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德壽宮, 지금에 이르기 까지
덕수궁(德壽宮)은 본디 조선 시대 성종(成宗, 1457~1494)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李정, 1454~1489)의 집이 있었던 곳이나, 선조(宣祖, 1552~1608)가 임진왜란으로 피난을 갔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대부분의 궁궐이 불에 타 이 곳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정릉동 행궁(貞陵洞行宮) 1)이라 불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은 이 곳 즉조당(卽棲堂)에서 즉위했고, 1611년 이 곳을 행궁에서 궁궐로 높이며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宮號)를 붙여 주었으나 1618년 창덕궁을 완공하면서 그 곳으로 완전히 옮겨 갔다. 한편 광해군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를 이 곳에 유폐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 1595~1649)역시 이 곳 즉조당에서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후 270여 년동안 이 곳은 궁궐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왕실에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周甲) 2)을 맞아 배례를 행한 일이 있는 정도였다.
덕수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고종(高宗, 1192~1259) 때다. 덕수궁은 고종재위 말년에 약 10년 동안 정치적 혼란의 주 무대였다. 고종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그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했다가, 1897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때를 전후해 궁내에 많은 건물을 지었고, 그제서야 덕수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었다. 이 때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으며, 정관헌(靜觀軒)·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 건물도 일부 들어섰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에 궁에 큰 불이 나 전각의 대부분이 타 버렸으나, 곧 복구에 착수하여 이듬 해인 1905년 즉조당(卽棲堂)·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준명전(浚明殿)·흠문각(欽文閣)·함녕전(咸寧殿) 등을 중건하고, 중화문(中和門)·조원문(朝元門) 등을 세웠다. 1906년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을 완성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했는데, 이 문은 그 때부터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고 궁의 정문으로 사용했다.
1907년 고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고, 새로 즉위한 순종(純宗, 1874~1926)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물렀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고, 1910년에는 궁내에 서양식 대규모 석조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을 세웠다.
덕수德壽의 뜻 풀이
‘덕수(德壽)’는 ‘덕이 높고 오래 산다’는 뜻이다. 중국 송(宋)나라 때도 덕수궁이라는 이름의 궁정이 있었으며, 조선 2대 임금 정종(定宗, 1357~1419)이 태상왕이던 태조(太祖, 1335~1408) 이성계를 위해 개성에 지은 궁궐의 이름도 덕수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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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궁(行宮)은 임금이 추위나 더위를 피해서, 혹은 나들이나 요양 등으로 왕궁을 떠나 있을 때 머물던 별도의 궁궐이다. 경치가 좋은 곳에 짓기도했고, 통치력을 과시하고자 지방 요지에 지어 돌아가며 머물기도 했다. 이궁(離宮)이라고도 한다.
2) 환도(還都)삼주갑(三周甲)은 임진왜란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도성으로 돌아온 1593년 이후 60년이 세 번 지난 해, 1773년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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