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나한이란 무슨 뜻이며 한자로는 어떻게 쓰나요?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을 줄인 말입니다. 아라한은 응공(應供)이라고 하는데, 마땅히 공양받을 분, 공양받아 마땅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최고의 진리를 성취했기에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마땅한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설명하는 열 가지 이름(여래십호) 가운데 첫 번째가 응공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해 성취하는 과보를 네 가지로 정리합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인데, 수다원(예류預流)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서 다시는 중생으로 돌아가지 않는 분들이고, 사다함(일래一來)은 한 번 더 사바세계에 와서 윤회의 삶을 모두 끝내는 분들이며, 아나함(불환不還)은 금생을 마친 뒤 괴로움이 없는 천상세계(극락세계)에 태어나서 윤회의 삶을 끝내는 분들이고, 아라한(응공)은 금생에서 이미 모든 번뇌에서 해탈한 분들입니다. 이 네 부류의 수행자를 모두 성자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아라한은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난 분, 더 이상 배우고 닦아야 할 것이 없는 분(무학), 모든 번뇌의 적을 무찌른 분(살적)으로서 불교 수행자들의 목표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님이 되자고 목표를 상향 조정합니다. 그러나 아라한과 부처님이 전혀 별개의 존재가 아님은 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가 아라한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고, 아라한의 깨달음과 부처님의 깨달음은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남에 있어서 차별이 없습니다.
2. 그리고 나한전 나한님께도 부처님과 꼭 같이 절을 하는 건가요?
나한전에 모셔진 아라한은 일반적으로 16나한이며, 많게는 500나한을 모시기도 합니다. 나한을 모신 전각은 나한전 외에도 응진전, 팔상전, 독성각이 있습니다. 나한전, 응진전은 같은 성격의 전각이며, 팔상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일대기를 여덟가지로 크게 분류하여 그림이나 조각으로 모신 전각인데, 여기서도 부처님의 제자인 아라한들을 모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독성각은 빈두루존자라고 하는 16나한 가운데 한 분을 모십니다.
대개 대승불교권인 우리나라에서 나한은 부처님보다는 한 수준 낮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윤수 님이 지은 "부처님과 보살"이라는 책에 보면 고려시대에 나한신앙이 크게 유행했고, 나한을 모신 전각을 금당으로 삼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나한전이 금당이므로 당연히 부처님처럼 아라한들에게 절을 했을 것입니다.
절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완전히 바닥으로 낮춤으로써 상대를 최대한 공경하는 실천수행입니다. 지금 이 순간 지극한 마음으로 나를 온전히 낮춤(지심귀명례)이 절이기에 상대에 대한 분별심으로 낮추는 것은 절 수행이 아닙니다. 부처님이나 나한님이나 차별없이 지심귀명례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사찰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봉행하는 예불문에도
지심귀명례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독수성 내지 천이백 제대아라한 무량자비성중
부처님께서 영취산에 계실 때 '오래도록 세상에 남아 법을 전하고 중생을 보살피라'는 분부를 받은 10대제자와 16아라한, 경전을 결집하여 후세에 불법을 전한 오백아라한, 홀로 연기의 이치를 통찰하여 깨달음을 이룬 벽지불, 부처님 회상의 1250 아라한 모두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이런 내용이 있으니 부처님에게 예불 공양하듯이 아라한께도 예배 공양 공경하면 되겠습니다.
3. 나한님들도 부처님인가요?
아라한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본질적으로 다른 분들도 아닙니다.
