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식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76> 전북 전통 식자재와 유물 유적

< 역사문화 이야기 176> 전북 전통 식자재와 유물 유적

전주 동이갤러리가 다음달 4일부터 제1회 '한국 전통 식자재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기획전'

전주 동이갤러리가 다음달 4일부터 25일까지 동이스카이갤러리 14층 1. 2관에서 제1회 '한국 전통 식자재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기획전'을 갖는다.
전북 역사상 최대 규모 그릇전으로 눈길을 끈다.

전시는 삼국시대, 고려, 조선, 근대까지의 음식, 부엌(정재), 주방 관련, 용품, 가구, 조리도구, 그릇, 고문헌, 사진, 신문, 잡지, 회화외 농축산 관련  문화유산 2,000여점이 지역별, 용도별로 공개된다.
한국의 전통 음식도구, 장비, 자료를 통해 긴긴세월의 삶의 애환과 애정, 추억, 먹거리 문화유산의 흔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한 전통 식자재 문화유산을 개인이 소장할 수 있는 기획전이다.

물고기, 용, 거북(자라) 모양이 시문된 매병 등은 음식 저장용 그릇이다. 몸체가 공처럼 둥글고 아랫부분에서 나팔 모양으로 폭이 좁다.
'물고기 무늬 매병'은 어깨쪽에 연꽃잎 문양을 간략하게 표현해 넣었고, 그 바로 아래쪽에는 넝쿨 띠를 상감하여 넣었다.
몸체 전체에 점을 찍어 채우고, 큰 원안에 파도 무늬 배경을 넣고 물고기를 각 두마리씩 새겨 넣었다. 잘록한 허리부분에는 꽃과 풀을 추상적으로 표현해 넣었으며, 그아래에는 연꽃잎 모양의 문양을 둘렀다.
오리 문양의 그릇도 눈길을 끈다.
오리는 장원급제를 상징하는 동물로 오리 '압(鴨)'를 나누면 '갑(甲)'과 '조(鳥)'가 되는데 갑은 으뜸을 나타내는 것으로 장원급제를 의미한다. 또한, 오리가 노니는 연못에 있는 연밥은 한자로 '연과(蓮顆)'인데 잇달아 합격한다는 뜻의 '연과(連科)'와 발음이 같아 향시(鄕試)와 전시(殿試)에서 모두 장원급제하라는 의미로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신선로(神仙爐)'그릇도 소개된다.
한국의 요리 중 하나이자 궁중음식에 속하는 요리다. 원래 명칭은 열구자탕(悅口子湯)이고 신선로는 열구자탕의 그릇을 칭하는 말이지만 지금은 신선로가 이 요리 자체를 뜻하는 말로 굳어졌다. 별칭으로 '구자탕', '탕구자'라고도 한다.
둥근 그릇인 신선로에 고기, 해산물, 채소 등을 잘라서 넣고 소고기 육수를 부어서 끓이는 음식으로 밑바닥에 쇠고기, 무, 생선전, 처녑전, 우간(牛肝)전, 미나리 또는 파를 담고 해삼, 전복을 넣어서 맨 위에 황백, 버섯, 홍고추, 완자, 깐 호두, 볶은 은행 등을 색조를 맞춰서 아름답게 돌려담은 음식이다. 한복과 같이 색의 조화와 다채로운 색채, 그리고 신선한 재료의 맛이 각각 느껴져야 하고 육수를 먹을 때 재료의 맛이 살아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 포인트인 요리다.

'삼국시대   '무쇠 솥. 정(鼎)'이 소개된다.
솥은 곡식, 물, 국, 고기 등을 끓이고 밥을 짓는 데 쓰는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음식 조리도구이다.
이 솥은 무쇠로 제작되었고 삼족(三足)이다.  다리 상단 부분에 뚜렸한 용두(龍頭) 또는 귀면(鬼面) 형태가  특징이고 발부분 또한 발가락 형태가 남아 있다.  동체를 떠받치는 높이가 있고, 동체는 둥글며 동체 위로 타공되어 있는 손잡이(걸이)가 있다.
솥은 다리가 없는 것을 부(釜)라 하고, 다리가 있는 것을 정(鼎)이라 한다. 정(鼎)자는 고대부터 사용했다.  1400년이 넘는 세월에도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하반영화백의 '굴비' 작품 2점도 소개된다. 짭조름하면서 졸깃한 굴비다.
대부분 굴비의 본고장인 전남 영광군 법성포에서 겨울철에 가공된다. 천일염으로 간을 해 바닷바람에 한두 달 동안 말린다.
그야말로 지독한 구두쇠인지라 식사 때천장에 매달아놓은 후 밥 한 술에 굴비 한번 쳐다보기라는 괴이한 식사법을 애용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며. 아울러 나오는 추임새도 유명하다. "어이 짜다~." 이 때문에 자린고비가 '절인 굴비'에서 따왔다는 설이 대중적으로는 가장 유명하다.
자린고비 조륵 선생이 얼마나 구두쇠였나면, 쉬파리가 장독에 앉았다가 날아가자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깝다고 “저 장도둑놈 잡아라”하고 외치며 파리를 쫓아갈 정도였다.
무더운 여름철이 되어 어쩌다 부채를 하나 장만한 조륵은 부채가 닳을까 봐 부채를 벽에 매달아 놓고 그 앞에서 가서 머리만 흔들었다. 

