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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65> 순창고추장과 전주 즙장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64> 순창고추장과 전주 즙장

순창고추장, 전주집장, 전주(봉동) 생강 등
예로부터 우리나라  음식 가운데 지명이 들어간 것은 거의 드물다. 

순창고추장

순창고추장의 맛의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순창은 고추장 담는 시기가 타 지방과 다르다.

대부분 음력 10월에 메주콩을 쑤어 겨울철에 메주를 띄우지만 순창에서는 처서 전후(양력 8~9월)에 고추장용 메주를 별도로 만든다. 장의 단맛을 내는 곰팡이는 온도가 높을수록 많이 번식하기 때문이다.

고추장은 음력 동짓달 중순에서 섣달 중순 사이에 담근다. 메주는 더운 여름철에 띄우고 고추장은 추운 겨울에 담가 저온 발효를 통해 신맛을 줄이고 감칠맛을 살린다. 또 간장용 메주로 고추장을 담지 않고 고추장용 메주를 별도로 만드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순창고추장은 섬진강 상류의 지하 암반수로 빚는다. 순창은 예로부터 옥천(玉川)골로 불릴 만큼 물이 좋은 고장이었다. 진하고 깔끔한 장의 뒷맛은 물맛 덕분이란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순창고추장은 비옥한 토양에서 자란 농산물로 제조한다.

순창은 고추장의 맛을 좌우하는 효모균이 자라기에도 최적의 기후이다. 일년 중 안개일수가 70~75일로 50일이 채 안 되는 전국 평균에 비해 월등히 많다. 15~20℃에 달하는 충분한 일교차도 확보하고 있다.

 풍부한 일조량과 뚜렷한 일교차, 넘치는 습기는 온난다습한 곳을 좋아하는 효모균들의 낙원이다. 요컨대 최고가 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는 셈이다.

 순창고추장은 이렇게 햇볕과 물, 바람이 만든다. 어쩌면 인간은 조력자에 불과하다. 하긴 그렇지 않은 일을 헤아려보는 것 자체가 어리석고 우습고, 또 답답하다.

“송이, 생전복, 새끼 꿩, 고추장은 네 가지 별미라, 이것들 덕분에 잘 먹었다. 이로써 보면 아직 내 입맛이 완전히 늙지는 않았나보다.(승정원 일기,1768년 7월 28일)'

영조는 “송이, 생복, 아치(어린 꿩), 고초장(고추장) 이 네 가지 맛이 있으면 밥을 잘 먹는다”고 했다. 

50세가 되지 않던 조선시대 평균 수명. 조선시대 왕들 중에서도 83세까지 장수한 조선의 21대왕 영조.

18세기 조선은 윤택했다. 사람들은 조기의 짭짤함을 능가하는 새로운 자극을 원했다. 고추장은 조선을 매우면서도 달착지근한, 감칠맛의 세계로 이끌었다. 

18세기의 절반(53년)을 군림했던 영조는 유독 식성이 까탈스러웠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749년 7월 24일 그가 처음 고추장을 말한다. 

"옛날에 임금에게 수라를 올릴 때 반드시 짜고 매운 것을 올리는 것을 봤다. 그런데 지금 나도 천초(川椒·산초) 등과 같은 매운 것과 고초장(苦椒醬)을 좋아하게 됐다"

그 뒤로 영조는 고추장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지경이 됐다. 궁내에서 만든 것보다 민가, 특히 사헌부 지평인 조종부(趙宗溥) 집 것을 좋아했다. 

조종부는 탕평파 영의정인 이천보의 비리를 문제 삼았던 인물. 영조는 이를 당파성의 발로라며 괘씸히 여겼지만, 그가 죽고 5년이 지난 후에도 그를 떠올리며 고추장을 생각했다. 말년에도 "내의원에서 만든 고추장이 사부가(士夫家)에서 만든 것만 못하다"고 했다.

조종부의 본관이 순창(옛 이름은 옥천)이었다. 

18세기 초 숙종의 어의 이시필이 쓴 '소문사설'의 '순창고추장 만드는 법'을 보면 지금 것과는 달랐다. 메주를 쓰지 않고 그 속에 전복, 대하 등의 어패류를 넣어 삭혀 먹었다. 마치 지금 장조림 또는 장아찌 같은 음식이었다.

