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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익산 관음사 시주미

 

지금의 익산시 북일동 금강리(金江里) 앞에 관음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곳의 법당(法堂) 중앙에
 한 여인이 아기를 업고 있는 듯한 형상의 돌부처(石佛)가 앉아 있다.
이 돌부처에는 옛날부터 다음과 같은 애틋한 사연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어떤 스님이 익산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시주미(施主米)를 동냥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느 집에 이르렀다. 그 집 주인은 몹시 인색 할 뿐 아니라 살림도 구차하였다.
스님이 동냥을 구하자 인색한 그 집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쌀을 주지 않고 야박하게도
 재를 퍼주면서 스님에게 갖다 주라고 하였다. 이에 며느리는 매우 난처했다.
그리하여 짐짓 시어머니 분부대로 재를 갖다주는 척하다가 낌새를 보아
 살짝 쌀을 훔쳐서 스님에게 갖다 바쳤다.

멀찍이 서서 집안 동정을 살피고 있던 스님은 그 며느리의 더없이 착한 거동을 보고
 매우 감동하였다.
그리하여 가난한 며느리의 어진 아음에 보답하려고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보아하니 매우 박복하게 사시는 모양인데 아주머니의
 그 착한 마음씨에 보답하려고 하니 소승을 따라와 주시오."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며느리가 어정쩡한 태도로 물었다.

 "아무 말 묻지 말고 잠자코 따라와만 주시오. 그러면 복문(福門)이 열려 잘 살게 될 것입니다."
스님이 대답했다.

며느리는 스님의 무게 있는 대답에 더는 의심할 마음이 없어, 어린 아이를 등에 들쳐업고
 스님의 뒤를 따라나섰다. 한참 가다가 스님이 이윽고 말했다.

 "소승의 뒤를 따라오되 단 꼭 지켜야할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옵니까?"
며느리가 물었다.

 "목적지에 완전히 이를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됩니다. 만약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불행하게 됩니다."

며느리는 이에 마음을 단단히 다지고 스님의 뜻을 좇아가리라 하였다.
그들은 이윽고 금강리 앞 관음사 근처에 이르렀다. 이 곳은 당시에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큰 강이었다.
스님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씽씽 앞장서 걸어갔다.
그러나 마음씨 고운 그 여인은 행여 빠져죽지나 않을까 하여 더럭 겁이 났다.
그래 조마조마 애타는 마음으로 강을 건너다가 어느 순간에 그만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결국 그 여인은 스님의 가르침을 어긴 것이다.
이 바람에 그 여인은 갑자기 돌이 되어버렸다. 이 돌은 하나의 부처로서 등에 아이를 업은
 부인의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마음씨 착한 여인을 행복하게 보답해 주려고 했던 스님의 뜻이 계율을 어기는 바람에 도리어
 돌을 만들고 말았다는 애틋한 이야기다.

 (이는 하나의 불교 연기설화(緣起說話)다. 보시(布施)의 수행을 하면 천계의 훌륭항
 사보(査報)를 받는 대신, 인색한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자는 흑업(黑業: 四業의 하나로
 암흑 부정의 고통을 받음)을 겪는다는 것.
그러므로 죄업을 만나야 마땅할 시어머니 밑에서 선행하는 며느리에게 복업(福業)을 주려고
 인도했으나 되돌아보지 말라는 금기(禁忌)를 어겼기 때문에 돌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은 속연(俗緣)을 끊으라는 뜻이 된다.)


*출처 확인 못함


보물 제1842호 익산 관음사 목조보살입상


익산 관음사 목조보살입상은 보살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이후 황폐해진 사찰을 재건해 가는 일련의 과정을 상세히 전하고 있어 兩大戰亂 이후 활발하게 이루어진 불교 재건사업과 관련된 생생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 불상을 조성한 원오는 1599년에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을 개금한 수조각승으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까지의 불교조각계를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이 불상의 보조조각승 청허는 원오의 작품경향을 계승하여 17세기 중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조각승이다. 따라서 이 불상은 원오유파(元悟流派)의 조각의 형성과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불상이다. 양식적으로도 이 불상은 부드럽고 사실적인 조각기법을 바탕으로 한 안정된 조형감을 보여 주는데, 이는 16세기 후반의 조각 경향을 계승한 17세기 초반 작품의 특징이다. 이 상은 17세기 조각의 첫 장을 장식하는 작품이자 이후 전개될 조선후기 조각의 조형이 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