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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하곤,18세기 전북 방문한 까닭은


충청도 선비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이 1722년 10월 13일부터 12월 18일 까지 호남지방을 여행했다. 그는 '두타초(頭陀草)'에 일정과 내용을 상세히 적혀있다.
그는 10월 13일 충북 청주를 출발, 27일 여산, 28일 삼례, 29일 전주, 11월 1~3일 금구, 금산사, 피향정, 무성서원을 여행했다. 전남지역을 돌아본 후 12월 7일 남원, 8일 오수,  10일~12일 전주 경기전을 들러본 후 연산 개태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10월 27일 여산에서 호산춘(壺山春)을 맛보았다.


'이곳 여산(礪山)으로부터 호남 땅이니, 성읍은 일찍이 백제시대부터 있었네. 강경평야가 바다가 닿아있고 읍청정(挹淸亭)은 하늘가에 우뚝섰다. 우뚝 솟은 푸른 대나무 수 이랑에 이어지고, 호산춘(壺山春)을  마셔 약간 불그스레하지만 많이 마쉬면 취하네. 큰길은 빼어난 솜씨로 자른 듯 잘 나 있어 일산(日傘)과 가마 날마다 바쁘게 나다니네.<여산부에서 명주 호산춘이 산출된다>'


10월 28일엔 삼례 남동 삼십리를 가서 전주에 도착했다. 서쪽 성으로부터 천천히 남문 밖의 박자룡이 우거하는 곳에 도착했다. 다음날 전주 경기전에서 첨지 이대, 감사 황이장을 따라 알현했으며, 아침을 먹고 민지수와 경기전을 찾았다.
그는 전각이 한양의 영희전(永橲殿)보다 낫다고 했다. '서쪽에 어정(御井)이 있었다. 깊이가 수십 척이 되며 벽돌로 쌓고 쇠로 덮개를 만들었다. 대개 성안의 샘물 맛이 모두 나쁜데 이 곳이 가장 좋아 그 제일이리 한다'고 했다.
어정(御井)은 임금의 음식을 만들거나 임금이 마실 물을 기르는 우물을 말한다.  종묘(역대 여러 임금의 위패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 사직단(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토신인 사와 곡신인 직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등에서 임금이 참여하는 제례(제사)에 사용하는 우물도 어정이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셨던 경주의 집경전, 평양의 영승전, 전주의 경기전의 우물도 어정이라고 한다. 깨끗하고 성스럽게 취급해야 하므로 주위에 담을 두르고 문을 설치해 두기도 했으며, ‘여지승람’을 보면 ‘(전주)성 안에는 우물이 223개가 있었는데 이것이 그중 첫째가는 우물이다’고 소개된다.
전주시는 2004년 4월 20일 경기전 서쪽 부속 건물인 어정을 비롯, 수복청(守僕廳), 수문장청(守門將廳), 마청(馬廳), 동재(東齋), 서재(西齋), 제기고(祭器庫), 전시청(典祀廳), 용실, 조과청(造菓廳) 등 제사 관련 9개의 유물을 복원했다.
경기전 조경묘의 어정을 생각하면 고종황제의 딸 황녀 이문용(1900-1987) 여사가 생각난다. 그녀는 말년에 이곳에서 기거를 하였다고 하며, 10년 동안 어정을 사용했다. 1975년 5월 20일에 수직사 건물에 이사를 온 후, 그해 11월 20일 75회 생일을 맞아 그녀를 돕기 위한 바자회가 열렸다.1987년 3월 28일 오후 5시 30분에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그녀는 도래샘을 꿈꾸었다.
그가 호남여행을 할 당시엔 전주성 안쪽엔 '회경루(會慶樓)'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다. 그후 전라관찰사 서기순이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으로 바꾼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주의 풍요로움 팔도에 드물고  토속 민풍이 서울과는 다르네.  추녀는 누런 머릿카락에 말아 올린 머리 삐딱하고 약삭빠른 녀석은 하얀 얼굴에 산뜻한 옷으로 갈아입었구나. 마을 사람들은 평량자(平凉子, 패랭이) 쓰기를 좋아하고, 가게에는 모두 백산자(白散子)가 놓여 있네. 생강 수염으로 만든 김치 절임은 그 맛이 일품이니 북쪽 객은 새 맛을 보고는 돌아갈 길 모르네.<전주의 풍속과 토산물을 오체(吳體)로 짓다>'