영조는 궁 밖에서 들여온 순창고추장을 너무 좋아해  '승정원일기' 1754년(영조 30) 11월 20일, 1761년(영조 37) 8월 2일 기사에 영조는 순창사람 조언신(趙彦臣)과 조종부(趙宗溥) 집안의 고추장을 즐겨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8월 2일 기사에는 “나는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영조는 고추장 예찬론자였다.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살아난 기억과 입맛 때문이었다.

영조는 즉위 24년(1748년)에 심한 현기증과 입안 염증으로 밥을 먹지 못해 기력이 고갈됐다.

생명이 위독한 상황을 맞았으나 장남인 사도세자 덕분에 건강을 회복한다.

비결은 궐 밖에서 구해온 고추장이다.

수라상에 오른 고추장을 먹고 56세 노인이 입맛을 되찾은 것이다.

이후 고추장은 수라상 단골 반찬이 됐다.

영조는 궁중보다는 민가에서 담은 고추장을 선호했다.

입맛을 사로잡은 고추장은 사헌부(검찰) 간부인 조종부 집에서 담근 것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궁궐 내에서 한동안 당황스런 일이 벌어졌다.

조종부는 특정 당파의 이익을 위해 좌의정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했다고 판단한 영조가 괘씸하게 여긴 인물이기 때문이다.

고추장 출처가 드러나 부하들이 한동안 긴장했으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확연히 돋보이는 맛 때문에 영조가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70살을 넘어서도 고추장을 즐겼다. 송이나 생전복, 꿩고기가 밥상에 오를 때 반드시 곁들여 먹었다. 맵고 달착지근한 고추장 맛에 빠져든 영조는 83세까지 살았다.

영조는 궁에서 송이, 전복, 어린 꿩의 고기, 우유 넣어 끓인 타락죽(駝酪粥)에 눈뜬다. 생강, 귤피, 삼, 계피로 달인 차도 즐기게 됐다. 그러면서도 절제를 알았다. 

원래 수라상 올리기는 하루 다섯 차례가 기본이지만 영조는 죽을 포함한 세 차례로 끼니를 줄였고, 배를 다 채우지도 않았다. 이 때문일까? 영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장수하며 가장 오래 재위를 누린 왕으로 남았다.

'소문사설'에 실린 순창고추장 조리법

순창고추장 기록은 '소문사설'에 처음 보인다. '소문사설'(謏聞事說)은 ‘들은 것은 적지만 그래도 아는 대로 말한다’라는 뜻으로, 조선 숙종ㆍ경종 때 어의를 지낸 이시필이 1720년경에 편찬한 책이다. 

“쑤어 놓은 콩 두 말과 흰 쌀가루 다섯 되를 섞고, 고운 가루가 되도록 마구 찧어서 빈 섬 속에 넣는다. 1, 2월에 이레 동안 햇볕에 말린 뒤 좋은 고춧가루 여섯 되를 섞고, 또 엿기름 한 되, 찹쌀 한 되를 모두 가루로 만들고 진하게 쑤어 빨리 식힌 뒤, 단간장을 적당히 넣는다.(중략)"

이시필이 만드는 법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보아 순창고추장은 당시 왕실고추장이었을 것이며, 이미 전국에서 제일 맛있는 고추장으로 소문났음을 알 수 있다.

영조의 고추장 사랑

영조의 고추장 사랑은 각별했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기록돼 있다. 

영조는 65세 때 어느 날 여러 의관과 나눈 대화에서 “가을보리밥ㆍ고초장(고추장)ㆍ즙저(짠맛이 나는 장아찌)가 입에 잘 맞는다”고 했다. 

75세 때는 “송이ㆍ생 전복ㆍ새끼 꿩ㆍ고추장은 네 가지 별미라. 이것들 덕분에 잘 먹었다. 이로써 보면 아직 내 입맛이 완전히 늙지는 않았나보다”라고 말했다.

영조는 고추장 사랑에 빠졌고, 고추장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지경이 됐다. 맛 좋은 사가(私家)의 고추장을 계속 반입하게 했다. 

이인좌의 난 당시 청주목사를 지내며 난을 평정하는데 기여한 조언신(趙彦臣)의 아들 조종부(趙宗溥) 집에서 담은 고추장은 영조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기력을 회복시켜주었기에 오랫동안 바쳐졌다. 심지어 조종부가 죽고 5년이 지난 후에도 그가 화제에 오르자 영조는 고추장을 떠올렸다고 '승정원일기'에 기록돼 있다.

