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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추도마을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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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죽정마을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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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오운마을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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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상학마을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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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설촌마을] |
 [산청남사마을] |
 [비금도내촌마을돌담길] | | 전국의 (흙)돌담길
켜켜이 쌓은 돌담 세월을 품다. 고향이 시골이 아닌 사람이라도 ‘고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먼저 한적한 시골 마을에 구불거리는 돌담길을 돌아 대문이 활짝 열린 옛집을 연상하곤 한다.
돌담 안에 있는 커다란 감나무는 담장 밖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가지마다 주렁주렁 빨간 감을 매달고 있다. 돌담을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 시커먼 돌을 초록색으로 뒤덮는 이끼, 돌담 위로 고개를 쑥 내민 해바라기 등 정겨운 모습이 절로 상상된다.
돌담길이 있는 마을은 고향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시골 마을들이다. 고려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곳으로 마을 역사 못지않게 돌담도 오래 묵었다.
돌담은 대개 마을 주변에 있는 돌로 쌓는데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 서민적이다.
아무렇게나 쌓은 것 같지만 그 자연스러움 안에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세월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고 세월과 함께 늙어 간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낸 돌담은 우리네 향토적인 서정이 고스란히 담긴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지난 시절, 가로등이 켜지면서 개 짖는 소리와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었다. 시간이 흐르면 다듬이 소리, 통금시간을 알리는 딱딱이 소리도 들려왔다. 동네 아이들은 바로 이 흙돌담 골목길에서 한데 어울려서 놀았다. 혼자 놀기보다 여럿이 모여야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게임도 장난감도 없었지만 주변에 널린 것들을 손쉽게 놀이 도구로 변신시켰다.
돌이나 깨진 벽돌을 동그랗게 다듬어 비석치기를 하고, 헌 공책을 뜯어 딱지를 접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산 구슬 몇 개만 있어도 세상을 다 얻은 듯 뿌듯했다.
이 모든 놀이가 돌담길에서 이루어졌다. 따로 놀이터가 없었지만 돌담길이 아이들에겐 놀이터보다 좋은 공간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놀다 보면 어느 새 하루 해가 저물었다. 돌담길 끝에서 저녁 먹으러 오라고 부르던 어머니의 음성이 지금도 귓가에 아련하다.
비스듬이 경사진 골목의 끝, 높다란 양쪽의 돌담길 끝. 서녘으로 비끼는 샛노란 햇살이 남은 물기를 털어내느라 분주한 빨래들을 이고 앉는다. 길 건너편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지붕 낮은 집들의 애환이 골목길 들어서면 금방이라도 얼싸 손 잡아줄 듯 정겨웁다.
담은 집을 보호하는 울타리지만 이웃집과 소통하는 역할도 했다. 길 쪽으로는 담이 높지만 집과 집 사이의 돌담은 마당이 들여다보일 정도의 높이가 대부분이다.
떡을 하거나 부침개를 부친 날이면 돌담 위로 소쿠리가 오갔다. 그 안에 정이 오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햇빛을 받아 따뜻해진 돌담에 고사리나 취나물 혹은 깨끗하게 빤 운동화를 널어 말리기도 했다.
더러는 고풍스러운 전통 가옥이 여러 채 있어 돌담과 잘 어우러진 풍경을 빚어 낸다. S자로 구부러진 마을 안길을 따라 거닐다 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느껴진다.
타임머신을 타고 1970년대로 돌아가 초저녁의 달동네 골목길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문화재청은 고가, 감나무, 담쟁이 넝쿨과 어우러진 옛 ‘돌담길’이 문화재로 등록, ‘고향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추억의 명소로 되살아나게 할 수 있도록 2006년부터 등록문화재로 지정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2007년 11월 30일 현재 고성 학동마을 옛 담장 등 모두 18건의 마을 돌담길을 문화재로 등록함으로써 삶의 패턴이 현대화되면서 어쩌면 우리 대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돌담길’이 이젠 우리 아들, 딸에게도 놀이와 추억의 공간으로 보존되고 있다.
학동마을 옛 담장(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등록문화재 제258호)은 마을에서 채취한 납작돌(판석 두께 2-5㎝)과 황토를 결합하여 바른층으로 쌓아,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의 입향조인 전주최씨가 하늘에서 학(鶴)이 내려와 마을에 앉아 알을 품고 있는 꿈을 꾸어 날이 밝자 그 곳을 찾아 가보니 과연 산수가 수려하고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므로 이곳이 명당이라고 생각하여 ‘학동’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남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을 주변 대숲과 잘 어우러져 수백 년을 거슬러 고성(古城)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마을 안길의 긴 돌담길은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어 문화재로서의 가치 또한 크다.
황산마을 옛 담장(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등록문화재 제259호)은 대개 토석담으로 담 하부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제법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대부분 메쌓기 방식으로 만들었다.
황산마을은 1501년(연산군 7년)에 요수 신권(생몰년 미상)이 이곳에 들어와 산 이후, 거창신씨의 집성촌으로 번창해 왔다.
대부분 담장의 높이는 1.8m 내외, 폭(두께) 30cm정도이며, 대개 담 하부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제법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진흙(황토)을 사춤하지 않고 담 하부의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이는 도로보다 높은 대지 내 우수를 담 밖으로 자연스럽게 배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근년에 쌓은 담은 하부에도 진흙을 사춤하는 찰쌓기 수법으로 쌓았다.
담 위에는 암키와를 2-3장 겹쳐 쌓은 다음 그 위에 숫키와를 덮었으며, 암키와 안쪽에는 삼각형 와편(瓦片)을 착고로 사용했다.
담의 마루 등은 착고 위에 암키와 3장을 엎어 놓고 맨 위에 숫키와를 엎어 마무리했다. 근래에 수리한 담일수록 기와의 겹침 수를 줄이고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다.
단계마을 옛 담장(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 등록문화재 제260호)은 돌담과 토석담이 혼재되어 있으며, 높이는 2m 정도로 높은 편이다.
담 하부에서 위로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큰 돌을 사용하여 진흙을 사춤하지 않고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이는 도로보다 높은 대지 내 우수를 담 밖으로 자연스럽게 배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 위에는 하부에 사용한 돌보다 작은 돌을 사용하여 돌과 진흙을 교대로 쌓아 올렸으며, 담 안팎으로는 돌 표면이 그대로 노출되도록 했다.
토담 상부에는 판석을 담의 길이 방향으로 걸치고 그 위에 기와를 올렸다. 즉 담 상부에 사용하는 기와가 아래로 처져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판석을 담 안팎으로 3치 정도 내밀어 쌓고 그 위에 한식 기와를 덮은 것이다. 기와의 흘러내림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한개마을 옛 담장(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등록문화재 제261호)은 크게 외곽담과 내곽담으로 구분돼 존재한다.
마을의 담장은 대부분 토석담장이 주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극히 부분적으로 돌담장이 있다.
마을의 가옥이 대체적으로 경사가 있는 곳에 지어져 있기 때문에 산지와 접한 외곽담과 주택동 쪽의 측면담은 높은 반면 앞뒤 주택의 영역을 구획하는 담은 낮게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이 마을 담장의 주류인 토석담은 전통한옥들과 잘 어우러져 자연스런 마을의 동선을 유도하면서 아름다운 마을 속에 잘 동화되어 있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다.
지전마을 옛 담장(전북 무주군 설천면 길산리, 등록문화재 제262호)은 담장과 외벽의 기능을 하는 담장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마을은 크게 4개의 군락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마을의 공간구조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개량 기와집 형태의 가옥이 주종을 이루는 전형적인 농가 주택의 면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담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석담은 흙과 자연석을 혼용하여 평쌓기를 한 것으로 이어진 담장은 시각적 연속성을 주고 있으며, 담의 지붕은 한식기와가 아닌 시멘트 기와로 처리됐다.
전체적으로 전통 가옥, 남대천, 노거수와 더불어 마을 전체에 식재되어 있는 감나무는 한 폭의 풍경화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이들과 어우러진 담장 또한 산골 마을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아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함라마을 옛 담장(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등록문화재 제263호)은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막돌 담장이 2군데 정도 있는 가운데 양식은 거의 흙다짐에 돌을 박은 형식으로 같은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1.6m 정도이며 담장의 지붕은 한식기와가 아닌 시멘트 기와를 써서 처리하였다. 일부 전돌을 막돌 대신 쓴 담장도 보인다.