아함경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에게 묻습니다. "부처님도 아라한이고, 제자들도 아라한인데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나와 제자들의 깨달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먼저 깨달아서 가르쳤고, 저들은 나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에 나를 여래 정각자라고 할 뿐입니다."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초기불전 곳곳에서 "저 제자는 나와 동등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저 제자는 나와 동등한 신통을 성취했다. 저 제자는 나와 동등한 삼매를 성취했다....."라고 제자를 인정해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게 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의 아라한과 대승불교의 아라한을 구별합니다. 초기불교의 아라한은 대승불교에서는 8지 보살에 해당하고(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도 있습니다), 이들이 대승으로 전향하여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고 완전한 깨달음인 성불을 서원하는 경우인 대승이라한은 부처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4. 나한 신앙의 유래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나한신앙은 통일신라시대에 우리나라에 처음 유입되었으며, 고려 건국 직후 923년에 태조가 중국 양나라에 파견한 사신 윤질이 오백나한상을 가지고 귀국하여 해주 숭산사에 처음으로 봉안하였다. 이후 고려왕실에서는 문종(1053)때 신광사에서 나한재를 베푼 것을 시작으로 무려 28회의 나한재를 시행하였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도 나한을 섬기고 따랐던 일화가 전해지며, 태종 때와 세종 때에도 나한재가 지속적으로 베풀어졌다.(사찰에서 만나는 불교미술. 133쪽. 대한불교진흥원 펴냄)
'나한'이라는 말은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하는데, 김수로왕이 도읍을 정하고 '16나한이 머무르기에 적합하다'고 했답니다.
나한은 불교설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진묵대사가 나한을 때리고, 나한이 진묵대사를 골탕먹였다거나, 함경도 나한사에서 불씨를 꺼뜨려 불씨를 얻으러갔더니 "새벽에 불씨를 얻어러 왔길레 팥죽 한 그릇 먹이고 불씨를 들려보냈다"고 해서 절에돌아오니 아궁이에 불이 활활 타고, 나한전에 계시는 한 나한님의 입에 팥죽이 묻어있더라.... 나한은 부처님의 제자들이기에 부처님처럼 근엄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이웃의 친근한 얼굴이야말로 나한에게 가장 어울립니다. 또 경전에서 나한은 부처님과 동등한 신통력을 갖춘 분들로 설해지며, 부처님으로부터 특별히 부탁을 받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세상에 나투신다는 기록이 나한신앙의 근거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5.5백나한의 얘기
처음으로 접한 불교서적에서 읽은 얘기이다...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또한 불법(佛法)을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그렇지만 흉내라도 열심히 내다보면 그 공덕도 적은 것이 아니어서 복을 지을수가 있다고 한다. 스님들이 참선을 하는 선방 건너편 산에 원숭이들이 있었다. 흉내내기를 좋아하는 원숭이들은 참선하는 스님네들을 흉내냈다. 한 우바이 존자가 가을 벌판을 지나가다가 탐스럽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조밭 가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그가 잘익은 조 이삭을 손으로 만지니 조 세 알이 손바닥에 떨어졌다. 남의 곡식을 버릴 수도 없고 버리나 먹으나 마찬가지라 여겨 조를 먹었다. 우바이는 자기가 먹은 조 세알에 해당하는 보상을 하기 위해 소가 되어 밭 주인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밭 주인은 소가 들어온 뒤부터 농사가 잘되고모든 일이 잘 풀려 큰 부자가 되었다. 소는 조 세 알에 3년 농사를 지어 주었다. 그 3년째 되는 날이었다. 소가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장..이틀 후 이마을에 산적 떼가 쳐들어올 것입니다. 5백 명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장만해 놓고 산적 떼를 기다리십시요. 재난은 내가 면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주인은 소가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고 신기해서 시키는 대로 음식을 장만해 두었다. 소의 말은 어김이 없었다. 정말로 창, 칼을 들고 활을 멘 산적 떼 5백 명이 쳐들어온 것이었다. 산적들은 넓은 마당에 차려져 있는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산적 두목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지껏 여러 마을을 털고 다녔지만 이렇게 미리 자기들이 올 줄 알고 음식을 준비해 놓았다가 먹을 수 있도록 해준 경우는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한창 음식을 맛있게 먹는 중인데 집주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산적이 말했다. "당신은 신통력을 가지고 있는거요" 어떻게 우리가 올 줄을 알았소이까?" 집주인이 말했다. "나에게 그런 신통력이 어찌 있었겠소. 소가 알려 주어서 알았을 뿐입니다." "소가 말을 했다구?" 이때였다. 외양간에 있던 소가 걸어 나오더니 산적떼가 지켜보는 앞에서 껍질을 멋고 원래의 우바이 존자가 되어 일장설법을 했다. "나는 산중에서 수도를 하는 사람인데 이 집 밭 옆을 지나가다가 탐스럽게 익은 조를 만지게 되었다. 이때 조 세 알이 손바닥에 떨어졌기로 그것을 버릴 수가 없어서 먹었다. 남의 곡식을 세 알 먹은 대가로 소가 되어 3년 동안 이 집 농사를 지어 준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창과 칼로 남의 재물을 수없이 강탈했으니 소가 되어도 몇백 번이나 되겠는가?" 설법을 들은 도둑들은 발심하여 출가를 했고, 수행을 잘하여 나한과(羅漢果)를 증득, 후일에 5백 나한이 되었다고 한다. 우바이 존자는 5백의 도적 무리를 교화시킨 후에 그 소가죽을 동쪽 바다에 던졌더니 그 소가죽이 우무가사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 5백 나한들의 전신은 원숭이였다. 스님들이 수도하는것을 흉내낸 공덕으로 인간이 되었지만 워낙 미물이라 화적떼가 되었다가 다시 크게 대오각성하여 나한이 됐다고 한다...