 조종부의 본관은 순창조씨이다. 조종부 집안에서 오랫동안 왕실에 순창고추장을 진상한 것으로 보인다.

이세보와 순창고추장 선물

순창고추장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세보(李世輔ㆍ1832~1895)다. 그는 왕족(경평군 이인응)으로 철종의 종제(從弟)이자, 흥선대원군의 육촌 아우다. 458수의 시조를 지어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시조를 남긴 시조작가이기도 하다.

순창과 이세보의 인연은 그의 나이 29세였던 1860년(철종 11) 봄에 아버지 이단화(李端和)가 순창군수로 부임하면서다. 아버지를 찾아와 순창 지역을 유람하면서 명승지 8곳을 노래한 '순창8경' 이라는 연시조를 남겼고, 군청 앞에 있던 누정 응향각과 화방재에서 풍류를 노래한 시조 4수가 전한다. 또 순창ㆍ순천ㆍ화순 지역을 유람하면서 쓴 가사 작품 '상사별곡'을 남기는 등 순창을 유난히 사랑한 사람이었다.

김건우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이세보와 인계 마흘리(馬屹里) 전주이씨 집안이 주고받은 편지 일부를 소개했다. 

순창 전주이씨는 선조(宣祖)의 일곱 번째 아들인 인성군의 후손으로, 이환규(李桓圭)의 둘째 아들 이종백이 한양에서 순창으로 내려오면서 본격적으로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음은 당시 충북 보은에 거주하던 이세보가 1868년(고종 5년) 1월 18일에 인계 마동(현재 마흘리) 전주이씨 집안에 보낸 편지 내용 일부이다.

“고추장(古秋醬)을 먼 이곳까지 보내주시니, 감사한 마음이야 어찌 물품에 있겠습니까. 더욱 두터운 성의가 많아 감격스럽습니다. 언제쯤 왕림하시겠습니까. 간절히 바랍니다. 이곳에서 극히 구하기 어려운 물품은 고춧가루입니다. 부디 몇 말을 구해 보내주십시오. 값은 편지로 알려주시면 즉시 갚겠습니다. 잊지 마시고 각별히 주선해주십시오. 거듭 말씀드립니다”

이세보는 새해 안부를 묻고서 보낸 준 고추장에 감사드리며 보은에는 고춧가루를 구하기 매우 어려우니 꼭 보내 주고 값은 편지로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1874년(고종 11년) 10월 21일과 11월 15일에도 순창에 보낸 답장에서 (이세보를 대신해)보은에 사는 이종응(李宗應)이 “보내준 고추를 받아서 잘 사용해 감사했다. 이어 부탁한 고춧가루를 유념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고춧가루 부탁뿐만 아니라 선산 관리, 산송, 매매 대금 환수 등 보은 측에서 여러 차례 부탁했다. 순창 전주이씨 가문은 순창고추장이라는 선물을 적절하게 활용해 종중과 편지를 교환하면서 관계망을 형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문헌과 언론에 비친 순창고추장

'규합총서'에 순창고추장 만드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의약월보'(1914)에도 지역명물로 순창고추장을 기록하고 있다. '해동죽지'(1925)에도 순창고추장이 전국 으뜸이며,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1937)에서도 조선 각지의 명물에 순창고추장을 꼽고 있다.

최영년의 '해동죽지'에서는 “고추장은 순창군의 특산물로 그 색이 연홍색이고 그 맛은 달고 향기가 있으며, 그 기운이 시원하고 산뜻하여 반찬용도로는 비할 데 없이 아주 뛰어난 식품이다. 순창 사람이 서울에 와서 손수 이 장을 빚어도 맛과 색이 모두 순창에서 만든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했다.

