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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60> 몸이 아파 나박김치를 먹은 이석표 전라감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59> 몸이 아파 나박김치를 먹은 이석표 전라감사

전라감사 이석표의 ‘호남일기(역주 이동희, 펴낸 곳 전주시, 전주문화연구회)’가 한글로 번역됐다.

‘호남일기(湖南日記)’엔 전라감사 업무 인수인계식이 나온다. 이석표는 1750년 5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해 이듬해 1월 임지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출발을 알리는 세 번째 나팔을 불게 하고 황화정을 떠나 여산 오리정에 도착해 의막소(依幕所)에서 가마가 내렸다. 감사가 의막소에서 표의(表衣)를 입고 큰 말을 타고 통개를 차고 수기(手旗)를 쥐었다.(중략) 신임 남원부사 원경렴, 용안현감 안상집, 삼례찰방 정언필, 심약 김상후, 검률 곽한이 함께 길 왼편에서 허리를 굽혀 공손히 맞이했다. 차례대로 선도하여 여산 객사에 도착했다.(1750년 5월 26일 일기중)’

이 일기는 이석표가 전라감사로 전라도로 들어와 여산에서 전임 감사와 교대식을 한 5월 26일부터 이듬해 1월 17일까지의 기록이다. 자신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닌 휘하 막료가 그날 그날의 감사 행적을 기록했다.

그는 재임 기간은 짧지만 부임 절차와 의례, 감사의 업무, 지방관들의 접대 등 귀한 자료들이 기록됐다.

9월 11일의 기록엔 나박김치가 나온다.

'아침에 영광군수 이광익(李光瀷)이 잡혀나갔다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밖에서 문안하고 갔다. 전주판관이 입알하고 하직하고 갔다. 나팔을 세 번째 분 후에 길을 도착하여 가마를 잠시 쉬었다. 
나복(蘿葍, 나박김치)을 먹은 후 가마를 타고 행차했다'

