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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배첩(褙貼)과 경기전의










 문화재청은 다음달 3일부터 14일까지 2018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인정) 조사 계획에 따라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조사를 위한 신청자 공모를 갖는다. 대상 종목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02호 배첩장, 제112호 주철장(불상), 신규종목 사경장이 바로 그것이다.
전주는 예로부터 전라감영이 자리한 까닭에 한국 배첩의 산실이다. 배첩(褙貼)은 글씨나 그림에 종이나 비단 등을 붙여 아름다움과 수명을 더하는 전통적인 서화 처리 기법을 가리킨다. '표구(表具)'는 일본식 표현이고 중국에서는 '장황(粧潢)'이다. 이는 글씨나 그림에 종이, 비단 등을 붙여 액자, 병풍, 족자, 장정, 고서화 등으로 처리하는 전통 공예기술을 말하며 지금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장황으로 부른다.
조선 전기에는 도화서(圖畵署) 소속의 궁중서화 처리를 전담하던 배첩장(褙貼匠)이 등장할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그들은 전국에서 상소가 올라오면 그것을 두루마리로 만들어 용상에 올리는 일부터 고서를 복원하거나 그림을 정비하는 일들을 했다. 궁중의 첩지는 물론 완판본 소설의 본고장, 전주이씨들의 본향이므로 이같은 것들을 입증하는 자료가 일부 남아 있다. 조선시대 장황과 배첩의 기록은 세종실록 108권, 성종실록 243권 등에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2017년 국립무형유산원 발행 전주의 무형유산), 또, 국역 ‘경기전의(2008년 전주역사박물관 발행)’를 보면 배접에 쓰인 물품들이 소개된다.
‘영정 후면 배접시 교농에 들어가는 물종과 수량’으로 밀가루 1말, 백반 5냥, 대왕풀가루 2냥 5전, 황밀 5홉, 후추 7냥 5전, 꿀 5홉, 비상 2냥 5점, 부용향 4냥, 소뇌 1냥, 조피나무 열매 2되, 용뇌 4전, 사향 1전 5푼, 흰 모시베 6자, 흰 명주 6자, 삼베 6자, 후유지 2장, 솜 2근, 가는 노끈 30파‘로 나온다. 이외에 배접 널빤지로 쓰일 물종과 수량, 아교 널빤지로 쓰일 물종과 수량, 배접할 때 쓸 물종과 수량 등도 기록, 전주엔 배첩 장인들이 살아있었음을 나타내지만 구체적인 이름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경기전의’의 기록을 통해 15세기(전주 경기전은 1442년 건립)에 이미 전주에 배첩장이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전주는 조선왕조를 탄생시킨 본향이므로 이태조의 영정(국내 유일 국보 영정)이 자리하고 있어 배첩과 장황의 역사 또한 장구하다. 
하지만 ‘경기전의’의 기록을 통해 15세기(전주 경기전은 1442년 건립)에 이미 전주에 배첩장이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전주는 조선왕조를 탄생시킨 본향이므로 이태조의 영정(국내 유일 국보 영정)이 자리하고 있어 배첩과 장황의 역사 또한 장구하다.
1872년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색이 흐려져 비장 장황이 낡아 새롭게 이모하는데 그 기록이 <어진이모도감의궤(1872년,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이 남아있다. 이는 앞면의 휘장은 남색과 흰색 무늬 비단으로 했고, 배접은 흰색 명주로 했다. 상축은 금색 실로 두 마리 용이 오르내리는 문양을 짠 붉은색 낙영 한 쌍을 부착하고 족자끈에는 붉은 실 매듭의 유소를 달았다. 어진과 같은 귀한 족자에는 옥으로 만든 축두를 끼우는 것이 보통이지만 의궤에는 옥대신 화리목(花利木)을 택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현재 어진의 모사(模寫), 도사(圖寫), 수보(修補)에 관한 기록한 의궤와 등록은 일재시대에 기록된 2종을 포함, 모두 17종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어진은 무려 26축이나 되며 이외에 어진은 수업이 만들어졌지만 가장 오래된 것은 전주 경기전의 태조어진 1점 뿐이다. 국보 제317호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 세로 218㎝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있다. 이 초상화는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용상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쪽에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조선 전기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 바닥에 깔린 것은 숙종 때까지 왕의 초상화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히 높게 올라간 것으로 보아 오래된 화법임을 알려준다. 의자의 화려한 용무늬는 공민왕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익선관은 골진 부분에 색을 발하게 하여 입체감을 표현했고,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음영법을 사용, 얼굴을 표현했다.
하지만 배첩은 일제강점기를 지나가면서 표구로 바뀌는 등 맥이 거의 끊기는 현실에 처했다. 기록에는 찾을 수 없지만 표구와 배첩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김남도는 백합사를 경영한 이름난 장인이었다. 그의 제자는 서재영으로 전주에서 다가산방을 운영했다. 변경환(전북문화재 제62호 전주 배첩장)은 서재영에게 배첩 기술을 전수받았다. 한지 주산지 전주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잘 지켜낸 전라감영 전주, 완판본의 고장 전주,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자리한 한국 제1의 배첩의 역사가 흐르는 전주에서 국가무형문화재 제102호 배첩장이 나올 수는 없나. 무엇보다도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전주문화특별시 지정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배첩장에 거는 기대가 더욱 큰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