담장의 형태는 기초를 두고 흙과 석재를 혼합하여 쌓은 토석혼용 담장을 비롯하여 돌로만 쌓은 담장, 흙으로만 축조한 순수한 토석 담장 등이 있다.
높이는 1.3m에서 2.2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전반적으로 농가의 담장이라는 점과 주택의 규모에 비하여 높은 편이다.
병영마을 옛 담장(전남 강진군 병영면 지로리, 등록문화재 제264호)은 전체적으로 돌과 흙을 번갈아 쌓은 토석담으로, 하부는 비교적 큰 화강석을, 중단 이후로는 어른 주먹 정도의 비교적 작은 돌을 사용하여 쌓아 올렸다.
담장 축조 방식은 전체적으로 죽담 구조다. 죽담 구조란 돌과 흙을 번갈아 쌓은 것으로 흙이 일종의 접착 몰탈 역할을 한다.
돌은 화강석으로 크기는 하단부 돌은 비교적 크나 중단 이후로는 어른 주먹정도의 비교적 작은 돌을 사용했다.
이 마을의 담장은 다른 마을의 죽담구조와 쌓기 모습에 차이가 있어 주목이 된다. 즉 중단 위쪽으로 얇은 돌을 약 15도 정도 눕혀서 촘촘하게 쌓고, 다음층에는 다시 엇갈려 쌓는 일종의 빗살무늬 형식이다.
이곳에서는 이 형식을 '하멜식 담쌓기'라고 한다. 이는 하멜 일행이 1656년부터 1663년까지 7년간 병영에 소속되어 여러 잡역을 하며 생활하였는데, 그 때 이들 일행으로부터 습득한 기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담장 상부에는 거의 대부분이 지붕처리(기와)가 되어 있다. 높이는 2m정도로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데 그 원인은 병영 내에서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이 집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높게 쌓았다고 한다.
삼지천마을 옛 담장(전남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등록문화재 제265호)은 전반적으로 돌과 흙을 사용한 토석담으로, 비교적 모나지 않은 화강석 계통의 둥근 돌을 사용했다.
창평면 삼천리 삼지천마을은 151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어 전통 고가가 많으며 동편에 월봉산과 남쪽에 국수봉이 있다.
담장의 구조는 전반적으로 돌과 흙을 사용한 죽담 구조다. 비교적 모나지 않는 화강석 계통의 둥근 돌을 주로 사용하였고, 크기는 개략 직경 10~30cm정도이다.
축조 형태는 돌을 한켜 쌓고 흙을 채운 다음 다시 돌을 쌓아 외관상 줄눈이 생긴 담장도 있고 또한 줄눈 없이 막쌓기 형태로 된 곳도 많다.
대체로 담장 하단부에는 큰 돌이 가지런히 놓였고 상부로 갈수록 작은 돌과 중간 정도의 돌이 활용됐다.
삼지천 마을에는 고재선 가옥 등 여러 채의 전통한옥이 있다. 이들 가옥의 담장들은 한옥에 걸맞게 견고하고 높게 축조 되어 있고 또한 대체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여러 채의 전통 한옥과 함께 구성된 전통 담장이 마을 안길 구성에 큰 몫을 하고 있으며 지붕 개량된 목조 가옥도 상당수가 전통 담장(죽담구조)으로 구축되어 있다. 또한 'S'자로 자연스럽게 굽어진 마을 안길은 운치가 있다
옻골마을 옛 담장(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등록문화재 제266호)은 대부분 토석담으로, 마을 안길의 돌담길이 대부분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어 질서정연한 느낌을 준다.
흙과 돌이 섞인 담장으로 높이는 약 2m가 되지 않으며 다른 전통마을의 담장과는 달리 직선으로 되어 있으나, T자형의 구획이 잘 되어 있어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서마을 옛 담장(전남 완도군 청산면 상동리, 등록문화재 제279호)은 새마을운동 당시 부분적으로 이축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축조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바람이 많은 도서지방의 환경에 맞게 강담 구조로 견고하고 높게 축조되어 있다. 강담이란 돌로만 쌓은 형식으로 완도군을 포함한 신안, 진도 등 도서지방에서 불려지는 명칭이다.
특히 굽어진 마을 안길과 함께 서로 비슷한 높이로 축조된 담장은 가옥형태와도 조화가 된다. 도서마을의 공간 구조와 민속을 보존하는데 담장의 역할은 크다고 여겨진다.
상서마을은 전체가 돌담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돌담 옆의 우물, 화장실, 담장을 덮은 넝쿨식물, 작은 녹지 등은 해안 마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상서마을 담장은 도서지역의 환경 및 마을공동체 문화적인 환경을 토대로 축조된 것으로 어촌지역의 주거 문화는 물론 세시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따라서 공간 민속의 하나인 담장은 민속학적인 측면에서 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반교마을 옛 담장(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등록문화재 제280호)은 마을 주위의 밭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연석 막돌(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호박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담의 폭은 대개 하부가 90cm 정도로 넓고, 위로 가면서 조금씩 좁아져 상부의 폭은 60cm 정도이다.
상후하박의 형태로 안정감이 있으며, 담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1.5-2.0미터 내외가 많다.
돌담의 축조 방식은 하부에 제법 폭이 큰 지대석을 두 줄로 놓고 그 위로 가느다랗고 규격이 작은 돌을 사용하여 쌓았으며, 담의 중앙에는 흙과 주먹돌로 속을 채워 넣었다.
마을내 돌담은 주택의 외곽에 쌓았음은 물론 밭의 경계에도 쌓았다.. 주택의 돌담이 지붕 처마가 닿을 정도로 높은데 반해 밭의 돌담은 2-3단 정도로 낮게 쌓여 있다.
이 마을의 돌담은 주택의 외곽 경계에 쌓은 것을 비롯 경사지에 주택을 건축할 경우 대지를 조성하기 위한 옹벽으로 축조되기도 했다.
이런 관계로 경사지의 돌담의 돌담은 하부를 옹벽에 가깝게 견고하게 쌓고, 그 위에 돌담을 축조한 형태이다.
남사마을 옛 담장(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등록문화재 제281호)은 토담과 돌담이 공존하고 있다.
대개 마을내 반가(최씨고가, 이씨고가)나 사양정사, 이사재 주위는 토담이 잘 남아 있으며, 마을안 서민들이 거주하는 민가에는 돌담이 많이 사용되어 전통사회의 신분에 따 담의 구조와 재료, 형식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상류층의 건축물 주위에 쌓은 토담은 대개 메쌓기한 석축 위에 찰쌓기 방식으로 토담을 쌓은 것이다.
즉, 토담 하부에 길이 50-60cm정도의 큰 막돌을 2-3층 메쌓기한 후 그 위에 황토를 편 다음 막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벌려 놓고 돌 사이에 황토를 채워 넣어 쌓았다. 담 상부는 전통한식기와 또는 일식(日式) 평기와를 사용하여 이어 우수로 인해 담이 붕괴되지 않게 했다.
마을의 이끼 낀 돌담을 따라 걷다보면 그 고즈넉함에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는 착각에 빠지다가 X자로 몸을 포개고 있는 회하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르면 자연과 돌담의 절묘한 조화에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묵은 토담과 돌담은 마을주민들이 남사천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강돌을 사용하여 주택 외곽과 밭 주위에 쌓은 것으로 경남 서부지방의 반촌의 전통적인 공간 구조와 담장 형식과 구조를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마을의 문화 관광자산으로서 뚜렷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사리마을 옛 담장(전남 신안군 흑산면 사리, 등록문화재 제282호)은 가옥의 담장과 밭 경계에 있는 담장으로 구분된다.
돌담은 밑이 넓고 위가 좁은 형태로 안정감이 있다. 즉 담을 쌓으면서 안팎의 담벼락을 약간씩 퇴 물려 쌓은 것으로, 마치 작은 성처럼 견고한 느낌을 준다. 돌을 쌓으면서 작은 호박돌과 길고 평평한 돌을 교차시켜 쌓아 올려 구조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사리마을의 돌담은 바람이 많은 도서지방의 환경에 맞게 강담 구조로 견고하고 높게 축조되어 있다.
특히 굽어진 마을 안길과 함께 서로 비슷한 높이로 축조된 담장은 가옥 형태와도 조화가 된다. 도서마을의 공간 구조와 민속을 보존하는데 옛 담장의 역할이 크다.
