 삼백예순다섯날, 나를 버리는 연습을 하면서 여러분들을 전시회로 초대합니다.(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