 '개벽' 61호(1925), 동아일보(1927, 1931), 경향신문(1966, 1967) 등에 순창고추장은 맛으로 유명하며, 담그는 재료부터 다르다며 만드는 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전에 무학대사와 함께 구림 만일사 주변 민가에 들러 고추장을 맛본 후 “하도 맛이 있어 왕이 된 후 진상하라 했다”는 구전이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전주 즙장(醬)
 
“즙장을 그리 생각하시는 일 답답, 
저번 간 즙장 맛이 좋지 못하오니 갑갑, 
즙장을 묻고 이내 비 와 거름이 식어 그리되오니 답답하옵
즙장 메주 조금 남은 것 보내오니 시켜 잡사오실가 보내옵”

이글은 조선 후기 문신, 김진화(金鎭華, 1793~1850)의 아내 여강(驪江)이씨(李氏)가 남편에게 쓴 편지글이다. 편지를 띄운 날짜는 정확하지 않다. 무신년(戊申年 1848)이나 날짜는 명확하지 않다.

앞의 글이 무신 구월 삼십일(1848년 9월 30일)이고, 뒤의 편지글이 무신 지월 념일(1848년 11월 20일) 인 것을 보면 1848년 10~11월 어느 즈음 쓴 것으로 추정된다. 

김진화는 고창 무장(茂長)지역의 현감을 거쳐 능주(綾州) 목사로 재임을 하며 안동 집을 떠나 있었던 시절이 많았다. 

그의 아내는 안동 금계리의 본가 살림을 맡아야 했기에 남편과 동행할 수가 없었다. 부임지로 동행을 할 수 없었던 아내는 반찬을 해서 보내거나 식재료를 준비, 어떻게 해 먹어야 하는지를 꼼꼼히 적은 편지글을 남편에게 여러 차례 보냈다.

 한번은 즙장을 보냈는데 돌아온 남편의 반응이 아내를 무척 섭섭하게 했다. 여름날에 보낸 즙장 맛이 달라졌다며 타박을 한 것이다. 그러자 아내도 못내 서운한 심정과 맛이 변한 것에 대한 해명의 답장을 보낸 것이다. 

즙장은 콩과 밀기울로 만든 메줏가루에 소금과 가지, 오이 등을 말린 채소를 넣어 숙성시킨 장이다. 다른 장이 2~3개월 이상 숙성이 되어야 제맛이 나는 데 비해 즙장은 담근지 7~9일이 지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속성장이다. 빨리 떠야 하니 발효 시간 동안 적정온도 유지가 관건이다. 그래서 즙장을 담그면 항아리를 두엄 속에 묻었다.

 안타깝게도 아내가 즙장을 담근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내리는 바람에 두엄 속 온도가 내려가 적정 발효 온도를 유지하지 못해 제맛을 내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것이라도 남편을 생각하며 보냈던 것이다. 

아내는 집에 남은 즙장 메주를 싸서 보내며 원하는 즙장맛을 내보시든가로 마음을 달랬다. 즙장은 담가 오래 두지 않고 바로바로 먹었으므로 집에는 즙장용 메주를 준비하여 두고 별미로 즐긴 것을 알 수 있다.

즙장이란 집장 또는 즙지이 라고도 부르는 즙장은 우리 민족이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 다음으로 상용한 전통장류 중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그 제조법과 형태가 거의 소멸되어가고 있다.

전주 즙장은 여름에 메주를 쑤어 띄워서 만든 메줏가루를 고운 고춧가루와 함께 찰밥에 버무리되, 무·가지·풋고추 따위를 소금에 절여 장아찌로 박고 항아리에 담아 간장을 조금 친 뒤 꼭 봉하여 풀두엄 속에 8, 9일 동안 묻어서 두엄 썩는 열로 익혀서 먹는 장이다.

집장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오는 문헌은 1716년홍만선(洪萬選)이 지은 '산림경제'이다. 
 
'집장에 쓰는 메주는 밀 두말, 콩 두말을 물에 담갔다가 가루를 내어 찐 다음, 칼자루 모양의 단자를 만들어 가마니 속에 넣어 띄워 말린다. 이 집장용 메주 한말에 물 서되, 소금 세홉의 비례로 섞어서 장항아리에 담고 마분(馬糞) 속에 넣어 7일간 익힌다'고 되어 있다.

집장용 메주를 특별히 만들고 숙성법도 마분의 열을 이용, 발효온도를 조절하는 등 정성을 기울인 특수한 장임을 알 수 있다.

별법으로는 콩 한말에 밀가루 대여섯되를 섞어 절구에 찧어 만드는 방법이 있다. 집장은 지금도 각 지방에서 만들고 있는데, 특히 전주지방의 것이 유명하다.