오운마을 옛 담장(경남 의령군 낙서면 전화리 601 외, 등록문화재 제365호)도 운치를 더한다.
오운마을은 분지형으로 폐쇄된 형태로 반촌(班村)의 전형적인 분위기를 보여분다. 마을의 돌담과 토석담, 탱자울타리는 한옥(주택), 재실과 정자, 노거수와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 예스러운 골목길의 정취를 자아낸다.
반촌의 전형적인 분위기를 간직한 표주박 형태의 마을과 마을 돌담, 토석담, 탱자 울타리가 마을의 한옥, 재실과 정자, 노거수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하면서 예스러운 골목길이다.
상학마을 옛 담장(전북 정읍시 덕천면 상학리 633 외, 등록문화재 제366호)은 돌담 형식으로 높게 쌓은 헛간채 벽 등은 마을 안 구석구석 남아 있는 돌담, 옛 가옥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전통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이 마을의 돌담은 두승산 자락에 대지를 조성하면서 나온 크고 작은 돌을 사용하였으며, 일부 마을 안길에서는 새마을운동 이전의 모습도 볼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다.
사도, 추도 마을 옛 담장(전남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 180 외, 등록문화재 제367호)’은 토석담이 아니라 돌담이 집약적으로 형성돼 있어 그 모습이 우리의 옛 기억에 너무도 친숙하다.
사도마을의 돌담은 돌로만 쌓은 ‘강담’ 구조로써 돌의 크기와 형태는 일정치 않고, 평평한 것부터 둥근 것까지 다양하며 대체적으로 길이가 10㎝에서부터 큰 것은 30~50㎝정도며, 돌담의 형태는 큰 돌, 작은 돌이 서로 맞물린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특히 추도마을은 집약적으로 형성된 돌담을 간직, 주변 풍광과 잘 어우러져 인상적인 도서지역의 마을 풍경을 보여 준다.
바로 이러한 사도마을과 추도마을의 돌담은 도서지방의 생활사와 주택사의 양측면에서 학술적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경관의 측면에서도 보존 가치가 크다.
예로부터 바다로의 뱃길이 있어 중국과 일본 교류의 중심지였던 역사를 자랑하는 죽정마을의 옛 담장(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188-6 외, 제368호)도 문화재로 등록됐다.
죽정마을 담장은 흙 채움이 없이 돌로만 쌓은 강담 구조로, 산기슭과 하천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각 민가의 경계를 형성하는 돌담 원래의 상태가 잘 유지되고 있다.
죽정마을은 삼한시대부터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가옥의 벽체, 하천 제방과 옛 돌담이 잘 조화되어 우리의 전통 마을 경관을 잘 연출하고 있다.
황토흙빛이 아름다운 흙토담집들과
한가함과 적막함이 가득한
시골마을의 긴 돌담 골목길들이
가슴속에 길게 자리 잡는다.
한껏 늘어진 강아지도
나를 보고 누구냐 물을 생각조차 않는다.
문화재가 된 담장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새마을 노래를 아시나요?
그때 그 시절
가난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초가집이 모두 사라지고
그러다보니 이제 돌담길이 있는 정경이
문화재가 되어 등록되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돌담길을 찾아서
돌담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면
그곳은 전통마을임에 틀림없다.
이제는 보기 드물어진
우리네 고향의 옛 모습을 간직한 채
허물어져가는 담장을 끌어안고
여전할 곳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곳에 가고 싶었다.
굵직한 돌들을 듬성듬성 박아 넣거나
아예 돌 그대로 첩첩이 쌓아올린
돌담과 골목길에는
어쩌면…
우리들의 옛 모습이 그 돌 틈에
같이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 |
|
이 뜨겁고 무더운 여름날,
고즈넉한 돌담길 사이를 거닐다보면
골목을 하나 가득 소란스러움으로 채우던
그때 그 시절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땀은 좀 흘러도 오히려 개운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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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 마을
그곳은 조선시대 병마절도사가 주둔했던 군사도시였다.
그래서 지명이 병영이다
오늘날 육군 군사령부 이상의 군사요충지라는 뜻인데,
아쉽게도 일제시대 때 훼손되어 그 흔적은 찾기 어렵다.
그래도 이역만리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한
네덜란드 선원 하멜 (그의 기념관이 있다)이
빗살무늬 식 돌담을 쌓고 전수해주었다는
마을 안길 담장과
황토흙빛이 아름다운 흙토담집들과
한가함과 적막함이 가득한
시골마을의 긴 돌담 골목길들이
가슴속에 길게 자리 잡는다.
한껏 늘어진 강아지도
나를 보고 누구냐 물을 생각조차 않는다. |
|
모평 마을
해보면 해보리
(뭘?)
지도상으로 가까워 보이기에
걷다가 애 좀 먹었다.
길을 잘못 들어
산 고개를 허위허위 넘었고
땅거미 내리는 저수지가로 걸어가다 보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적막한 시골 동네 안
노란색 가로등 아래서
안되겠다 싶어 결국
민박집 차를 부르고 말았다.
함평郡 해보面 해보里라는
마을에서…
한옥마을이 아름답다기에
“그렇군 그렇다면 걸어보리”
했다가 땀 좀 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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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마을을 둘러보니
새로 지어 깨끗하기는 한데
내가 찾던 곳은 아니지 싶다.
그래도 청명한 날 이른 아침의 상쾌함 속에
한옥마을의 예스런 맛은 여전하다. |
창평 마을
가는 길도 아름다웠다.
가끔 그렇듯
농촌버스 기사와
달랑 둘이서 달린 대형 자가용(?)
거마비는 무려 1,400원.
그것도 메타세콰이어가 시원하고
멋진 가로수 길을 달려서…
이만하면 호강이 넘쳐나지 않는가.
멋모르고
면사무소에 들러 삼지천 마을을 물으니
여직원이 “여기지라”한다.
정말
코앞에서부터 주욱
돌담길과 옛집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그곳은 찾고 싶던 모습 그대로가 간직된 곳이었다.
전통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은 슬로시티 마을,
낡고 오래된 이층 옛집이
황토돌담을 길게 거느린 채
웅크리고 있는가 하면
허물어져가는 담장을 바라보며
함께 낡아져가는 솟을대문집이 있고
발자국 소리가 조심스러울 만큼
적막한 골목길이 있었으며
ㄹ자형으로 굽어진 담장이 이리저리 휘더니
70년대식 새마을 목욕탕이 불쑥 나타나면서
저만치에는 미용실과 피아노학원도 보인다.
전통가옥, 돌담길과 한과, 쌀엿…
이 정도만 해도 손꼽게 멋지고
충분히 머물다 가고 싶어지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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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라 마을
이제는 여름해도 제법 짧아졌다.
(그러고 보니 엊그제가 입추였다)
그래도 더위는 한여름 끝자락을 놓지 않아서
옷깃이 땀으로 젖는다.
그곳 한옥과 담장은 만석꾼 세집에서 다 보게 된다.
민속 및 문화재로 지정된 김안균, 조해영 가옥과
원불교 사원이 된 가옥이라더라.
두 곳은 외부인 통제,
다행히 한 곳은 슬며시 둘러볼 수 있었는데
한옥에 일본풍이 가미되어 이채롭고
동 떨어진 듯 일본식 빈집이 잡초 속에 쓸쓸하다.
뉘엿한 여름날 저녁 빛살아래
고색창연한 옛집들과 긴 담장이
더 짙게
사진 속에 담겨지고
기억 속에 새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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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호 마을
작년 이맘때
진도 앞 관매도에 갔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항구마을 자락에서
어촌마을의 예스런 모습에
마냥 빠져들었었다.
섬마을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대로
여기서도 뒷산자락에 흔한 돌로
높직하게 담장을 쌓고
골목길을 만들었다
그냥 돌만 가지고도
성채를 쌓듯
튼튼하게 쌓아올렸다.
숨겨진 사연인들 어찌 없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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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만 된다면
하루쯤 묵으면서
섬마을의 밤을 보내고 싶었었다.
아마도 여기라면
저기 높직한 돌담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별들이
더욱 가까이 다가올 것이기에.
그리고
그 돌 틈에 숨겨진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면 좀 좋으랴.
걷고 나서
담은 땅을 그어 길을 가른다.
담이 가는 곳에 문이 나고 문은 길을 만든다.
