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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세계유산

세계유산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은 어떤 곳

 

 

 

 

 

 

 

 

 

제39차 세계유산등재위원회가 4일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은 7세기 초반 백제 제30대 무왕대의 왕도로,  가장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백제 후기의 중심지이기도 한 이곳은 궁성과 국가 사찰, 왕릉, 산성 등 고대 수도가 갖추어야 할 요건을 잘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편집자 주>

 

△미륵사지 유물

 

미륵사지 유물과 유적은 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보물  제236호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1753호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 사적 제150호  익산 미륵사지, 전북 문화재자료  제143호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 등 5점이 문화재로 지정됐다.
 익산 미륵사지는 익산 기양리에 있는 백제 때의 절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배치는 동.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한다. 출토된 유물은 기와와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금속, 목재, 석재, 유리 등 다양하다. 기와는 백제 기와로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다양하게 출토되었으며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창건시기인 백제의 것이다.
 사지 내에는 서쪽 금당지 앞에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석탑 1기가 일부 파손된 채 남아 있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탑 중 건립 연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시 석탑은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해 아쉽게도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6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층 수는 알 수 없으며, 현재 복원중이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말 무왕(재위 600∼641)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둔다.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미륵사터의 남쪽에는 2기의 지주가 약 9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서 있는데, 크기와 양식, 조성 수법이 같아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대체적으로 장식이 적으며, 단정한 형태를 보이는 이 두 지주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곳의 당간지주와 거의 같은 모양의 예로는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와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다.
 미륵사지 금동향로는 당대에 만들어진 중국 수각형 향로의 조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고식의 연판 모습과 감은사지 사리감과 유사한 수면(獸面)과 고리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신라 초에 이루어진 여러 요소를 복합적으로 반영, 한국적으로 수용한 작품으로 보인다. 이는 출토 경위가 확실하며 완벽한 보존 상태를 지닌 작품인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첫 예가되는 통일신라의 금동 수각형 향로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은 미륵사 터에 남아있는 것으로, 석등 받침돌의 일부이다. 연꽃무늬의 모습이 이 절터에서 발견된 연화문 수막새와 비슷하고, 지금의 위치가 원래의 자리인 것으로 보아 미륵사의 창건시기와 비슷한 백제 무왕 때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비록 일부만 갖추고 있긴 하나,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석등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석등의 처음 양식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왕궁리유적

 

 

 

 

 

 

 

 

 왕궁리에는 국보 제123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국보  제289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적 제408호 익산 왕궁리 유적 등 3점이 문화재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익산 왕궁리유적은 왕궁리성지 라고도 부르며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발굴조사한 결과, 이 유적은 적어도 세 시기(백제 후기∼통일신라 후기)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석탑 지역 안에 있는 왕궁리 5층석탑과 절터의 배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유물, 바깥쪽을 둘러싸고 있는 직사각형의 성이 발견되어, 백제 후기의 익산 천도설이나 별도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지만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돼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마한의 왕궁이 있던 자리로 알려진 터에 있는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을 보수하기 위해, 1965년 해체하면서 탑을 받치고 있던 기단부와 1층 지붕돌 윗면에서 발견된 유물들이다. 발견된 유물들은 백제에서 고려에 이르는 여러 시기의 것이다. 녹색의 사리병이 들어 있었던 내합은 뚜껑 윗면에 반쯤 핀 연꽃 봉오리와 주변에는 구슬 무늬를 새겨 넣었고, 금강경판이 들어있던 내합은 뚜껑 윗면에 손잡이로 금고리를 달고 국화 문양을 새긴 것으로 모두 도금 상태가 완전하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