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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해방후 최초의 신문 '건국시보' 발간


1945년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신문이 최초로 발간된 곳은 서울이 아니고 우리 고장 전주였다. 이같은 사실을 우리 전주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8 · 15 해방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자로 전주에서 발간된 그 신문의 제호는 ‘건국시보’로서 당시 해방을 맞은 이 고장 우국지사와 언론인들에 의해 발간 됐던 것이다.

 

 

당시 조국이 해방을 맞자, 서울에서는 여운형, 안재홍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과도기에 있어서의 치안문제를 비롯한 당면한 각종 문제를 타개 해 나가는데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 때 전주에서도 해방 다음 날인 16일 전북임시대책위원회가 발족을 보았다. 전주시 풍남동 최한규(崔漢圭) 선생댁 응접실에서 탄생한 이 모임에는 배은희(裵恩希) 목사, 이주상(李周相 · 후 민선 전주시장), 정우상(鄭遇尙 · 변호사) 오명순(吳明淳 · 언론인)씨 등, 당시 민족구국지사와 혈기방장한 청년들이 모였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도 역시 앞으로 도내의 치안문제를 비롯, 과도기에 있어서의 제반 대책을 논의하고 ‘전북임시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한편 이를 널리 도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신문발간도 결정했다.

일단 제호는 ‘건국시보’(建國時報)로 정하고, 제작 실무에는 이평권(李平權)을 편집책으로 하고 기자로는 오명순(吳明淳) 최정한(崔廷漢) 정중모(鄭重謨)씨 등이 담당했다.

인쇄는 구 도청 옆에 있었던 대양인쇄소(주인 오영문)에 마침 5호 한글 활자 한 벌이 있어서 그것으로 전북일보(일문판)사에서 했다. 판형은 타블로이드판으로 16일 밤에 인쇄하여 17일 새벽에 오늘날의 호외마냥 배달했다. 일선 시군은 전북일보의 보급망을 이용했다. 이것이 전주에서 발행된 해방 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건국 시보’이다.

당시 제작에 참여했던 이평권씨는 일문판 전북일보의 기자(부장급)였고, 오명순씨는 만선(滿鮮)일보 기자, 최정한씨는 매일신보 전주특파원, 정중모씨는 부산일보 전주특파원이었으며, 그 밖에는 모두 전북일보 기자들이었다.

이 건국시보는 처음에는 1면만을 인쇄 했지만 11호부터는 ‘전라민보’로 제호를 바꾸고 타불로이드판 양면 인쇄를 했다. 그후 최정한씨는 전북일보 편집부장에서 부사장까지 올랐고, 오명순씨도 전북일보 주필 · 부사장을 역임했는데 두분 모두 60년대에 세상을 떠났다.

 

▲ '건국시보'는 11호부터 '전라민보'로 제호를 바꿔 양면인쇄에 들어갔다.


그러면 이같이 우리니라에서 최초로 발행한 신문 ‘건국시보’를 처음 배달한 신문소년은 누구였을까. 그는 당시 초등학교 6학년생이던 최한규 선생의 아들 최정호(崔禎鎬) 소년이었다. 그는 성장하여 서울대를 나온 후,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을 거쳐 연세대학 교수(신문학)로 재직하다가 지금은 동아일보 객원 대기자 및 울산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그는 언젠가 ‘한국 신문소년 제1호’를 자랑(?)하는 글을 쓴 일이 있었다. 그 글을 요약해서 소개하면,

〃사사로운 일이지만 나에게는 조그마한 하나의 자랑이 있다. 해방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글로 만든 신문 첫 배달부가 되었다는 자랑이다.(중략) 그날 밤으로 신문의 발간이 추진되어 집의 사랑채 서쪽의 응접실을 임시 편집국 삼아 창간사를 다듬고, 기사를 꾸미고 하더니 다음날 새벽 잉크 냄새도 싱싱한 타블로이드판 ‘건국시보’ 제1호가 나왔던 것이다. 그걸 나는 사형(舍兄)과 친척 아저씨벌 되는 분과 함께 거리에 들고 나가 집집에 뿌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나누워 주곤 하였다. 동녘에서 떠오른 아침 태양이 찬란한 여름 아침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대해 신문사학자이며 중앙대 교수 최준(崔埈 · 작고)박사는 그의 저서 ‘한국신문사’에서,

〃8 · 15 해방 후, 맨 먼저 새로 창간한 신문을 가진 곳은 서울이 아니고 호남의 전주였다. 모든 도시에서 그랬듯이 전주에서도 8월 16일 당면한 치안대책과 앞으로의 방책을 강구하기 위해 최한규의 사랑방에 배은희 목사를 비롯한 유지들이 모여 새나라 건설에 부푼 포부와 경륜을 기울였다.
동시에 이를 전북 도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보도기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국문 활자를 모아 급히 발행한 것이 바로 타블로이드판의 8월 17일자 1면 신문인 ‘건국시보’였다.
이는 서울, 지방도시를 막론하고 해방 후, 최초의 국문판 신문이란 영예를 차지하는 것이다 …〃

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 그는 다시,


〃이 후, 서울에서 나온 신문들은 김영희(金永羲) 하경덕(河敬德) 이묘묵(李卯?) 등의 코리아 타임스(영문판)가 9월 5일, 민원식(閔瑗植) 남정린(南廷麟) 등의 서울 타임스가 9월 6일, 김정도(金正道)의 조선인민보가 9월 8일, 장도빈(張道斌)의 민중일보가 9월 22일의 순으로 되어 있다. 그밖의 신문들은 10월 이후에 창간 또는 복간됐던 것이다〃

 

그리고, 일제 때 강제로 폐간되었던 민족지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1일이고 조선일보는 이에 1주일 앞선 11월 23일에 복간했었다.


전국 첫 월간 어린이 잡지 ‘파랑새’ 발간

 

이밖에 해방 후, 전주에서는 또 신문 외에 월간 어린이 잡지 ‘파랑새’가 나왔다. 1946년 1월호부터 발간된 이 ‘파랑새’에는 당시 시인 신석정(辛夕汀) 김해강(金海剛) 백얄촌(辛槿) 김목랑(金木浪)씨 등이 참여 했고 편집에는 훗날 월간 ‘여원’(女苑)의 편집장이 되는 김영만(金榮滿)씨가 맡았었다.

어린이 잡지에 있어서도 이 ‘파랑새’가 전국에서 최초로 발간된 것이었다. 서울에서 아동문학 작가로 유명한 윤석중(尹石重)씨가 발간한 ‘어린이 신문’이 나온 것은 ‘파랑새’보다는 6개월 후의 일이었다.

이 ‘파랑새’는 6호까지 나오고 자금난으로 결국은 문을 닫고 말았다. 편집장 김영만씨는 그 후, 서울로 올라가 한 때 ‘어린이 세계’를 발간한 바도 있었다.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원장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09.08.27 1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