담이 가지는 기능은 가르기이다.
산을 자르고 땅을 가르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른다.
담의 곡선적 부드러움은
그 자체가 자연의 조형성에서 온 것이다.
한국 전통 건축에서
지붕과 함께 선(線)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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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한국의 돌․담․길」)
담이 없되
벽만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파트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이지요.
틈이라고는 전혀 없는
높은 벽 앞에서는
소통은 없고
단절만 있습니다.
그래서
도시인들은 더 고독한지도 모릅니다.
시멘트 문화가 그렇습니다.
고개만 좀 길게 뽑으면
이웃집 안마당이 훤히 보이고
호박넝쿨이
매일 한 뼘씩 기어가는 담장 위로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
아주머니들 웃고 떠드는 소리,
할아버지 기침소리가
무시로 넘나들던
돌담이 없는
막힌
문화입니다.
세월의 때가
초록색으로 이끼 낀
돌담길을 따라
걷고 싶어졌습니다.
책으로만 한권인
화려한 꽃담장보다
누런 황토와 돌로 쌓은
수수한 돌담길에서
옛 모습을
다시 만나보고 싶어
남도 길로 나섰습니다. |
| | “○숙이네에―”
어머니는 가끔씩
울 너머로 옆집을 부르셨고
동네 입소문과 함께
떡 접시를 주고받으셨으며
빌려 쓸 것도
건네주고 건네받았지요.
그때의
담장이란
그저
내 것이 네 것도 되고
네 것이 내 것도 되는
사람 사는 情을 확인하는
구분선이었을 따름이었습니다.
담장이 아름다운 곳은
마을도 아름답습니다.
참고 자료
-담장
울, 울타리라고도 하며 공간의 외곽을 막아 외부와의 시각적 차단과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담장은 외곽담장은 높았으나 집과 집사이 담은 구역을 표시하는 정도로 낮게 축조되었다.
-종류 : 축조방법과 재료, 장식에 따라 나뉜다.
․울 : 울타리라고 하며 서민주택에 많이 사용된다. 싸리나무가 가장 많이 쓰였다.
․토담 : 진흙에 짚과 석회를 섞어 쌓는 담으로 틈새에 잔돌을 넣으며 민간주택에 가장 많이
쓰이는 담장
․돌담 : 농어촌 주택에 많다. 중상류층, 궁궐, 사찰, 분묘에는 네모반듯한 사고석담이 이용된다.
․화초담(꽃담): 담벽에 꽃이나 문양을 넣어 만든 것으로 궁궐, 사찰, 양반가 등 권위와 권세가 있는 건물에 사용한다.
(한국의 문화유산, 시공테크사)
등록된 ‘돌담길’
(2006. 6. 19 등록)
마을명 |
소재지 |
돌담길이 |
특징 |
문의처 |
1. 고성 학동마을 |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
약 2,300m |
돌담(납작돌),
토석담 |
고성군 문화관광과
055-670-2223 |
2. 거창 황산마을 |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
약 1,200m |
토석담, 돌담 |
거창군 문화관광과
055-940-3185 |
3. 산청 단계마을 |
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 |
약 2,200m |
돌담, 토석담 |
산청군 문화관광과
055-970-6443 |
4. 성주 한개마을 |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
약 3,300m |
토석담, 돌담 |
성주군 새마을과
054-933-0021 |
5. 무주 지전마을 |
전북 무주군 설천면
길산리 |
약 700m |
토석담, 돌담 |
무주군 문화관광과
063-320-2544 |
6. 익산 함라마을 |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
약 1,500m |
토석담, 돌담 |
익산시 문화관광과
063-850-4175 |
7. 강진 병영마을 |
전남 강진군 병영면
박동리 외 3개리 |
약 10,000m |
토석담(하멜식), 돌담 |
강진군 문화관광과
061-430-3229 |
8. 담양 창평 삼지천마을 |
전남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
약 3,600m |
토석담, 돌담 |
담양군 문화레저관광팀
061-380-3155 |
9. 대구 옻골마을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약 2,500m |
토석담, 돌담 |
대구 중구청 문화공보실
053-955-9197 |
『돌담길 현황』
“제주도 설촌마을 옛 담장”
ㅇ 제주도 특유의 현무암을 한줄로 쌓은 밭담과 돌담이 공존하는 전형적인 제주도 농촌 마을로서 10km에 이르는 돌담을 자랑하며, 방문객들은 제주도 전통의 돼지를 키우는 옛 통시도 덤으로 볼 수 있다.
ㅇ 이 마을은 도로 폭을 확장하면서 돌담을 물려 쌓았으면서도 여전히 굴곡부를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곡면으로 부드럽게 처리했으며, 대개 집을 현대식으로 신축 또는 개축하면서도 대지 경계에 쌓은 돌담을 헐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제주도 특유의 돌담이 잘 보존된 것은 밭 경계에 쌓은 것이다. 밭 경계에 쌓은 돌담은 밭을 개간할 때부터 밭 안에서 나온 돌을 손쉽게 처리하는 목적과 바람이 강한 제주도의 자연조건에 대응하여 방풍담의 기능을 목적으로 쌓은 것으로 특징적이다.
ㅇ 민가의 주위에 쌓은 돌담도 당초에는 지붕의 처마 높이까지 높게 쌓았던 것으로 보이며, 하가리의 돌담은 현무암을 사용하여 쌓은 전형적인 제주도 특유의 것으로, 부분적으로 이축되고 붕괴 및 훼손되긴 했으나 전반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하며, 제주도 주민의 전통적인 생활과 풍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청 남사마을 옛 담장”
ㅇ 남사마을에는 토담 돌담이 공존하고 있다. 대개 마을내 반가(최씨고가, 이씨고가)나 사양정사, 이사재 주위는 토담이 잘 남아 있으며, 마을안 서민들이 거주하는 민가에는 돌담이 많이 사용되어 전통사회의 신분에 따 담의 구조와 재료, 형식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상류층의 건축물 주위에 쌓은 토담은 대개 메쌓기한 석축 위에 찰쌓기 방식으로 토담을 쌓은 것이다. 즉 토담 하부에 길이 50-60cm정도의 큰 막돌을 2-3층 메쌓기한 후 그 위에 황토를 편 다음 막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벌려 놓고 돌 사이에 황토를 채워 넣어 쌓은 것이다. 담 상부는 전통한식기와 또는 일식(日式) 평기와를 사용하여 이어 우수(雨水)로 인해 담이 붕괴되지 않게 했다.
ㅇ 마을의 이끼 낀 돌담을 따라 걷다보면 그 고즈넉함에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는 착각에 빠지다가 X자로 몸을 포개고 있는 회하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르면 자연과 돌담의 절묘한 조화에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ㅇ 묵은 토담과 돌담은 마을주민들이 남사천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강돌을 사용하여 주택 외곽과 밭 주위에 쌓은 것으로 경남 서부지방의 반촌의 전통적인 공간구조와 담장형식과 구조를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마을의 문화 관광자산으로서 뚜렷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청산도 상서마을 옛 담장”
ㅇ 상서마을의 담장은 전체적으로 축조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바람이 많은 도서지방의 환경에 맞게 강담구조로 견고하고 높게 축조되어 있다. 강담이란 돌로만 쌓은 형식으로 완도군을 포함한 신안, 진도 등 도서지방에서 불려지는 명칭이다. 특히 굽어진 마을 안길과 함께 서로 비슷한 높이로 축조된 담장은 가옥형태와도 조화가 된다. 도서마을의 공간 구조와 민속을 보존하는데 담장의 역할은 크다고 여겨진다.
ㅇ 상서마을은 전체가 돌담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돌담 옆의 우물, 화장실, 담장을 덮은 넝쿨식물, 작은 녹지 등은 해안 마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상서마을 담장은 도서지역의 환경 및 마을공동체 문화적인 환경을 토대로 축조된 것으로 어촌지역의 주거문화는 물론 세시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따라서 공간 민속의 하나인 담장은 민속학적인 측면에서 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하겠다.