이는 전라감사가 먹은 음식이 나온 첫 사례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셀리는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라고 노래했다. 
셀리의 시 구절처럼 엊그제가 겨울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 봄기운이 느껴진다. 봄이 되면 생각나는 우리 전통 음식 중 하나가 나박김치다. 
나박김치는 무나 순무를 납작하게 썰어 국물이 있게 만드는 김치로, 산갓을 넣어 담기도 하여 ‘산갓김치’라고도 부린다. 나박김치는 1년 내내 아무 때나 담아먹지만, 대개는 김장김치의 묵은 맛에 질릴 즈음에 산뜻하게 담아 먹는 봄김치로 여겨졌다.
빨간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맛깔 나는 김치 국물에 무를 썰어 넣고 파 마늘 생강 등의 양념에 미나리와 실고추를 썰어 얹은 나박김치는 상큼한 맛이 봄철 입맛을 돋우는데 제격이다.
나박김치의 ‘나박’은 나박나박 썰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재료인 무의 옛 이름이 ‘나복(蘿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겨울철 쌓인 체열을 흩어주는 역할 역사의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때 나박김치는 실제 약품으로 사용된 예도 있다.
조선 중종이 즉위한 지 19년이 되던 해인 1524년 평안도에 병이 돌았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에 보면 평안도 용천에서 병이 돌아 사망한 자가 670명에 이른다고 적혀 있다. 
이로 인해 평양감사가 문책까지 당했다. 이듬해에도 병이 돌았는지 중종은 서둘러 의관인 김순몽과 박세거를 시켜 ‘간이벽온방’이라는 의학서를 펴낸다.
나박김치가 의학서에 나오는데 식품이 아니라 의약품으로 등장한 것이다. 중종이 순무로 나박김치를 담가 어른이나 아이, 대소간에 할 것 없이 모두 마시도록 하라고 지시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역병에 걸리는 것을 막으려고 나박김치 국물을 마시라고 했으니 지금 들으면 웃음이 나올 법도 하지만 옛날 사람들의 근거 없는 민간요법이라고 무시할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고전 한의서에는 무를 약효가 뛰어난 식품으로 여겼는데 나박김치는 기본적으로 무로 재료로 담근 김치인 만큼 병에 효험이 있다고 본 것 같다.
명나라 때 의학자 이시진이 쓴 '본초강목'에 무는 채소 중에서 가장 이로운 야채로 과도한 위산 해독에 좋고 소변을 다스려 주며 허한 기를 보충한다고 했다.
또 무는 겨울철 뱃속 깊숙한 곳에 모여 있는 체열을 흩어지게 해 위장 활동을 도와준다고 했다. 얼마나 좋으면 옛 중국 속담에 “시장에 무가 나오기 시작하면 의사가 병원 문을 닫는다”고 했을까.
그러니 무로 담근 나박김치야 말로 봄철 입맛을 돋우는 것은 물론 겨울에 쌓인 각종 노폐물을 없애는데 제격인 음식이었던 모양이다.
‘나박김치’는 무김치라는 뜻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이 지금과 같은 나박김치를 담가 먹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나박김치’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조선 중기 이후 같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도 우리 조상들이 먹었던 김치의 주류는 아마 나박김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먼저 배추김치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빨라야 조선 전기로 봐야 할 것이고 요즘과 같은 통 배추김치는 조선 후기에 들어 일반화됐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주로 무 김치를 담가 먹었는데 나박김치가 바로 무김치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박김치’라는 단어 자체가 무김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박’은 한자어 나복(蘿蔔)에서 나온 말로 ‘무’를 뜻하는 단어다. 현대 중국어에서도 무를 ‘나복(蘿蔔)’으로 쓰고 ‘뤄보’라고 읽는다.
나박김치는 옛날 한자어인 ‘나복저(蘿蔔菹)’에서 ‘나복’이 나박으로 바뀌었고 김치를 뜻하는 한자어 ‘저(菹)’ 대신에 절인 채소라는 뜻의 김치의 어원인 침채(沈菜)’을 썼다가 ‘침채’가 ‘김치’로 변형되어 나박김치가 됐다.
우리나라 김치의 주종을 이루던 무김치에서 별도로 나박김치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것은 조선 중기로 보인다. 중종 때 비로소 간이벽온방이라는 의학서에 ‘나박저’라는 용어가 보인다.
18세기 때 기록인 '증보산림경제'에도 나박김치처럼 보이는 김치 종류가 보인다.
 짠 무김치에 고추 잎을 저며 섞는다고 했으니까 현재의 고춧가루를 넣는 나박김치와는 약간 다른 것으로 보인다.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1759-1824)의 '규합총서(閨閤叢書)'의 ‘산갓김치’를 보면, 나박김치는 봄의 뜻을 먼저 알리는 김치여서 ‘보춘저(報春菹)’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입춘 때에 무를 가늘게 깎고 미나리, 순무, 파 등을 넣어 심심한 나박김치를 담가 따뜻한 곳에 두었다가, 익을 즈음에 끓는 물에 숨을 죽인 산갓을 나박김치에 넣는다. 그런 다음 나박김치 항아리를 여러 번 종이로 두껍게 덮고, 다시 솜옷을 눌러 더운 곳에 두었다가 먹을 때 간장을 타 먹으라고 했다.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의 ‘산갓김치’를 보면, 이 김치를 민간에서는 ‘나박김치’라고 부르는데 나박김치 항아리에 바람이 들어가면 김치의 맛이 써지므로 단단히 싸매야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맛이 써지는 이유는 산갓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용기(李用基: 1870-1933)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의  ‘산겨자김치(山芥葅 산갓김치)’에 자세하다. 이용기에 따르면, 산갓은 석왕사(釋王寺)에서 흔히 나고, 지리산에서 나는 것이 제일 좋은데 봄에 산갓김치를 담그면 맛이 맵고도 좋다. 다만, 뚜껑을 꼭 덮어서 기운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야 하며 기운이 빠져나가면 김치 맛이 써진다는 것이다.
나박김치는 반찬으로도 밥상에 올리지만, 제사를 지낼 때나 냉면을 말아먹을 때 쓰는 김치이기도 했다. 한글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 따르면, ‘냉면(令麵)’을 산뜻한 나박김치나 좋은 동치미 국물에 말라고 했고, 또한 ‘졔() 김치’, 즉 제사 김치라 하며 무를 납작하고 네모나게 골패 모양으로 썰어 나박김치를 담그되 파, 고추, 마늘, 생강도 넣어 익혀서 쓰라고 했다.
 어쨌든 나박김치의 원형일 가능성이 높지만 동치미와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식품 역사학자들은 나박김치를 동치미에서 갈라져 나온 식품으로 본다. 장아찌 형태의 무김치가 이후 소금물에 무를 절인 김치가 발전하면서 동치미가 됐고 동치미와 나박김치와 같은 국물김치로 분화됐다.
또 총각김치와 무청김치로 진화한 것으로 본다.
무를 소금물에 절인 후 오이 호박 부추 미나리 등과 함께 고춧가루를 풀면서 동치미와는 또 다른 맛이 나는 나박김치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런 나박김치는 임진왜란 이후에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고추가 임진왜란 무렵 우리나라에 전래됐기 때문이다. 고추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분홍색을 낼 때 맨드라미꽃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석표는 몸이 아파 종종 미음(糜)을 먹기도 했다. 다음은 10월 2일의 기록이다.