바로 이 느낌이 잘 드는 작품이다.
떡살, 소반, 방아, 주전자 등 어마어마한 전시물이 소개된다.

김완기관장은 " 어머니의 정을 느낄 수 있는 각종 식자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미술품들로 구몄다”며 “학생들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교육 자료로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며, 가족들과 함께 옛 정취와 고미술의 향기에 푹 빠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고 했다.

군산 십이동파도선의 철제 솥 

군산 십이동파도선에선 철제 솥 등이 발견됐다.
전북의 수중문화재 조사는 새만금 방조제 건설을 계기로 고군산군도 등에서 이루어졌다. 방조제를 건설하는 대규모 물막이 공사로 인해 주변 바닷속 물길이 변화했고, 덕분에 펄 속에 묻혔던 유물이 발견되어 발굴로 이어졌다.
2002년 군산 비안도 수중 발굴 이후 2003~2004년에 군산 십이동파도, 2006~2009년에 군산 야미도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고려시대 청자를 운반하던 배인 ‘십이동파도선’을 비롯한 도자기, 닻돌, 철제 솥, 시루, 밧줄 등 1만 5,0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십이동파도는 군산의 정서쪽으로 45㎞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로 일명 ‘동바루’라고도 불리는 섬이다. 십이동파도는 12개의 섬이 깨져 있는 것처럼 산발적인 지형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런 섬의 형태를 한자로 옮겨 ‘십이동파도’라 불리게 됐다. 1970년대까지 사람이 살았으나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는 행정구역상 군산시 옥도면 장자도리에 속해 있는 무인도다.
십이동파도선은 고려 11~12세기 초에 활동했으며, 2003~2004에 군산시 옥도면 십이동파도 해저에서 발굴됐지만 선체는 갑판을 포함한 상부는 남아 있지 않았다.
주요 선적품은 고려청자였으며, 그외 철제솥, 청동숟가락 등 소량의 유물을 포함, 모두 8,743점이었다. 파편으로 된 청자를 포함하면 더 많은 청자가 실려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큰 성과는 최초로 우리나라 고대선박 이물비우와 닻구조물의 발굴이며, 배에 쓰인 나무는 소나무, 느티나무, 굴피나무, 참나무, 상수리나무 등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완도선(1984), 달리도선(1995), 십이동파도선(2004), 태안선(2007) 등 모두 13척의 고선박이 발견됐다. 십이동파도선은 1983~1984년도 전남 서해안에서 조사된 완도선(12세기초), 1995년도 목포시 관내에서 조사된 달리도선(14세기)과 함께 고려시대의 한선(韓船) 발달 과정을 밝히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때문에 십이동파도 수중발굴조사는 조사환경이 우리나라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밀물과 썰물에 따른 조류의 영향을 받지 않아 수중촬영, 실측 등 종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수중 고고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학습의 장이 되고 있다.

남원 실상사에서 장고(醬庫, 장과 독을 관리. 보관하던 공간) 발견

 실상사(사적 제309호)에서 통일신라시대 ‘선종 사찰의 고원(庫院)’ 시설인 장고(醬庫, 장과 독을 관리. 보관하던 공간)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특히 가람의 동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 가장 이른 시기의 선종 가람의 배치 특성을 알 수 있는 시설로 눈길을 끌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와 (재)불교문화재연구소가 올해 발굴조사한 남원 실상사에서 이같은 유물이 발견된 것.

북쪽 담장 외곽구역에 위치한 장고는 정면 1칸 이상, 측면 3칸 규모의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로, 대형 항아리를 묻기 위한 수혈(竪穴, 구덩이) 38기가 확인된 바, 폭 5.4m의 중심 칸에 4열씩 열을 맞추었다.

수혈 내부에서 확인된 항아리는 28기이며, 항아리 내부의 잔존시료는 분석을 의뢰한 상태이다. 항아리는 밑이 둥근 것과 편평한 것 등 여러 종류로, 입자가 고운 모래땅에 구덩이를 파고 점토를 바른 후 묻었다.

고원시설에 관한 문헌기록으로는 남송 시대 중국 선종 사찰의 현황을 수록한 ‘오산십찰도’(13세기 중반)의 ‘장(醬)’, 고려 시대 '천보산회암사수조기'(14세기 초)의 ‘장고(醬庫)’가 전하지만 이 기록들보다 앞서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상사 장고는 선종사찰 고원시설의 하나로, 통일신라 최초의 선종 사찰이었던 실상사의 규모와 특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구라는 평가다.