“부여 반교마을 옛 담장”
ㅇ 반교마을의 돌담은 마을 주위의 밭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연석 막돌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호박돌)을 사용하여 쌓은 것이다. 담의 폭은 대개 하부가 90cm 정도로 넓고, 위로 가면서 조금씩 좁아져 상부의 폭은 60cm 정도이다. 상후하박(上厚下薄)의 형태로 안정감이 있으며, 담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1.5-2.0미터 내외가 많다. 돌담의 축조방식은 하부에 제법 폭이 큰 지대석을 두 줄로 놓고 그 위로 가느다랗고 규격이 작은 돌을 사용하여 쌓았으며, 담의 중앙에는 흙과 주먹돌로 속을 채워 넣었다.
ㅇ 마을내 돌담은 주택의 외곽에 쌓았음은 물론 밭의 경계에도 쌓았는데, 주 택의 돌담이 지붕 처마가 닿을 정도로 높은데 반해, 밭의 돌담은 2-3단 정도로 낮게 축조되어 있다. 이 마을의 돌담은 주택의 외곽 경계에 쌓은 것을 비롯 경사지에 주택을 건축할 경우 대지를 조성하기 위한 옹벽으로 축조되기도 했다. 이런 관계로 경사지의 돌담의 돌담은 하부를 옹벽에 가깝게 견고하게 쌓고, 그 위에 돌담을 축조한 형태이다.
“흑산도 사리마을 옛 담장”
ㅇ 돌담은 밑이 넓고 위가 좁은 형태로 안정감이 있다. 즉 담을 쌓으면서 안팎의 담벼락을 약간씩 퇴 물려 쌓은 것으로, 마치 작은 성처럼 견고한 느낌을 준다. 돌을 쌓으면서 작은 호박돌과 길고 평평한 돌을 교차시켜 쌓아 올려 구조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ㅇ 사리마을의 돌담은 바람이 많은 도서지방의 환경에 맞게 강담구조로 견고하고 높게 축조되어 있다. 특히 굽어진 마을 안길과 함께 서로 비슷한 높이로 축조된 담장은 가옥형태와도 조화가 된다. 도서마을의 공간구조와 민속을 보존하는데 옛 담장의 역할이 크다고 사료된다.
“비금도 내촌마을 옛 담장”
ㅇ 내촌마을은 잘 보존된 마을 돌담과 뒤쪽 바위산, 넓게 형성된 들판이 서로 어우러져 사람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마을 뒤 고개에 돌로 축조한 우실(북풍으로 인한 액운을 막기 위한 섬 지역 특유의 시설), 고개 너머에는 젋은 사람들에게 하트해변으로 유명한 하누넘해수욕장, 외국의 유명한 바다에서나 볼 수 있는 코발트블루 색상의 바다 등 풍부한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다.
ㅇ 이 마을의 담장은 돌의 형태가 둥글지 않고 전반적으로 길쭉하면서 날카롭다. 대체로 담장 높이는 1.5m내외로 일정하며 가옥 부속 채가 담장 역할을 한 곳도 있다. 또한 같은 섬의 서산마을의 돌담과 구조와 형식이 유사하다. 대개 마을 뒤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납작한 돌과 각형의 막돌을 사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돌담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며, 폭은 40-60cm 내외이다. 이 마을 돌담은 막돌을 메쌓기한 것, 막돌과 흙을 교대로 쌓아 올린 것, 시멘트 몰탈을 사용하여 돌담을 쌓은 것 등 여러 형식이 있다. 이 마을은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 때 골목을 넓히면서 돌담을 물려 쌓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주민들이 돌담에 애착을 가지고 보존하려고 노력하여 현재와 같이 보존될 수 있었다. |
(1) 고성 학동(鶴洞) 마을
1. 소 재 지 : 경상남도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2. 마을연혁
ㅇ 학동마을은 하일면 소재지로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고려 현종 9년이다. 학동마을이 속한 하일운면(河一運面)에는 고연(古延), 학동(鶴洞), 도동(道洞) 등의 명칭이 등장한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고연, 학동, 임포, 도동을 병합하면서 학동과 임포의 이름을 따서 학림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ㅇ 한편 구전(口傳)에 의하면, 이 마을의 입향조인 전주최씨(全州 崔氏)가 하늘에서 학(鶴)이 내려와 마을에 앉아 알을 품고 있는 꿈을 꾸어 날이 밝자 그 곳을 찾아 가보니 과연 산수가 수려하고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므로 이 곳이 명당이라고 생각하여 ‘학동’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ㅇ 학동마을은 서기 1670년경에 전주최씨의 선조가 맨 먼저 입촌(入村)하여 지금까지 약 320여 년간 마을을 형성하여 거주하였다.
3. 마을현황
ㅇ 마을의 지세는 마을 뒤 수태산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산이 있으며, 마을 앞은 좌이산이 솟아 있어 이른바 "좌청룡우백호"의 지세에 학이 양 날개로 마을을 품에 안은 듯한 현상을 하고 있다. 마을 옆으로 학림천이 흐르고 있다.
ㅇ 현재 마을 주민은 50가구(108명)이 살고 있으나, 약 50년 전에는 140여명이 거주한 적도 있다. 현재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성씨는 전주 최씨(崔氏), 김해 김씨(金氏), 청송 심씨(沈氏), 진양 강씨(姜氏), 화산 천씨(千氏), 의성 김씨(金氏), 밀양 박씨(朴氏), 전주 이씨(李氏)등 16여 성씨가 살고 있다.
ㅇ 이 마을은 본래 기와집이 많았던 마을인데, 초가지붕은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슬레이트 기와로 개량되었다.
4. 담장특징
ㅇ 수태산 줄기에서 구한 퇴적암 판석(납작돌, 두께 2~5cm)과 퇴적암 풍화토양인 황토를 결합하여 담장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른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형태를 갖고 있다. 건물의 기단, 후원의 돈대 등에도 담장과 같은 방식으로 석축을 쌓아 전체 경관으로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5. 문화재 현황(2건)
ㅇ 고성학림최영덕고가 : 문화재자료 제178호
ㅇ 육영재 : 문화재자료 제208호
6. 인근 주요 관광지
ㅇ 연화산도립공원(옥천사), 상족암군립공원(공룡발자국) 등
(2) 거창 황산마을
1. 소 재 지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2. 마을연혁
ㅇ 황산마을은 1501년(연산군 7년)에 요수(樂水) 신권(愼權, 생몰년 미상)이 이곳에 들어와 산 이후, 거창(居昌) 신씨(愼氏)의 집성촌(集姓村)으로 번창해 왔다. 특히 18세기 중엽에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彝)가 입향(入鄕)한 이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마을을 지키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수령이 600년에 달하고 나무 높이가 15m이상이며 그 가지둘레가 50여m가 넘는 지정 보호수가 있어 인상적이다. 마을에서는 이 고목을 안정좌(安亭座)나무라고 부른다.
3. 마을현황
ㅇ 마을은 대체로 평탄하여, 마을 동측에는 호음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 내 주택들은 남동향으로 건축되어 있다. 마을 북쪽에 문화재로 지정된 거창신씨고가가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주변에는 넓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어 이전에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마을이었다.
ㅇ 현재 마을에는 59세대(136명)가 거주하고 있는 부농촌(富農村)인데, 이전에는 호음천을 사이에 두고 동촌(東村)에는 소작인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ㅇ 거창신씨고가(일명 「猿鶴古家」, 경남민속자료 제17호)는 거창 신씨(居昌愼氏) 집성촌인 황산 마을 북쪽에 위치한다. 이 집은 1927년에 건립한 부농주택으로 서민적인 전통한옥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당시 이 지역의 큰 지주였던 집주인의 경제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ㅇ 이밖에 마을에서 가까운 명승지 수승대에 구연서원 관수루(경남유형문화재 제422호)와 요수정(경남유형문화재 제423호)가 자리잡고 있다. 마을 내 주택들은 대개 19세기말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한말과 일제시대 주택양식(지방 반가)을 보여 준다. 마을의 공간구조는 마을 동측의 진입로와 골목을 중심으로 몇 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전반적으로 전통마을의 공간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마을의 동측에는 호음천(虎音川)이 흐르고 있으며, 이 천을 경계로 서쪽 지역의 큰땀과 동쪽의 동촌(東村)으로 구분하고 있다.
ㅇ 마을의 주택은 일부 주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개량되어 지붕에 시멘트기와나 슬레이트를 덮었으며, 블록조 건물도 눈에 띈다. 토담에 연해 철제대문을 시설한 집도 있다. 대부분의 주택들은 전형적인 한옥의 형태의 남부지방 농가 외관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이밖에 일부 주택들은 최근에 보수되었거나 보수 중이다.