'환후가 한결같았다. 아침에 삼례찰방이 밖에서 문안하고 분부해 남게 했다. 일찍 밥을 먹은 후에 출발했는데 가교(駕轎)로 행차해 십리쯤에 이르러 이르렀다. 의막소에서 가마를 멈추고 휴식하며 미음을 먹었다. 출발하여 10리쯤에 도착해 추천(楸川) 가의 의막소에서 미음을 먹었다. 얼마쯤 휴식하다가 곧 출발해 감영으로 돌아왔다. 힘들고 번잡한 나머지 정신과 기운이 자못 평온하지 않고 애타는 마음을 견디지 못했다'

추천(楸川)은 전주시 송천동과 팔복동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다. 전주천과 삼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소양천과 다시 합해지는 곳까지의 하천이다. 전주천과 삼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추천대(楸川臺, 전라북도 문화유산 자료 제8호)’가 있다.
전주 팔복동은 추천 이경동(1438~1494)
선생이 은퇴 후 낙향해 낚시하며 노년을 보낸 곳으로, 후손 이정호가 그를 기리며 1899년 ‘추천대’라는 정자를 지었다.
일찍이 하가마을(가르내) 일대는 전주 이씨들의 집성촌이었다. 호가 추탄(楸灘)인 이경동(李瓊仝)선생은 아버지가 중병으로 사경을 헤매자 급히 인근 비석날(팔복동)에 사는 명의한테 찾아가 약을 처방받아 돌아오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전주천이 삽시간에 범람했다.
그곳은 삼천과 전주천이 만나는 합류지역으로 지금도 소나기만 내리면 삽시간에 물이 불어나는 지역이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높고 튼튼한 다리가 아니라 징검다리나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다리라 건널 수가 없었다.
바로 그 물길이 갈라진 위쪽 마을을 상가리(上可里)라 하고, 그 아래 마을을 하가리(下可里)라고 불렀으며 그 일대를 가리내, 가르내, 가래여울 등으로 불렀다.

'대비가 별전에서 훙(薨)하니, 춘추가 56세이요, 중궁(中宮)에 정위(正位)한 지 21년이다. 모든 범절을 한결같이 고례(古禮)에 좇아, 임금이 옷을 갈아입고, 머리 풀고, 발 벗고, 부르짖어 통곡하니, 상왕이 거적자리에 나아가 미음(糜粥)을 전하니, 이때 임금이 음식을 진어하지 않은 지 이미 수일이라, 상왕이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권하였다('세종실록' 세종 2년(1420) 7월 10일)'

