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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재 황윤석의 ‘타어부(打魚賦)’

 

 

조선 후기 실학자 이재 황윤석(1729~1791)이 평생에 걸쳐 보고 들은 모든 지식을 기록한 백과전서 '이재난고(頤齋亂藁)'10세 때부터 죽기 이틀 전까지 일기형식으로 저술한 서책으로 글자 수로는 대략 400만 자, 묶인 책으로 50권에 달한다.

황윤석은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신경준(1712~1781)과 함께 전라도를 대표하는 학자로 거명되던 인물이다. 일찍이 영조 임금은 황윤석에 대해 "황윤석만은 나를 만나지 못했으니 다른 날에 그 누군가 쓰는 자 있을 것"이라며 황윤석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것을 애석해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는 시문·언어·산학·도학·의학 등 인류생활에 이용되는 온갖 다양한 정보들이 망라돼 조선 후기 사회상을 그대로 비춰주는 백과사전으로. 지난 1984년 전북 유형문화제 제111호 지정됐다.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황윤석이 보고 배우며 생각한 모든 것을 매일 기록하고 그의 연구 결과까지 정리하면서 조선 후기 과학자의 연구 노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정치, 경제, 과학, 역사, 사회, 문화, 언어 등 전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철저히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해 모두 이재난고에 담았다.‘이재난고에는 양반 지식인이 살아온 궤적이 매우 상세하게 담겨 있다. 심지어 당시 쌀값이나 국밥이며 고기 따위의 물가 변동까지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여행하면서 마을 이름을 한자와 한글로 나란히 적어 놓았고, 식물, 광물, 기물 따위도 한자와 한글을 나란히 적어 뒀다.

그는 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자명종을 개발하려고 시도했고, 조선후기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개발되는 많은 자명종을 소개하고 그 원리를 분석한 글을 남겨 놓았다.

또 강원도 춘천에 있던 선대 묘소를 이장할 때 이를 발굴보고서로 기록하고 고려 시대 묘제에 대한 분석까지 곁들였으니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발굴보고서라 할 수 있다.

 

'나는 지난 해의 초여름에 선운장(雲庄)에 들어가 살았는데 선운장과 장연(長淵)과의 거리는 삼리가 못된다. 그때에 고기잡이들이 고기잡이하기에 나도 따라가서 보았는데 친구들 서너 명도 함께 하였다. 돌아온 뒤로도 전에 놀던 일을 생각하면 정신이 쏠리지않음이 없어서, 글을 지어서 구경한 것을 싣고자 생각은 했으나 미처 하지 못하였다. 이제 마침 한가하기에 대략 서술하여오래된 소원을 풀었다. 구경한 것이 많았지만 겨우 줄거리를 요약하였을 뿐이다'

 

명승으로 지정된 고창 아산면 반암리 호암마을에 있는 병바위는 높이가 35에 이르며, 주변에 커다란 소반바위·전좌바위가 있다.

중생대 백악기에 분출된 용암, 화산재로 만들어진 암석인 응회암이 풍화·침식 작용을 거치면서 형성된 지형이다.

수직 절벽인 단애, 층층이 쌓인 퇴적암, 바위 조각이 떨어져 나가면서 생성된 구멍을 볼 수 있다.

바위에는 백화등·담쟁이 같은 덩굴식물이 자생하고, 주변에는 소나무 군락이 존재한다.

호리병 바위를 뜻하는 '호암'(壺巖)으로도 일컬어지는 병바위에는 흥미로운 전설도 내려온다.

잔칫집에서 매우 취한 신선이 쓰러지면서 소반을 걷어차자 소반에 있던 술병이 강가에 거꾸로 꽂혀 병바위가 됐다고 한다.

이 전설로 인해 주변 바위와 함께 '금반옥호'(金盤玉壺), '선인취와'(仙人醉臥)의 명당으로 꼽혀 왔다.

역사적으로는 '여지도서', '대동지지', '호남읍지' 등 옛 문헌에 '관아의 서쪽 20리 장연(長淵)가에 있다', '() 모양으로 서 있어 호암(壺巖)이라고 불린다'는 기록이 있다.

1872년 제작된 '지방지도'는 바위를 병 모양으로 강조해 묘사하기도 했다. 장연이란 인천강(주진천)'을 의미한다.

 

이재에게 고기잡이의 광경은 놀랄만한 체엄이었다. 그러므로 해를 넘겨서도 그 생생한 추억에 마음이 사로잡히어 글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흰 돌 위로 달려감이여

번개처럼 빠르고 급하구나

밴 그물 사방으로 둘러 침이여

출렁이는 물결을 막았도다

널판 두드려 소리를 냄이여

맑은 하늘에 벼락치듯 하는구나

돌을 던져 파도를 때림이여

높은 언덕에서 물결을 일으킴이여

일제히 쳐 올리며 거칠 것 없구나'

 

이는 고기잡이를 시작할 단계의 행동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부분이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며, 독자로 하여금 장면이 선명히 떠오르게 한다.

다음은 그물을 당기어 포획한 결과를 묘사한 부분이다.

 

'그물을 살짝 당김이여

고기와 갑각류 잇달아 건지도다

곤어와 잉어는 힘쓰지 못하고

방게와 전어도 도망치지 못하네

날치와 모래무지 가는 그물에 걸리고

우어와 용어도 가벼운 망에 묶였도다

자라와 악어는 작살을 맞았고

미꾸리와 쏘가리는 겹그물에 걸렸도다'

 

그는 끌어 올린 그물에 잡힌 각종의 물고기를 거론했다.

그물을 친지역인 장연(長淵)에서 실제로 서식하고 또 잡을 수 있는가의 여부에 상관없이 그만큼 다양한 어류가 잡힌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또 이러한 다종의 어류를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지은이의 의도적인 노력이 가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포획한 어류들의 조리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지고 있다.

 

'요리사 불러 칼을 놀림이여

장차 함께 즐기리로다

서릿발 칼날은 굳세기도 하여

백설같은 고깃점이 쓱쓱 베어진다

봄넝굴 같은 약한 뼈를 꺾음이여

성게를 쪼개니 붉은 살이로구나

혹은 창자를 발라내고

혹은 살을 저미기도 하네

끓이거나 썰기도 하고

말리지 않고 포를 뜬다네

마늘과 겨자도 찧어놓고

피와 생강도 섞는다네'

 

그가 약관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이에 부()라는 형식을 빌어 문장을 지었다.

이를 통해 그의 문학적 재능과 자긍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서민 계층의 일상 쇄사(瑣事)를 문학적 소재로 선택한 데는 실학파 문인의 공통적 문예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