그는 전주 남밖시장에 진열된 상품 가운데 평량자(平凉子)와 박산(薄散)이 절반을 차지한다고 했다.
회경루에 올라 시장을 바라보니 수 만인이 모여 서 있는 것이 한낮의 서울 종로(鐘路)거리와 같았단다. 실제로 이중환의 택리지 전라도조엔 '전주가 서울과 다름없는 대도시(貨財委責, 與京城無異, 誠一大都會也)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는 박산은 쌀밥과 엿을 조합해서 만들었다고 했다. 목판으로 종이처럼 고루 얇다랗게 눌러, 네모나게 잘라 점점 타원형으로 하여, 네댓 조각을 겹으로 쌓아 하나의 떡을 만들었다. 이는 공사(公私)의 잔치와 고임상에 차려 쓴는데 오직 전주 사람들이 이것을 잘 만들었다고 했다.
12월 12일 일기는 또 전주지방의 ‘삼불여설(三不如說)’을 기록했다.
그는 당시 호남인들에게 삼불여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른 바 여자가 남자만 못하다(기불여남, 女不如男), 배가 무우만 못하다(이불여청, 李不如菁), 꿩이 닭만 못하다(치불여계, 雉不如鷄) 등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전주에는 사불여설(四不如說)이 전하고 있다. 이는 양반이 아전만 못하다(반불여리, 班不如吏), 기생이 통인(通引)만 못하다(기불여통, 妓不如通), 배맛이 무 맛보다 못하다(이불여청, 梨不如菁), 아무리 좋은 술이라도 안주만 못하다(주불여효, 酒不如肴) 등이다.
당시의 경기전의 모습도 흥미를 더하고 있다.


'동각문을 거쳐 후원에 들어섰다.  나무중에는 떫은 감나무가 많았다. 전복(展僕)이 "여름철에 풀이 사람 키 높이로 자라도 절대로 벌레나 뱀 같은 것이 없고, 비록 장마가 졌다 개어도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하니 또한 지극히 이상하다. 북쪽으로 수십 보 지점에, 우뚝 자란 대나무가 하늘로 치솟아 어둠침침하고 청랭(淸冷)한 것이, 별경(別景)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으니, 밖으로부터 바라보면 즉 감춰져 있어 끝내 이곳에 이같은 아름다운 정취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어정을 바라보고 돌아와 재실에서 식사를 했다'


10월 29일 방문시에는 '평상시에는 연(輦)과 일산(日傘) 등의 물건을 저장하는 곳으로 정원과 뜰이 매우 넓다. 좌우에 8~9주의 소나무가 나란히 서 있다. 줄기와 가지가 엉키고 구부러져 마치 규룡(叫龍, 용이 부르
짓음)이 뒤엉켜 싸우는 듯 하니 지극히 기이한 사물의 형상이다. 내가 민지수를 바라보면서 "이것이 다리품값을 보상해주는구먼" 하니 그 또한 웃었다. 어원(御苑)에 고목이 많고, 또 우뚝 솟은 대나무가 곧곧하게 서 있어 그 사이를 바라보니 비취빛이 가득했다.  이날은 참봉이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아서 어용(御容)을 참배하지 못해 한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12월에 다시 방문한 것 같다.

금산사 미륵전 장육불 관련 사실도 밝혀졌다. 그는 11월 2일 금산사 장육불(丈六佛)의 엄청난 크기를 보고 작품을 남겼다.
 장육불은 부처의 별칭으로, 그 키가 1장 6척에 몸이 황금색이었다는데서 유래한다. 그는 쇠로 주조했는데 높이가 20여 척은 되고, 아래는 철확(鐵鑊, 철가마)으로 쌍받침을 했다고 했다.


'호남에서 최고로 유명한 절은 금산사라. 첫 번째 보이는 건 동편의 장육불(丈六佛)이라네.손가락 끝까지 높이 뻗쳐야 좌대에 닿는 정도요. 고개들어 바라보니 정말 태양이라도 가릴 듯하네. 장엄하게 치장하느라 신라, 백제가 이미 망했으며, 창설의 공력 귀신에게 뺏길까 두렵네. 대중의 도움을 힘입어 시워진 줄 알겠으니, 명목(冥福)이 펼쳐져서 우리 백성들에게 미치리라.<장육불>'
금산사 미륵삼존불은 이보다 앞선 1626년 조성됐으며, 미륵존상의 개금(改金)불사를 행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복장문(服藏文)을 봉안한 것은 1708년이다. 안타깝게도 1935년 화재로 인해 미륵전의 삼존불 일부가 손상되기도 했다./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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