ㅇ 황산마을은 전체적으로 전통마을의 공간구조를 잘 지니고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된 거창신씨고가 및 시한당을 중심으로 특징적인 공간구성과 경관을 잘 유지하고 있다. 현재 황산마을은 거창의 대표적 민속마을로 특히 큰땀의 고가는 민박가옥으로 지정되어 있다.
4. 담장특징
ㅇ 마을에는 전통 토담길이 이어져 있으며, 토담 안쪽의 한옥들은 서로 어우러져 마을 곳곳에서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받는다. 마을 내 토담은 전반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 시 마을 안길을 확장하면서 기존의 담들을 헐고 물려 쌓은 곳이 여러 곳에 있었다. 이때 새로 쌓은 토담은 이전 토담의 형식과 구조에 따라 축조했으나 세부적인 기법 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이전의 토담은 돌을 반듯하게 쌓았으나 새로 쌓은 토담은 돌의 한쪽을 기울인 엇쌓기를 하였으며, 담 위에도 시멘트기와 등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신구(新舊) 토담의 재료와 형식이 크게 다르지 않아 경관상 부조화를 이루지는 않는다.
ㅇ 대부분 담장의 특징 높이 1.8m내외, 폭(두께) 30cm정도이며, 대개 담 하부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제법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진흙(황토)을 사춤하지 않고 담 하부의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이는 도로보다 높은 대지 내 우수(雨水)를 담 밖으로 자연스럽게 배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근년에 쌓은 담은 하부에도 진흙을 사춤하는 찰쌓기 수법으로 쌓았다. 담 위에는 암키와를 2-3장 겹쳐 쌓은 다음 그 위에 숫키와를 덮었으며, 암키와 안쪽에는 삼각형 와편(瓦片)을 착고로 사용했다. 담의 마루 등은 착고 위에 암키와 3장을 엎어 놓고 맨 위에 숫키와를 엎어 마무리했다. 근년에 수리한 담일수록 기와의 겹침 수를 줄이고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다.
5. 문화재 현황(3건)
ㅇ 거창구연서원관수루 : 시도유형문화재 제422호
ㅇ 거창요수정 : 시도유형문화재 제423호
ㅇ 거창대정리신씨고가 : 시도민속자료 제17호
6. 인근 주요 관광지
ㅇ 덕유산국립공원, 거열산성군립공원, 황석산성 등
(3) 산청 단계마을
1. 소 재 지 : 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
2. 마을연혁
ㅇ 예로부터 단계가 있는 신등면을 '등 따습고 배부른 마을'로 꼽았으며, 그 '산청쌀'로 유명한 곳이다. 따라서 세도가와 부농(富農)이 많으며 규모가 큰 가옥들을 건립되었다. 단계마을은 1983년 '한옥형 소도읍가꾸기 사업'을 시행하였으며 전체경관도 한옥에 맞게 정비하였다. 이에 따라 단계초등학교의 교문은 삼문(三門)형식의 대문이며 동사무소 정문도 한옥으로 되어 있다.
3. 마을현황
ㅇ 과거에 물이 밀려와 수해를 자주 입었는데, 그 원인을 마을의 형세가 배(舟) 모양이나 돛대와 삿대가 없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이에 마을에서는 인근의 고목나무에 돛대와 삿대를 걸쳐두니 폐해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 곳은 부농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규모가 큰 한옥들이 많다. 대표되는 가옥으로는 단계 박씨고가(1630년 건립)가 있고, 경남문화재자료 제120호인 권씨고가는 마을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ㅇ 마을에는 281세대(694명)가 살고 있으며, 마을 내 전통가옥들은 조선후기에서 근세에 이르는 시기의 농촌지역의 가옥으로 규모가 매우 크고 권위적이다.
4. 담장특징
ㅇ 단계마을의 토담은 높이 2m, 폭 40cm 정도로 높이가 높은 편이다. 담 하부에서 위로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큰 돌을 사용하여 진흙을 사춤하지 않고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이는 도로보다 높은 대지 내 우수를 담 밖으로 자연스럽게 배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 위에는 하부에 사용한 돌보다 작은 돌을 사용하여 돌과 진흙을 교대로 쌓아 올렸으며, 담 안팎으로는 돌 표면이 그대로 노출되도록 했다. 토담 상부에는 판석을 담의 길이 방향으로 걸치고 그 위에 기와를 올렸다. 즉 담 상부에 사용하는 기와가 아래로 처져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판석을 담 안팎으로 3치 정도 내밀어 쌓고 그 위에 한식기와를 덮은 것이다.
5. 문화재 현황(4건)
ㅇ 단계리석조여래좌상 : 시도유형문화재 제29호
ㅇ 단계선생일기 : 시도유형문화재 제207호
ㅇ 동계선생문집책판 : 시도유형문화재 제233호
ㅇ 단계박씨고가 : 시도민속자료 제4호
6. 인근 주요 관광지
ㅇ 지리산국립공원, 내원사, 덕천서원 등
(4) 군위 부계 한밤마을
1. 소 재 지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2. 마을연혁
ㅇ 이 마을은 처음에 신천강씨가 살았는데, 신라시대(950년경)에 홍란이 이 마을에 이주하여 부계홍씨 일족이 번창하였으며, 고려 때까지 마을 이름을 일야 혹은 대야로 불리었으나, 고려 멸망시기에 홍로에 의하여 대율로 개칭되었으며, 속명으로 한밤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3. 마을 현황
ㅇ 이 마을은 팔공산의 북쪽 자락에 위치해 있어서 사방으로 경치가 아주 수려한 편이지만 마을 전체의 집들이 북향으로 배치되었고, 각 집으로 연결되는 마을 안길이 잘 남아 있다. 다만 각 집의 대문에는 몇 계단으로 이루어진 경사면으로 되어 있어서 마을 안길로는 차량의 진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 가운데 대율리 대청(경북유형문화재 제262호)을 중심으로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이 마을에서 약 2km 떨어진 위치에 국보 제109호인 제2석굴암 불상이 있다. 그 밖에도 상매댁 등 지정문화재 가옥이 있어 마을 가옥 상당수가 전통한옥으로 되어 있으며 과거 초가지붕이었던 집들은 1970년대에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었다.
4. 담장특징
ㅇ 마을담장은 대부분 돌담으로 경오(1930)년 대홍수로 인하여 떠내려 온 돌들을 이용하여 담장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돌담의 축조는 전문적 기술에 의해 축조된 것이 아니라 막돌허튼층쌓기로 하부가 넓고 상부가 다소 좁은 형태이며 아랫부분의 넓은 곳은 1m가 넘는 경우도 있다. 돌담의 곡선이 매우 자연스러우며 부분적으로 새마을 사업 등에 의해 개수된 곳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5. 문화재 현황(3건)
ㅇ 군위대율리석조여래입상 : 시도유형문화재 제104호
ㅇ 군위대율리대청 : 시도유형문화재 제262호
ㅇ 군위상매댁 : 문화재자료 제357호
6. 인근 주요 관광지
ㅇ 팔공산도립공원, 군위삼존불상, 동화사 등
(5) 성주 한개마을
1. 소 재 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2. 마을연혁
ㅇ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대에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入鄕)하여 개척하였으며, 현재는 이정현(李廷賢)의 후손들이 집성하여 생활하고 있는 성산이씨 집성마을이다.
ㅇ 이 마을은 한때 120여 호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66호가 남아있는데, 17세기부터 한 마을에서 대과 9인, 소과 24인 등 과거합격자를 많이 배출하였을 뿐 아니라, 응와 이원조, 한주 이진상 등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또한 교리댁 등 많은 고택들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3. 마을 현황
ㅇ 한개마을은 마을의 북쪽에 위치한 영취산(해발 332m)을 주산으로 하여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청룡등과 서남쪽으로 뻗어 내린 백호 등의 중앙에 형성된 낮은 구릉에 남에서 북으로 차차 올라가는 경사지를 따라 건물이 배치되었고 마을의 서남쪽으로 백천과 이천이 함수하여 동으로 흐르고 그 남쪽에 안산이 배치되고 있어서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이상적인 입지조건을 갖추었다.
ㅇ 한개마을의 기옥은 대부분 전통한옥들이며, 원래 초가지붕이던 것을 슬레이트로 개량한 집이 일부 있다.