1420년 7월 10일 낮 오시(午時:11~1시)에 원경왕후가 56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세종은 어머니가 위독하자 며칠 동안 곡기를 끊은 채 간호에 매진하였으나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만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세종은 자신의 심신을 돌보지도 못한 채 곧장 고례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풀고, 발을 벗고 거적에 나아가 울부짖으며 통곡한다. 이에 상왕인 태종은 그런 아들의 건강을 염려해 미음 들기를 권유한다. 그러나 세종은 끝내 이를 들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태종은 다음 날에도 환관 김중귀(金重貴)를 보내어 미음을 권하였다고 한다.
미음은 건강을 찾고 유지하기 위한 식치(食治) 음식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식치의 개념은 오래전부터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617~686) 쓴 '금광명경'의 '제병품'의 주석에 이르길 “사시와 음식을 거스르면 병이 생긴다.”라며 음식과 건강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고려사'에는 왕의 반찬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는 상식국(尙食局) 또는 사선서(司膳署)에 식의(食醫)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에 이르러 전순의는 '식료찬요' 서문에서 “식품으로 치료되지 않으면 약을 쓴다. 치료는 당연히 오곡(五穀), 오육(五肉), 오과(五果), 오채(五菜)로 해야 한다. 어찌 마른풀과 죽은 나무뿌리에 연연할 수 있겠는가”라며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종 때의 심의(沈義:1475~?)는 '대관재난고(大觀齋亂稿)'에서 음식을 절제할 것을 강조하며 의약보다는 식치가 먼저 임을 피력했다.
여러 기록을 통해 등장한 조선왕실의 대표적인 식치(食治)는 죽, 미음, 떡, 면, 탕, 즙, 차 등이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죽과 미음이다. 질병이나 슬픔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 할 시 위장의 기능이 떨어지는데 이때 죽이나 미음은 훌륭한 보양식이나 치료식이 된다. 
 미음은 소화가 잘 되어 국상을 치르는 왕에게 수시로 올려졌다. 어머니를 여윈 슬픔에 수라를 들지 못하는 세종에게 태종이 미음을 권해 기력을 회복하게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세종은 태종이 승하할 때도 병환이 위중할 때부터 승하한 이후에도 아무것도 먹지 않자 대신들이 간곡히 청하여 승하 다음 날에 겨우 담죽(淡粥)을 조금 들었다고 한다.
 담죽(淡粥)은 율무, 마, 쌀로 끓인 묽은 죽으로 오늘날의 미음이다.
이러한 상사(喪事)를 연이어 겪은 이후 세종은 후대의 왕이나 왕자가 상례로 몸이 쇠약해지는 것도 우려했다. 슬픔에 깊어 전례에 따라 쓰러지기 직전까지 음식을 먹지 않을까 봐 걱정한 것이다. 이에 세종은 소헌왕후가 승하한 이후 왕자들의 음식 섭취에 대한 절차를 마련한다. '세종실록'세종 28년(1446) 3월 24일 기록에 따르면 “임금이 왕세자와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에게 명하여 첫날부터 2일까지는 담죽(淡粥)을 마시게 하고, 3일부터 4일까지는 죽(粥)을 먹게 하고, 5일만에야 비로소 밥을 먹게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의 군주 중 대표적인 효자였던 인종은 부왕인 중종이 승하하자 곡기를 끊고 미음조차 먹지 않았다. '인종실록'의  '묘지문'에 따르면 “(중종이) 훙서(薨逝)하시게 되어서는 미음까지 전연 드시지 않은 것이 엿새이고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으신 것이 다섯 달이었으며 죽만을 마시고 염장(鹽醬)을 드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신들은 임금의 한 몸은 종사와 신민의 주인이 된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한 것으로 억지로라도 권제(權制)를 따르시어 고깃국을 조금이라도 들고 자미(滋味)를 돋우라 하며 세종대왕의 유교(遺敎)를 써서 올린다. 
그러나 인종은 세종의 유교는 병이 있는 경우에 그렇게 하라고 가리키신 것이므로 건강한 나의 경우와는 같지 않다며 이를 거절한다. ('인종실록' 인종 1년(1545) 1월 25일) 
하지만 겉보기에도 수척해졌을 뿐만 아니라 걸음 또한 휘청거릴 만큼 쇠약해진 인종은 결국 재위 9개월 만에 승하하고 만다. 이때 인종의 나이 겨우 30세였다.
쇠약한 사람에게 아주 좋은 미음은 쌀이 주재료다. 멥쌀이 일반적인 가운데 찹쌀, 메밀, 콩, 소맥, 율무, 인삼, 홍합 등 다양하게 응용됐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왕실 관련 기록에는 미음의 종류로 진미음(陳米飮), 인삼속미음(人蔘粟米飮), 목미음(木米飮), 갱미음(粳米飮), 청량미음(靑梁米飮), 청미음(淸米飮), 직미음(稷米飮), 속미음(粟米飮) 등 다양하게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숙종과 경종 조에는 특히 인삼속미음을 올렸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고, 영조는 쌀에다 도라지를 넣은 길경미음(桔梗米飮)을 찾았다.
미음의 효능은 무엇보다 원기회복에 좋다는 것이다. 즉 빠르게 기력을 회복시키는 음식으로 오랜 질환이나 급성 감기, 탈진, 탈수 등 각종 병으로 인해 허약한 몸에 좋다. 특히 소화력을 생각했을 때 오래 끓이는 게 좋은데 쌀 외의 재료에 따라 약효는 다르다.
소맥(小麥)은 맛은 달고, 성질은 약간 차고, 독이 없다. 소음경과 태양경으로 들어간다. 열을 멎게 하며, 번갈로 목구멍이 마르는 것을 멎게 한다. 소변이 잘 나오게 하고, 간기(肝氣)를 기르며, 누혈이나 타혈을 멎게 한다. 부인이 쉽게 잉태하게 한다. 심기를 기르므로 심병에 먹어야 한다. ...(중략)...소갈로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있을 시 소맥으로 밥이나 죽을 만들어 먹는다. (이시진의 '본초강목'의 '곡(穀)-마맥도류(麻麥稻類)')