이와 함께 중국 선종의 장회해선사(百丈懷海禪師, 749~814년) 이후 선종의 독립과 청규(淸規, 선종 교단에서 지켜야 할 수도 규칙)를 중심으로 한 선종 사찰 특유의 자급자족적 생활상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왕궁리유적 부엌

조선시대 왕궁의 수라간에 비유되는 백제 사비기 왕궁의 부엌(廚, 주)터가 익산 왕궁리유적서 발견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에 대한 발굴조사를 한 결과, 백제 사비기 왕궁의 부엌터로 추정되는 동서 6.8m, 남북 11.3m 규모의 건물터를 발견한 것.
 건물지 내 타원형 구덩이에서는 철제솥 2점과 함께 어깨가 넓은 항아리 2점, 목이 짧고 아가리가 곧은 항아리 1점, 목이 짧은 병 2점 등 토기 5점과 숫돌 3점이 발견됐다.
 바로 옆 바깥에서는 철제솥 1점이 놓여 있음도 확인됐다.  철제솥은 원형 돌기가 달린 바닥에, 어깨에는 넓은 턱이 있고 아가리는 안쪽으로 살짝 휘어져 있었다. 이는 익산 미륵사지, 부여 부소산성, 광양 마로산성 등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이후의 철제솥과 유사해 고대 백제계 철제솥의 변화 양상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시루

완주 반교리, 전주 여의동, 남원 세전리, 군산 남전 등에서 시루가 발견됐다. 바로 이러한 양상은 삼국시대 이후 시루가 한반도 전역에서 사용됐음을 시사한다.

젓갈

태안 '마도 3호선'에서 발견된 목간엔 ‘죽산현에서 개경에 있는 윤방준 댁에 게젓 한 항아리를 올린다’는 내용이 있어 해남에서 개경의 권력자에게 게젓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마도 난파선의 도기 항아리에 담겨 있던 젓갈로 게젓, 새우젓, 전복젓, 홍합젓, 고등어젓과 청어·밴댕이·전어·조기를 한데 담은 잡어(雜魚)젓도 있었다. 요즘도 먹는 젓갈들이다. 배에 실렸던 젓갈들은 각종 곡물, 식재료와 함께 전남 나주, 장흥, 해남, 여수, 전북 고창, 정읍에서 개경과 강화도에 보내졌다. 받는 사람은 당시 고려의 권력층이었다. 무신정권기 최고 권력자 중 하나였던 김준, 왕명 출납을 담당한 3품 고위직 관리인 승제 유천우, 정4품의 시랑 신윤화, 대장군 윤기화, 무관인 교위 윤방준 등의 수취인이 확인됐다. 난파선에서 발견된 전라도의 젓갈은 예부터 지금까지 귀하게 대접받고 사랑받은 지역의 전통 음식문화가 잘 이어져왔음을 보여준다.

미륵사지의 김장독

AD 600년 창건된 백제의 미륵사지 동원 승방지 기단 내부에선 높이 1m여 의 대형 토기들이 발견됐다. 승려들이 사용한 이 토기는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는데, 이는 땅 속에 묻어두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겨우살이에 대비한 김장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미륵사지의 토기가 김장독으로 쓰였다면, 김장의 역사는 자그마치 1400 여년에 이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연구결과 보고서가 나오지 않는 가운데 주둥이가 너무 작아 김장독복다는 다른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즉, 출토 당시 내부에는 진흙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이 속에 산화된 쌀과 보리가 포함돼 있어 곡식을 저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미륵사지유물전시관 관계자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250여년 된 전주 학인당의 땀샘

한옥마을 남쪽에 자리한 학인당(전북 민속문화재 제8호)은 유일한 한옥 문화재로, 2개의 우물이 지금도 남아있다. 종가로 전하여 내려오는 유구한 역사와 넓은 마당, 연못이 있는 정원, 독특한 땅샘은 학인당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다. 하나는 땅샘으로 250여 년이 넘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우물은 1908년 건립 당시엔 만들어졌다고 안주인 서화순여사가 말했다.

땅샘은 정원의 돌계단 16칸을 내려가게 만들었으며, 한여름에도 일정한 온도가 유지돼 열무김치이며, 수박 등을 보관하는 냉장고다. 계단의 길이는 420cm며, 입구에 대리석이 깔아져 있다. 작은 연못에서 금붕어가 이곳을 다녀간 김구 주석처럼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학인당 안채가 앉혀지기 전에 원래 그 자리에 초가집이 있었다고 한다. 땅샘은 바로 그 초가집 앞에 있던 우물이었다. 그 우물을 메우려고 했으나 집안의 우물을 메우면 자손이 끊긴다고 하여 샘을 살려 놓았다. 이곳은 청수정(옛 지명)이 있었을 만큼 물이 맑은데다가 마당의 땅샘을 살리기 위해 정원을 만들었다. 용혈이 있는 명당으로 용소가 바로 땅샘이며, 용의 꼬리와 용의 머리가 집안 곳곳마다 자리하고 있다.

우물 속에 파아란 바람이 분다. 학인당 정원 한가운데 근사한 박우물 하나. 샘을 둘러싸고 높직이 쌓아올린 아름드리 돌에는 푸릇한 이끼가 곱게 덮였다. 황금빛 도는 갈색 돌계단을 밟아 내려가면 홀연 계곡에 들어선 듯한 서늘함과 아늑함 속에 옹달샘이 들앉아 있다. 땅 밑으로 내려가 있다고 해서 땅샘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의 모습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