4. 담장특징
ㅇ 마을의 담장은 대부분 토석담장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극히 부분적으로 돌담장이 있다. 부분적으로 담장이 개보수된 것들도 있으나 담장의 형태, 규모 및 골목길 동선은 남부 지역의 특색에 맞게 전통가옥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보존되어 있다.
ㅇ 마을의 가옥이 대체적으로 경사가 있는 곳에 지어져 있는 관계로 산지와 접한 외곽담과 주택동 쪽의 측면담은 높은 반면 앞뒤 주택의 영역을 구획하는 담은 낮게 되어 있다. 내곽담은 주거건물의 처마보다 낮아 담 양측의 영역을 시각적으로 차단하거나 연속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으며, 특별히 외부공간으로 확대된 부엌의 기능을 수용하는 역할을 하는 장독대 담도 일부 있다.
5. 문화재 현황(9건)
ㅇ 대산동교리댁 : 시도민속자료 제43호
ㅇ 대산동북비고택 : 시도민속자료 제44호
ㅇ 대산동한주종택 : 시도민속자료 제45호
ㅇ 대산동월곡댁 : 시도민속자료 제46호
ㅇ 성주대산리진사댁 : 시도민속자료 제124호
ㅇ 성주대산리도동댁 : 시도민속자료 제132호
ㅇ 대산리하회댁 : 문화재자료 제326호
ㅇ 극와고택 : 문화재자료 제354호
ㅇ 성주첨경재 : 문화재자료 제461호
6. 인근 주요 관광지
ㅇ 성주세종대왕자태실, 독용산성, 회연서원 등
(6) 무주 지전마을
1. 소 재 지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길산리
2. 마을연혁
ㅇ 이 마을이 속해있는 리(里)는 길산리(吉山里)인데, 이 지명은 1914년 행정개편 때 붙여진 이름이다. 지전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예전부터 지초(芝草)가 많이 나던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을 옆으로 흐르는 남대천가의 320년 된 느티나무를 통해서 이 마을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몇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약 320년 정도 되었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을 보호하는 숲정이 당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제방 아래에 나무가 있음은 남대천이 마을로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방을 쌓은 뒤에 현재의 위치에 나무가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마을현황
ㅇ 이 마을은 뒷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개울물이 계곡을 형성하고 있는 우측에 위치하고 있어 풍광이 수려하다. 이 계곡에서 마을 쪽으로 남대천이 있으며 하천가에 마을 숲이 형성되어 수 백년된 느티나무가 여러 주 식재되어 있어 관광지로서도 우수하다. 또한 마을 내에 감나무를 집집마다 식재하여 담과 어우러진 경관을 보이도 있다.
ㅇ 36세대(78명)가 살고 있으며 성씨 가운데는 장(張)씨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ㅇ 마을의 가옥은 새마을 사업시 신(개)축한 1970년대의 건축물이 대부분으로 전형적인 산골 마을로 가옥의 형태나 구조는 개량 기와집 형태가 많다.
ㅇ 마을의 공간구조는 전면의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뒤에 흐르고 있는 남대천의 경계까지 5개의 군락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마을은 전통적인 공간구조를 지니고 있다.
4. 담장특징
ㅇ 마을 담장 전체의 80%가 돌담으로 되어 있어 산골 마을의 전형적인 담장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담장의 높이가 적당하여 접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친근감을 주는 편이며, 양측으로 연속적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담장내부에 식재가 되어있어 경관 면에서 우수하다.
ㅇ 담장 양식은 흙다짐에 돌을 박은 형식으로 같은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1.6m 정도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담의 지붕은 한식기와가 아닌 시멘트 기와를 써서 처리하였으며 담장이 양쪽으로 형성되어 시각적으로도 좋은 지역이다.
ㅇ 마을 담장은 주로 담장의 기능과 건물의 외벽과 담장의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다. 담장의 기초 부분은 지반에 콘크리트 기초를 하고 담장을 축조한 경우와 지반을 정지하고 담장을 바로 축조한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마을의 담장은 돌로 쌓았다는 통일감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주요 담장은 돌로 축조하였다.
ㅇ 담장의 몸체는 돌과 흙을 혼용하여 평석 쌓기를 하고 있으며 지붕은 기와잇기나 노출상태 등으로 되어 있으며 그릇 조각으로 지붕을 한 경우도 있다. 담장의 높이는 일반적으로 1.2m를 전후하고 있으며 주택에 비하여 규모가 약간 높은 편이다. 담장의 폭은 50cm 전후이다.
5. 문화재 현황(없음)
6. 인근 주요 관광지
ㅇ 덕유산국립공원, 무주리조트, 무주구천동, 백련사 등
(7) 익산 함라마을
1. 소 재 지 :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2. 마을연혁
ㅇ 함라면은 원래는 함열군의 치소(治所)인 읍내였으므로 군내면(郡內面) 또는 현내면(縣內面)이라 하였으며, ‘함라’는 함열의 별호(別號)이고 함열군의 치소가 지금의 함라면 함열리에 있었기에 여기에서 면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함라’라는 명칭은 이곳의 주산(主山)인 함라산에서 취한 것이다. 1914년 일제시대 전국의 행정구역 개편 시에 부근에 함께 있던 몇 개 마을(갈마동․ 행동․천남리․천북리․수동․안정리․교동)을 병합하여 함열리라 부르게 되었다.
3. 마을현황
ㅇ 마을의 경관은 주산(主山)인 함라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마을로 인근에 향교가 위치하고 있고 아사(衙舍) 위 소재지의 위쪽마을을 의미하는 수동마을이 중심 고을로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함라산으로부터 내려오는 물줄기가 마을 측면으로 흘러내려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태의 마을로 생각되나 지금은 하천(河川)을 복개하였다.
ㅇ 마을 뒤로 함라산이 주산으로 되어있고, 그 옆으로 와우산이 있어 마을 전체를 싸고 있고,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데 원래는 이곳이 호남 3제(堤)였던 황등제가 있었다. 따라서 이곳 마을은 농경에 유리한 지형적 조건으로 일찍부터 조성되었다. 와우산이라는 명칭은 소가 누워있다는 형세에서 따온 것으로 부를 가져온다는 형세이며, 일제시대에는 이곳 마을에 식수가 부족하여 부잣집에서는 하인들이 오리 남짓 되는 곳으로부터 물을 길어왔는데 저녁때가 되면 그 모습이 볼만하였다고 전해진다.
ㅇ 마을은 가운데를 흐르는 개천을 중심으로 천남과 천북으로 구분되었으나, 지금은 개천을 복개하여 예전의 모습은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마을주민들은 천남과 천북의 개념으로 마을을 인식하고 있다.
ㅇ 현재 함열리는 262세대 674명이 살고 있는데 담장과 관련된 교동, 수동, 안정, 천남에는 178세대, 534명이 거주하고 있다.
ㅇ 마을의 가옥은 1970년대의 건축물이 대부분이다. 다만 이런 가옥과 아울러 지정문화재로 되어있는 규모가 큰 와가(瓦家)가 4채가 있다. 문화재 자료인 조해영 가옥, 함열향교 대성전, 지방민속자료인 김안균 가옥, 익산시 향토유적인 이배원 가옥이 그것이다. 이들 가옥은 일제강점기 때 이 지방을 풍미하던 부호의 집으로서 한말과 일제시대 양식을 보여주는 민가들이다. 조해영 가옥은 일제시대 일본식이 접합된 형태이며, 김안균 가옥은 담장의 규모가 340m로 토석담장 외에 붉은 벽돌 담장, 행랑채 등이 갖추어진 규모가 큰 가옥이다.
ㅇ 마을의 주택은 대부분 개량되어 한옥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는 않으며 대부분의 주택들은 정형적인 농가 주택이다. 전체적으로 마을은 전통적인 공간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건축은 문화재로 지정된 민가를 중심으로 이 지역 대부호 가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담장도 그에 못지 않은 형태와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양옥에 비하여 한옥의 수가 많다.
4. 담장특징
ㅇ 대체적으로 토석담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막돌담장이 2군데 정도 있다. 담장의 양식은 거의 흙다짐에 돌을 박은 형식으로 같은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1.6m 정도이며 담장의 지붕은 한식기와가 아닌 시멘트 기와를 써서 처리하였다. 일부 전돌을 막돌 대신 쓴 담장도 보인다.