나한도 [羅漢圖]
덕 높은 고승(高僧)을 그린 그림.
나한은 아라한(阿羅漢:Arahan)의 준말이다. 부처의 바로 아래 단계로 깨달은 고승들에게 붙이는 이름이어서 많은 나한들이 있지만 16나한, 5백나한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나한들에 대한 신앙은 불교의 성행과 승려들에 대한 외경심과 함께 성행하였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나한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여 승려들에게 음식공양을 올리는 반승의식(飯僧儀式)이 국가적인 행사로서 대대적으로 행해졌다.
부처의 제자들에게 재(齋)를 올리는 나한재도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의식의 성행은 나한도를 조성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의 많은 나한도 가운데 《5백나한도》 연작(連作) 몇 점이 국내외에 남아 있을 뿐이며 조선 전기의 이상좌(李上佐)가 그린 《나한도》 5점이 있다.
나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성자를 가리킨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불성이 있기 때문에 ‘부처’ ‘보살’ ‘나한’ 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각자(覺者)라는 점에서는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누구든지 일심으로 공부해서 나한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나한 역시 여러 불보살처럼 신통력을 갖춘 존재로 받들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보살과 다른 점은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나한들은 대개 실존인물이라는 것이다.
나한 신앙이 꽃을 피운 중국에서는 도교와 결합돼 신선처름 묘사되거나 선종의 조사가 나한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한국 역시 나한은 복을 비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관음 미타 지장 등 다른 신앙에 흡수돼 이들과 구분이 쉽지않다.
아라한(阿羅漢)은 범어 아르한(arhan)의 음역으로 보통 줄여 ‘나한’(羅漢)이라고 한다. 아라한을 응공(應供)이라고 하는데, 이는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외 살적(殺賊).불생(不生).응진(應眞).진인(眞人).성자(聖子) 등으로 의역한다.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 ‘번뇌를 끊고 불생(不生)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 ‘진리에 상응하는 이’로 모두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불교가 일어난 시기에, 인도에서는 각 종교마다 존경하는 수행자의 호칭이 있었다. 가령 자이나교에서는 아라핫드라고 불렀다. 따라서 처음에 아라한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부처님을 부르는 열가지 명칭(十號) 중의 하나가 응공(즉 아라한)인 것을 볼 때도 아라한은 부처님에 대한 별칭이었다. 그 뒤 부처님과 아라한이 구별돼, 부처님의 제자가 도달하는 최고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하게 됐다.