전주지방에서는 밀가루 한말과 볶은 콩가루(콩 다섯되)를 쌀뜨물로 반죽, 띄워 말린 메주를 가루로 만들어 감청장(甘淸醬)에 버무리고, 여기에 가지·오이 등을 넣고 마분에 묻었다가 3일 만에 더운 물을 타고 먹을 때 꿀을 섞는다.

 『전주도읍지(全州道邑誌)』 중 『전주부읍지(全州府邑誌)』에는 전주부의 물산(物産) 외 진공(進貢)과 공물(貢物)을 상세히 기록했다.

여기에 말장(末醬)이 있다. 이 말장은 ‘내자시납(內資寺納)’이라 되어 있다. 내자시는 조선시대 호조(戶曹)에 속한 관청이다. 

궁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식품, 직조(織造), 내진연(內進宴)에 관한 일을 관장했다. 말장은 메주를 말한다. 좋은 메주가 있어야 맛 좋은 장을 만들 수 있다. 전주에서 만든 메주, 말장은 궁에 납품할 정도로 품질이 뛰어났다. 

말장은 메주다. 어의 전순의가 쓴 『산가요록(山家要錄)에 1~2월경 콩을 삶아 절구에 찧어 메주를 만든다고 했다. 그러나 즙장은 주로 여름에 먹는 장이기 때문에 메주를 4~5월 또는 7~8월에 만들었다. 

또 즙장용 메주를 빨리 띄우기 위해 손으로 쥐어 작게 만들었다. 거의 모든 고조리서에서 기록되어 있을 만큼 조선시대에는 일상적인 장이었다. 밀과 콩으로 메주를 띄우고 말린 메주가루에 소금이나 맛있는 간장을 섞어 만들었다. 일반 장과 다른 점은 가지나 오이 같은 채소를 말려둔 것이나 소금에 절여 물기를 뺀 것을 함께 넣는 것이다. 

풋고추나 고추잎이나 동아를 섞기도 했다. 장의 일종이긴 하나 채소가 들어가 있어 별도의 조리를 하지 않아도 바로 먹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의 쌈장과 같은 형태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전주에서 말장을 잘 만들어서인지 ‘전주식 즙장 만드는 법(全州汁醬法)’이 『증보산림경제』(1766),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1800년대 초), 『박해통고(博海通攷)』(1800년대 중)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전주식은 밀과 콩이 아니라 가을보리[秋麰米]와 콩이 주재료였다. 서유구는 『증보산림경제』의 기록을 인용, 『임원경제지』 '정조지'에서 전주(全州)식 비법은 “가을 보리쌀에 콩을 섞고, 쌀뜨물을 넣어 반죽해서 호두 크기의 덩어리를 빚는다"고 했다. 

이렇게 띄워 만든 메줏가루에 오이와 가지 말린 것 한켜, 누룩 한 켜로 층층이 항아리에 넣어 말똥 속에 묻어 3일에 한 번씩 따뜻한 물을 끼얹어 9일이 지나면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 항아리는 기름종이를 먼저 덮고 뚜껑을 잘 닫아야만 한다. 

우리 선조들은 장 항아리를 말똥[馬糞]이나 두엄 속에 묻어 그 온도를 유지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말똥이나 풀을 쌓아 놓은 두엄 속의 온도는 평균 40℃를 유지하여 대기 중의 온도 차이에  관계 없이 일정한 온도로 유지하게 된다. 또, 두엄 속은 습도가 높아 미생물의 활동량을 증가하기 때문에 발효균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 

즉 두엄은 장이 발효되기 좋은 가온 및 보온 환경효과, 적절한 습도 유지, 각종 미생물들에 의한 이산화탄소 배출로 상대적으로 산소의 함량이 낮은 저산소환경을 제공했다.

‘증보산림경제’의 9권 ‘치선(治善)’편은 ‘전주즙장’이 별도로 언급된다. 서유규의 ‘임원십육지’에서도 전주즙장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20세기 초 전통 장류 문화의 맥을 계승하고 있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별미장'으로 소개된다. 

전주 즙장은 말똥 속에 묻는다고 하여 '말똥즙장'이라고도 하며 전주 수원백씨 가문에서 대대로 전승시키고 있다고 하여 백씨장(白氏醬)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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