ㅇ 담장의 형태는 기초를 두고 흙과 석재를 혼합하여 쌓은 토석혼용 담장을 비롯하여 돌로만 쌓은 담장, 흙으로만 축조한 순수한 토석 담장 등이 있다. 높이는 1.3m에서 2.2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나 전반적으로 농가의 담장이라는 점과 주택의 규모에 비하여 높은 편이다.
5. 문화재 현황(3건)
ㅇ 함열향교대성전 : 문화재자료 제85호
ㅇ 조해영가옥 : 문화재자료 제121호
ㅇ 김안균가옥 : 시도민속자료 제23호
6. 인근 주요 관광지
ㅇ 익산미륵사지, 왕궁리5층석탑, 함벽정, 익산귀금속단지 등
(8) 강진 병영마을
1. 소 재 지 : 전남 강진군 병영면 박동리 외 3개리
2. 마을연혁
ㅇ 옛 병마절도사의 영(營)이란 명칭에서 유래한 병영면은 오랜 역사 속에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크고 작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는 천연의 요새로 일찍이 전라도의 군수권을 통괄했던 병영성이 이곳에 들어섰으며 이에 빠른 상업의 발달로 유명해졌다. 1599년 당시 도원수 권율의 계청에 의해 병마절도사의 본부를 장흥으로 옮겼다가 다시 강진현의 옛 병영으로 돌아왔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공략으로 병영성은 폐영되었으나 1931년 행정개편으로 고군면(古郡面)을 병마절도사의 영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병영면(兵營面)으로 개칭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마을 현황
ㅇ 강진은 예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지닌 곳이다. 이 가운데 병영면은 주위의 수인산, 성자산, 옥녀봉, 별락산, 화방산 등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옛 병영성터가 이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ㅇ 병영면은 현재 박동리, 성남리, 성동리, 지로리 등 4개의 리(里)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주민은 총 328세대(1,181명)로 규모가 큰 지역이다.
4. 담장특징
ㅇ 담장 축조 방식은 전체적으로 죽담구조인데, 죽담구조란 돌과 흙을 번갈아 쌓은 것으로 흙이 일종의 접착 몰탈 역할을 한다. 돌은 화강석으로 크기는 하단부 돌은 비교적 크나 중단 이후로는 어른 주먹정도의 비교적 작은 돌을 사용하였다.
ㅇ 이 마을의 담장은 다른 마을의 죽담구조와 쌓기 모습에 차이가 있어 주목이 된다. 즉 중단 위쪽으로 얇은 돌을 약 15° 정도 눕혀서 촘촘하게 쌓고, 다음층에는 다시 엇갈려 쌓는 일종의 빗살무늬 형식이다. 이곳에서는 이 형식을 ‘하멜식 담쌓기’라고 하는데, 이는 하멜 일행이 1656년부터 1663년까지 7년간 병영에 소속되어 여러 잡역을 하며 생활하였는데, 그 때 이들 일행으로부터 습득한 기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담장 상부에는 거의 대부분이 지붕처리(기와)가 되어 있다. 높이는 2m정도로 다른 지역에 비하여 높은데 그 원인은 병영 내에서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이 집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높게 쌓았다고 하고 있다.
5. 문화재 현황(4건)
ㅇ 전라병영성지 : 사적 제397호
ㅇ 병영면의비자나무 : 천연기념물 제39호
ㅇ 강진병영면의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385호
ㅇ 병영성홍교 : 시도유형문화재 제129호
6. 인근 주요 관광지
ㅇ 월출산국립공원, 영랑생가, 정다산유적, 백련사 등
(9) 담양 창평 삼지천마을
1. 소 재 지 : 전남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2. 마을연혁
ㅇ 창평은 원래 나주에 속하였으며 1474년에 현을 폐하여 광주에 예속하였다. 1908년 담양군으로 편입되었으며 현재 12개 법정리와 27개 운영리를 두고 있다. 창평면 삼천리 삼지천(三支川) 마을은 151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어 전통 고가가 많으며 동편에 월봉산과 남쪽에 국수봉이 있고 마을 앞으로 삼지천이 흐르고 봉황이 날개를 뻗어 감싸 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삼지(내)천이라 불렀다.
3. 마을현황
ㅇ 삼지천 마을은 들판 가운데 있으며 옛부터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창평 유지들의 요람이었다. 동편에 월봉산과 남쪽에 국수봉이 있으며 마을 앞으로 삼지천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앞 방죽은 마르지 않아 5리 이상 주민들이 식수를 구하러 왔다고 하며 아울러 물이 풍부하여 농사짓기에 아주 유리했다.
ㅇ 현재 177가구(496명)가 거주하고 있다.
4. 담장특징
ㅇ 담장의 구조는 전반적으로 돌과 흙을 사용한 죽담구조다. 비교적 모나지 않은 화강석 계통의 둥근 돌을 주로 사용하였고, 크기는 개략 직경 10~30cm정도이다. 축조 형태는 돌을 한켜 쌓고 흙을 채운 다음 다시 돌을 쌓아 외관상 줄눈이 생긴 담장도 있고 또한 줄눈 없이 막쌓기 형태로 된 곳도 많다. 대체로 담장 하단부에는 큰 돌이 가지런히 놓였고 상부로 갈수록 작은 돌과 중간 정도의 돌이 활용되었다. 삼지천 마을에는 고재선 가옥 등 여러 채의 전통한옥이 있는데 이들 가옥의 담장들은 한옥에 걸맞게 견고하고 높게 축조 되어 있고 또한 대체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여러 채의 전통한옥과 함께 구성된 전통담장이 마을 안길구성에 큰 몫을 하고 있으며 지붕개량된 목조가옥도 상당수가 전통담장(죽담구조)으로 구축되어 있다. 또한 ‘S'자로 자연스럽게 굽어진 마을 안길은 운치가 있다.
5. 문화재 현황(1건)
ㅇ 담양고재선가옥 : 시도민속자료 제5호
6. 인근 주요 관광지
ㅇ 담양호, 소쇄원, 송강정, 금성산성 등
(10) 대구 옻골마을
1. 소 재 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2. 마을연혁
ㅇ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대구의병장으로서 선무2등 공신으로 녹훈된 태동공(台洞公) 최계(崔誡)의 아들인 대암(臺巖) 최동집(崔東集)이 광해군 8년(1616)에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로 약 400여 년간 경주최씨(광정공파)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다.
ㅇ 이 마을의 중심 건물인 경주최씨 광정공파종택의 건물들 중 정침은 숙종 20년(1694)에, 가묘(家廟)인 보본당(報本堂)은 영조 18년(1742)에 건립되었고,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을 향사하기 위한 별묘는 고종 33년(1896)에 중건되었다.
3. 마을현황
ㅇ 현재 경주최씨가 20가구이고, 그 외의 성씨가 10가구로서 거주인구는 총 67명 정도인데, 대구시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마을이 아니면서도 시골냄새를 물씬 풍길 정도로 옛스러움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전통마을의 모습을 보기위하여 가족단위의 내방객이 끊임없이 찾아드는 한옥마을이다.
ㅇ 마을 뒤의 주산은 해발 390m의 옥고개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왼편에 황사골, 오른편으로는 새가산으로 둘러싸여 있여 마을터는 비교적 좁은 편이며, 그 터에 가옥이 상당수 들어서 있다.
ㅇ 옻골은 상징적으로 ‘숲안’과 ‘숲밖’의 두 공간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숲안’이란 동계와 서계의 합류지점 밖에 조성되어 있었던 숲을 경계로 그 안을 지칭한다.
ㅇ 주거지 주변에 충분한 농토가 없으며 마을 입구에서 방촌역 사이에 넓게 펼쳐지는 농토를 중심으로 마을의 서쪽, 현재의 대구공항 터에 이르는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ㅇ 현재 이 마을의 지정문화재로는 둔산동 경주최씨종가 및 보본당 사당(대구시 민속자료 제1호)를 중심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4. 담장특징
ㅇ 흙과 돌이 섞인 담장으로 높이는 약 2m가 되지 않으며 다른 전통마을의 담장과는 달리 직선으로 되어 있으나, T자형의 구획이 잘 되어 있어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5. 문화재 현황(2건)
ㅇ 옻골경주최씨백불암파종가소장전적(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
ㅇ 둔산동경주최씨종가및보본당사당(시도민속자료 제1호)
6. 인근 주요 관광지
ㅇ 팔공산도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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