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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식치(食治)의 지혜, 욕망의 절제와 건강



김호, 경인교육대학교 한국사 교수

  다스림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어떤 일이 벌어지기 전[事前]에 다스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사후에 다스리는 것이다. 중국의 고대 경전인 『예기(禮記)』에는 ‘예(禮)란 일이 발생하기 전에 다스림이요, 법(法)은 일이 발생한 후 다스리는 것’이라 했다. 최고의 다스림은 우려할 만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 곧 예방이었다. 그러므로 건강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약물로 치료하기 이전에 음식으로 조리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의식동원(醫食同源)’이라 하여 의약이나 음식이 공히 사람의 몸을 보하는 동일한 원천으로 생각하지만, 적어도 조선 사람들은 의약보다 음식[食]을 더 중시했고, 건강의 근본으로 여겼다. 음식은 단지 ‘먹을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음식은 식색(食色)이라는 인간의 근본적 욕망을 상징했다.

​조선후기 삶의 지침서였던 『산림경제』를 보면, 사람들이 병들어 죽는 이유가 식욕을 절제하지 못한 탓이라고 보았다. 인간에게 음식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해로울 때가 많다는 지적인데, 특히 과식이 문제였다. 16세기 조선의 대학자 노수신은 건강하려면 절대 과식을 금해야 한다고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먹어서도 안 되었다. 무엇보다 기름진 음식은 백병의 근원이었다.

​미식가로도 유명했던 허균이 100세 넘게 산 노인을 만나 양생의 비결을 물은 적이 있었다. 돌아온 답변은 단지 기름진 음식을 멀리하고 배불리 먹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과유불급이 중요했다. 무엇이든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아야 했다. 몸에 좋다고 지나치게 탐하다가는 도리어 몸을 해치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병들기 전에 음식으로 양생하고, 음식으로 조리하되 절제할 수 있어야 군자라 할 만했다.

​1460년(세조4) 세조의 명을 받든 어의 전순의는 『식료찬요(食療纂要)』라는 조선 최초의 식치 의서를 편찬했다. 이 책에서 전순의는 죽은 나무와 풀뿌리[藥材]로 인간의 기질을 바꾸고 병을 치료하기보다 생기 넘치는 재료, 즉 음식으로 몸의 기운을 북돋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음식이 으뜸이고 약물이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계절에 맞추어 풍한서습(風寒暑濕)을 막고, 음식과 남녀관계[食色]를 절제할 수 있다면 무슨 이유로 병이 들겠는가?”라고 말했다.

전순의가 말하는 건강의 비결은 약물보다는 음식이요, 음식보다는 근본적으로 식색의 조절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처방전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중화탕’이다. 퇴계 이황이 선비들의 최고 보약으로 추천할 정도였다. 조선 전기의 유명한 관료였던 홍귀달이 1472년 여름, 공무차 호남을 방문했다가 그만 병이 든 적이 있었다. 고을이 외지고 작은 곳이라 의원을 구할 길이 막막했다. 그저 앓아누운 채 신음만 할 뿐이었다. 마침 홍귀달의 친구가 고산현 사또로 재직하던 중이라 소식을 듣고 찾아와 처방전을 주고 갔다. 30여 가지의 재료가 들어가는데 약재를 살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약재 이름은 청심, 과욕, 인내, 유순, 지족 등 실제 본초가 아닌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마음 다스리는 방법 서른 가지였다. 사심을 버리고 욕망을 이겨내어 선(善)으로 돌아가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야말로 병을 치료하는 근본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조선의 식치는 욕망의 절제라는 수양론과 다름없다. 영조 임금은 「자성편(自省篇)」을 지어 어린 손자에게 남겨 주었다.

​“식색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되 성인은 절도에 맞고 뭇사람은 절도에 맞지 않나니, 슬프구나. 보통사람이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은 그 해로움이 한 몸에 그치지만 제왕이 절도에 맞지 않는다면 그 해를 가히 어떻게 말하겠는가? 역사를 보면 형편없는 임금일수록 그의 허물이 모두 식색에서 말미암았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느냐?”

​사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먹을 것이 풍부한데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진정한 식치는 몸에 좋은 음식을 찾아다니기보다 지나친 욕심[식욕]을 절제하는 것에 있으리라.(문화재사랑 2021년 18-19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