나한은 불교가 발달하면서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처음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 뿐이었다. 그 뒤 부처님이 성도한 뒤 최초의 제자가 된 교진여 등 다섯 비구가 아라한과의 경지를 얻었다. 이어 야사와 그의 친구 54인, 가섭과 그의 제자 등 당시는 깨달은 사람은 모두 나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나타나면서 나한은 소승의 성자로 격하됐다. 이타를 강조하는 보살에 비해 자신의 해탈을 추구한다는 이유에서 나한의 의미가 낮게 평가된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에서는 수행과 교학 연마에 몰두, 설일체유부를 중심으로 ‘구사론’(俱舍論)을 정립한다. 유부의 승려들은 수행자를 네 단계로 설정하여 궁극 목표를 아라한과의 성취에 두었다. 적어도 인도에서 나한은 깨달은자라는 처음 의미를 그대로 지녔던 것이다.
나한은 중국으로 건너가면서 신앙의 대상으로 전환한다. 나한은 그 수가 16, 500, 1200 등 다양하지만 보통 16나한과 500나한을 말한다.
16나한 신앙은 당나라 현장스님이 서기 645년에 번역한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에 기초한다. 〈법주기〉는 부처님 열반후 800년 경에 난제밀다라(難提蜜多羅) 아라한이 쓴 것이라고 한다.
〈법주기〉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16인의 나한에게 불멸(佛滅) 이후에도 영원히 이 세상에 머물며 각지에서 불법을 수호하며 중생을 제도하라는 부촉을 내린다. 이들은 모두 삼명(三明), 육통(六通), 팔해탈(八解脫)의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어서 삼계의 오탁에 물들지 않는다.
학문은 경율론 삼장은 물론 외도의 경전에도 능통했다. 신통력도 지니고 있다. 중생들을 위해서는 참된 복전이 되었다.
사람들이 바른 마음을 일으켜 스님들을 위하여 큰 법회나 5년마다 무차대회를 열거나, 스님들을 초대하여 법회를 열면 십육나한과 권속들은 때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공양을 받으며 시주자에게 커다란 과보를 얻도록 하였다. 대승의 보살이 하는 역할과 똑 같다.
보살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 16명은 집단적으로 숭배 받는다는 것이다. 16나한은 4명의 나한이 확대된 것이다. 〈미륵하생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대가섭, 군저발탄, 빈두루, 나운 4비구가 4명의 아라한이다. 부처님이 이 4명의 비구에게 정법을 부탁하여 열반에 들지말고 영구히 세상에 남아 정법을 수호하여 미륵보살님의 출현을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미륵하생경〉이 서기 3세기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보아 대승불교가 융성하면서 4대 아라한에서 16아라한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소승불교에서 나오고 부파불교의 수행자가 된 나한은 이처럼 보살과 다름없는 역할로 인해 중국 한국 일본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나한신앙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16나한과 더불어 나한신앙의 한축을 맡고 있는 500나한 역시 중국의 산물이다. 오백나한에 대하여는 여러 경전에 기록이 있는데 〈증일아함경〉이나 〈십송률〉(十誦律)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중인도 코살라국의 사위성에서 500명의 나한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고 한다.
〈흥기행경(興起行經)〉에는 매월 15일 500나한을 위한 계(戒)를 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법화경〉의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에서는 부처님이 500명의 나한을 위하여 특별히 수기(授記)를 베푸는 모습이 나온다.
〈오분율〉에는 부처님이 열반한 직후 중인도 마가다국 왕사성의 칠엽굴에서 500명의 나한이 결집하여 불전을 편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제1결집을 오백결집이라 부른다. 부처님 열반 후 600년이 지난 뒤 열린 제4결집에 참가한 500명의 비구도 오백나한으로 받든다. 이외 중국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500나한에 포함시킨다.
중국의 나한신앙은 나한도 그림을 통해서 더 널리 퍼졌다. 특히 기우제에 많이 이용되었으며, 당말에는 나한을 공양하는 나한공(羅漢供)이 성행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나한 신앙이 성행하게 된 것은 선종의 흥기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성은(덕성여대)교수는 이에대해 나한의 평범한 외모, 신통력, 선종의 조사와 비슷한 캐릭터에다 지방 호족들이 단순하게 접근 할 수 있다는 점을 꼽고 있다. 선종(禪宗)에서는 실제로 불법의 전지자(傳持者)로 받들고 있다.