'본초강목'에선 소갈로 인해 가슴이 답답한 증세가 있을 때 소맥으로 만든 밥이나 죽을 처방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향약집성방'에서는 “열을 없애고, 마른 갈증과 목이 마름을 그치게 하고, 소변을 잘 나오게 하며, 간의 기능을 보양하고, 하혈과 타혈을 그치게 한다”고 소맥의 효능을 설명하고 있고, 물 1말에 지골피와 소맥을 넣고 달여서 물이 7되가 되면 갱미를 넣고 미음을 쑤어 소갈로 인해 갈증이 날 때마다 조금씩 복용하면 잘 낫는다고 했다. 
또 '의림촬요'에서도 소갈의 식치(食治)로 소맥으로 지은 밥이나 죽으로 기록하고 있다. 

'(인원왕후의) 대여(大轝:상여)의 삼도습의(三度習儀: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세 번 미리 그 의식을 익히던 일)를 거행하였다. 임금이 최복(衰服)을 갖추어 입고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서서 영곡(迎哭)하기를 매우 애통하게 한 뒤, 신련(神輦)을 따라 건복문(建福門)으로 들어갔다.임금이 말하기를,
“날씨가 이같이 더운데, 군병(軍兵)이나 여사군(轝士軍)에게 미음(米飮)을 먹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신여군:神轝軍)과 대가호군(大駕扈軍)들과 함께 모두 그늘져 서늘한 곳에 머물면서 기다리게 했다('영조실록' 영조 33년(1757) 7월 7일'

 '식료찬요'에서도 소맥은 소갈로 입이 마르는 것을 치료하려면 소맥으로 밥이나 죽을 만들어 먹는다고 하였기에 당뇨로 고생했던 세종 역시 소맥 미음을 먹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미음의 효능은 원기회복이다. 빠르게 기력을 회복시키는 음식이다. 오랜 질환이나 급성 감기, 탈진, 탈수 등 모든 질환으로 인한 허약한 몸에 적용된다. 소화력을 감안하면 오래 끓이는 게 좋다. 쌀 외의 재료에 따라 약효는 다르다. 소맥을 넣은 미음은 갈증을 멎게 하고, 숙면을 취하게 한다. 또 소변줄기를 시원하게 한다. 
전통시대에 당뇨인 소갈병 식치로 활용했다. 당뇨로 고생한 세종도 소맥 미음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세종의 주치의인 전순의가 소갈병 식치법으로 소맥을 제시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본초강목에서도 소맥에 대해 ‘성질이 약간 차고 맛은 달다. 갈증으로 인한 목마름을 멎게 하고, 소변을 잘 나오게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