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식

부풍향차보와 꿀껍질 귤피차와 부안 원효방

부풍향차보와 꿀껍질 귤피차와 부안 원효방

18세기 실학자 황윤석(黃胤錫·1729~ 1791)은 자신의 일기 《이재난고(��齋亂藁)》에서 당시 부안현감으로 있던 이운해(李運海·1710~?)가 1755년경에 지은 《부풍향차보(扶風鄕茶譜)》란 책을 소개했다. 이운해는 그때까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이웃 고창 선운사의 야생차를 따와서, 증세에 따라 향약(香藥)을 가미해 모두 7종의 약용 향차(香茶)를 개발했다. 부풍은 전북 부안의 옛 이름이다.

부풍향차보》는 지역성이 짙은 부풍․무장의 향차를 기록하였다. 이운해(李運海, 1710~?)가 부안 현감으로 부임한 翌年 1755년에 남긴 차에 대한 기록이다. 조선시대 차의 기록으로는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 당시 무장의 선운사 일대 찻잎을 채취하여 차를 만들고 지명을 부쳐《부풍보》라 제하고 묶은 책이다. 제다법과 마시는 방법, 차의 명칭과 도구까지 상세히 계량하여 기술하였다. 길지 않은 전문에 차의 생산 환경에서부터 가공․제다․장다․음다의 방법과 찻자리에서 쓰이는 다도구를 실측하여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실증적 토대를 중심으로 한 유례없는 독자성이 돋보인다 하겠다. 그러나 그 원본이 현존하지 않고 황윤석이 필사하여《이재난고》에 일기 형식으로 남아 있다.

차 여섯 량에 차명에서 말한 재료 각 한 돈이라고 했으니, 일상에서 발병하기 쉬운 한 가지 증상에 차와 두 가지 약재를 각각(各) 넣어 상음할 수 있는 향차로 만들었다. 부풍향차는 향을 가미한 향약차다. 향약재를 휘저어 섞어 흡수되도록 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완성된 차는 7종의 향차다. 국향차菊香茶, 계향차桂皮茶, 매향차烏梅茶, 연향차黃連茶, 유향차香薷茶, 귤향차橘皮茶, 사향차山査肉茶라 하였다. 그림으로 첨부한 찻그릇의 조명은 통시적 상황 전달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물식힘사발을 사용하지 않았고, 차는 상투하여 뜨겁게, 一湯上投法으로 마셨음을 알 수 있다. 炉․罐․缶․鍾․盞․盤(화덕, 탕관, 다관, 찻종, 찻잔, 다반) 6종의 찻그릇 그림을 통하여 영․정조 시대의 지역 차문화의 실상을 면밀히 밝혀냈다. 본 연구는 우리 차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개별적․지역적 차문화의 특수성을 밝혀내는데 그 의의와 가치가 있다.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가 이곳 원효방을 둘러보고 그의 <남행월일기>에 기록을 남겼다.

“부령 현령(扶寧縣令) 이군(李君) 및 다른 손님 6~7인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듣건대,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다. 원효(元曉)가 와서 살자 사포(蛇包)가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중, 이 물이 바위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해어진 누비옷에 도모(道貌)가 고고(高古)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內室)과 외실(外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의 진용(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만이 있을 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齋)에 참여할 뿐이라 한다.-하략”

내용으로 볼 때 원효방은 세 곳의 굴실 중 바위 중간쯤에 있어 사다리나 밧줄에 의지해야만 오를 수 있는 남향의 굴실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나왔다고 했는데 정작 이 굴실에는 샘이 없고, 샘은 복신이 거처했다는, 그래서 복신굴이라고 부르는 서향의 굴실에 있다. 그렇다면 복신굴을 포함한 울금바위 전체를 원효의 수도처로 보아야 옳을 것 같다.

어쨌든, 이 샘물은 바위틈에서 스며 나와 바닥의 확독만하게 파인 곳에 고이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부안사람들은 이 샘을 ‘원효샘’이라고 부르는데, 이규보의 기록처럼 맛이 젖과 같이 달므로 유천(乳泉, 젖샘)이라고도, 또 어떤 이는 차 달이기에 좋은 물이라 하여 다천(茶泉)이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