16나한은 다른 나한상보다 미술의 소재로 가장 많이 채택되었다. 16나한의 모습이 때로는 인간적이고 해학적이어서 표현소재로 다른 어떤 불보살상보다 적합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오대산 신앙과 관련하여 오대산 오만진신(五萬眞身) 중에 북대 상왕산에 석가여래와 오백나한의 진신이 상주한다는 것이다. 나한신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고려부터다.
고려에서는 923년 태조가 양나라에 보낸 사신 윤질이 5백나한상을 가지고 귀국, 해주 숭산사(崇山寺)에 봉안한 이후부터 고려왕실에서는 1053년 문종이 신광사에서 나한재(羅漢齋)를 베푼 것을 시작으로 무려 28회의 나한재를 베풀었다.
나한재를 베푼 주 이유는 기우제였다.이외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거나 국왕의 장수와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목적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구복 중심이었다. 나한재는 진관사의 수륙재와 길상사의 나한재가 병행돼 개설된 것처럼 진혼의식으로 치러졌다. 조선초 왕실에 의해 각 사찰마다 나한상을 조성하거나 나한전을 건립하는 일도 잦았다. 조선후기 역시 구복을 중심으로 발원자의 장수와 극락왕생 그리고 정각을 얻도록 하는 등 복합적인 성격으로 전개됐다.
정병삼 교수는 “신라말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한국의 나한 신앙은 선종의 흥성과 더불어 성행해,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재난구제로, 조선시대에는 기복과 함께 극락왕생과 깨달음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신앙의 한축을 담당했다”고 말했다. 정교수는 “현재 나한신앙이 거의 사라진 것은 한국의 나한 신앙이 관음 지장 등 다른 신앙과 흡사해 그 속에 융화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대표적인 나한도량은 경북 청도군 운문사, 서울 관악산 연주암, 서울 수유동 삼성암(三聖庵)을 들 수 있다. 특히 영천 은해사(銀海寺) 거조암(居組庵)의 석조 오백나한상이 유명하다.
지금도 중국 식당에는 16나한 중에서 첫머리에 들어가는 빈두루존자 상을 안치하고 있다. 그에게는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그는 한 재상의 아들로 태어난 미남자였다.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며 박식한 학문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또한 인자하고 사랑을 많이 베풀어 이웃의 아픔과 고통도 구원해 주었다. 그는 십선을 수행하고 삼보를 믿으며 출가하여 마침내 아라한과를 얻었다.
〈십송률〉에는 한 거사가 그에게 밥을 가득 내밀었더니 얼른 다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를 식탐가로 묘사하는 이유는 음식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경책으로 보인다. 이처럼 중국 한국 등에서 음식과 관련된 나한은 대개 빈두루 존자다. 그의 풍모는 백발에 눈썹이 길다.
한국에서는 독성각이나 산성 칠성과 함께 삼성각에 모시는 나반존자가 빈두루존자라는 설이 많다.
육당 최남선은 단군이라는 주장을 펼쳤지만 생김새나 능력 말법시대에 출현한다는 이야기등이 빈두루존자와 같다. 조선후기부터 풍미한 독성신앙이 나한신앙의 한국적 특성인 것이다.
나한을 모신 법당을 나한전 혹은 응진전 또는 영산전이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존으로 좌우에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봉안한다. 그 좌우로 16나한이 자유자재한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끝부분에 범천과 제석천을 함께 봉안하는 것이 나한전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16나한은 후불 탱화로 그려 봉안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경우에는 불단에 나한상이 없다.
후불 탱화에는 16나한도 이외에 영산회상도 많이 그려져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5백나한도 모신다. 이는 500비구가 모여 결집한 것을 나타낸다.
나한전은 대웅전과 달리 좁은 폭의 불단을 ㄷ자형으로 배치하여 부처님과 나한을 차례로 봉안한다. 깨달음의 정도가 낮아 불단을 장식하거나 절집을 장엄하지 않는다. 위치도 주불전에서 떨어져 있다. 보물 70호인 울진군 불영사(佛影寺) 응진전이 유명하다. 전북 완주 송광사(松廣寺)에는 대웅전에 오백나한전이 있다.
출처 : 불교신문 200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