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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이성계고향이 함북 영흥이 된 까닭





 이성계의 고향이 함북 영흥이 된 까닭은?

이목대(梨木臺, 지방기념물 16호)는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기 전에 살았던 구거지로 발산 중턱에 있다.
 발산은 승암산(중바위)에서 뻗어 나와 이목대, 오목대 등으로 이어지는 산으로, 목조가 이 발산 아래에 있는 자만동(滋滿洞)에서 살았다 한다. 그래서 발산(鉢山)을 이씨왕조가 일어난 산이라 하여 발리산(發李山)이라고도 한다. 목조 이안사에 관한 장군수(將軍樹)와 호운석(虎隕石)에 관한 설화는 18세기말의 ?완산지?에 등장하고 있다.
 장군수는 발산 아래에 있었는데, 목조가 어렸을 때 여러 아이들과 이 나무 밑에서 진법을 익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나무를 장군수라 하였으며, 지금은 나무가 없지만 그 유지는 완연히 남아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호운석은 한벽당 앞 1리쯤에 있는데, 전해오는 말에 목조가 어릴 때 여러 아이들과 발산 남쪽 기슭에서 놀다가 폭풍우를 만나 바위 아래로 피하였는데 큰 호랑이가 앞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목조가 여러 아이들에게, 호랑이가 여러 사람을 동시에 해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단지 한 사람만 살상할 것이니 누가 희생물이 될 것인지 옷을 던져 시험해보자고 했다. 그러자 여러 아이들이 네가 제일 나이가 많으니 먼저 옷을 던지라 하였다. 목조가 옷을 던지자 호랑이가 그 옷을 씹는지라 여러 아이들이 목조를 밀어내었다. 그러자 호랑이가 도망쳐 달아났으며, 이 때 갑자가 언덕이 무너져내려 여러 아이들이 모두 깔려 죽었으나, 목조만은 살아날 수 있었다. 그 돌이 물 가운데 지금도 완연히 남아 있다고 쓰여 있다.
 조선왕조의 건국은 태조 이성계에 의하여 실현되었지만 그 터전은 목조 이안사에 의해 이룩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1445년(세종 27년) 4월에 권제, 안지, 정인지 등이 편찬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목조 이안사로부터 왕조의 터전이 잡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동육룡이 나리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라고 읊은 바, 이 육룡의 첫 인물이 바로 목조 이안사다. 육룡은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 다음에 익조(翼祖 李行里) 도조(度祖 李椿) 환조(桓祖 李子春) 태조(太祖 李成桂) 태종(太宗 李芳遠)으로 이어진다.
 목조 이안사가 강원도 삼척지방과 인연을 맺은 것은 1231년(고려 고종18년)을 전후한 무렵이었다. 이성계가 조성왕조를 개국하기 162년 전후다. 목조는 전주에서 출생했고 삼척에 옮겨 살다가 다시 함경도 덕원부(德源府) 용주리(龍珠里)로 옮겼고, 다시 와뚱(幹東)으로 옮겨살았다. 목조가 삼척으로 이주하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목조가 전주에 살 때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와서 목조가 사랑하는 기생과 관계하자 둘은 싸움이 벌어졌고, 전주의 지주(知州;주의 장관)가 산성별감과 한편이 되어 싸우게 됐다. 지주가 조정에 보고하고 군사를 동원해 목조를 해치려 한다는 정보를 목조는 미리 알고 이안사는 모든 재산을 처분해 변산반도 앞 바다에 수 십 척의 배를 대고 모든 재산과 노비와 사병들을 싣고 남해 바다를 돌아 북으로 동해를 거슬러 올라갔다.
 이렇게 해서 삼척의 활기리로 이주하게 된다. 이때 목조를 따르던 170여 호가 함께 이주했다. 무슨 연유로 목조가 삼척으로 이주하였는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데 삼척은 목조 이안사의 외가(外家) 지역이기 때문이다.
 목조가 처음 터를 잡은 삼척의 미로면 활기리는 원래 활터라 불렀다. 후에 목조가 살던 터라고 해서 임금황자를 써서 황기(皇基)로 바뀌었다. 활터는 궁기(弓基)를 뜻하는 곳이었는데,  활터-황기-활기로 그 지명이 변했다. 그 터는 현재 미로면 활기리의 두메관광농원에서 조금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엔 목조가 살았던 곳임을 알려주는 구거지비각(舊居地碑閣)이 세워져 있다.
 활기리는 삼척군 미로(未老)면에 속했고, 미로면은 현종3년(1662) 당시 삼척부사 허목이 미로리(眉老里)라고 부른 데서 오늘과 같은 지명으로 정착했다. 목조의 삼척 미로면 활기리 생활은 잠깐이었지만 부모를 묻었고 자기의 집터까지 남겼으므로 제2의 고향이 됐다. 삼척의 활기리가 조선왕조 건국의 터전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전주에서 3각 관계였던 전주감영의 관리가 승진이 되어 삼척군수로 부임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이안사는 다시 짐을 싸서 동해바다를 거슬러 올라가 원산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그 후손이 다시 영흥까지 흘러들어가서 이성계의 고향이 함북 영흥이 된 것이다.
 화령(和寧)은 지금의 영흥으로 지금의 함경북도 영흥에 있는 지명이다. 따라서 고구려, 발해 시대를 마감하고, 고려시대로 들어 온 이후로는 우리의 영역 밖에 있었고, 요·금을 거쳐서 원대까지도 우리와의 관계는 거의 없었던 지역이다. 그런데 원 후기에 원나라 제국이 약화되고, 고려의 군사력이 가장 강하여 천리장성을 넘어 동북쪽으로 그 통치영역을 넓히면서 비로소 다시 우리와 관계를 맺게 된 지역이다. 이성계가 이 지역의 명칭을 가져다가 국호로 정하려고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와 이 지역과의 관계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