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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향기나는 풀' 전주부 봉동 생강과 올공쇠 이야기



[인문학 스토리] '향기나는 풀' 전주부 봉동 생강과 올공쇠 이야기

"조선시대 전주의 한 장사꾼이 수확한 생강을 배에 한가득 싣고 평양으로 팔러갔다. 관서지방에서는 생강이 생산되지 않아 전주 생강을 매우 비싼 가격에 팔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평양에는 타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생강 장수는 그 기생에게 혹하여 생강 판 돈을 모두 탕진하고 말았다. 빈털터리가 된 생강 장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어 타이의 집에 부엌살이를 시작하였다. 긴 시간이 지나고 생강 장수가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자 타이는 불쌍히 여겨 집안에 굴러다니는 고물을 몇 개 찾아주며 그것을 가면서 팔아 노자에 보태라 했다. 그중에는 장구 테에 줄을 걸 수 있게 만든 갈고랑이 즉 올공쇠가 16개 있었다. 길을 떠나 고물을 팔려는 도중에 생강 장수는 흙에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오금(烏金) 얼공쇠음을 알게 된다. 당시 오금은 순금보다 열배는 비쌌다. 건네준 타이도 오금 올공쇠인 줄 몰랐던 것이다. 생강 장수는 전주로 돌아와 올공쇠를 백만금에 팔아 다시 잘 살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유몽인(1559~1623년)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 실린 ‘속담 올공쇠 이야기’ 입니다.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는 생강 장수가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읊다로 소개됩니다.

'남쪽 출신의 상인 한 사람이 배에 생강을 싣고 평양으로 팔러 갔다가 기생에게 유혹당해 지닌 돈을 모두 탕진해 버리고, 마침내 그에게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한 탄을 금치 못해 시 한 수를 지었다'

고 합니다.

'멀리서 보면 죽은 말 눈깔 같고
가까이서 보면 고름이 흐르는 종기 같네.
두 볼에 치아 하나 없는데도
한 배(船)의 생강을 모두 먹어 버렸네

遠看似馬目
近視如濃瘡
陽額無一齒
能食一船薑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엔 봉동생강 캐는 아가씨를 소재로 한 민요가 전해집니다.

'봉동생강캐는 아가씨'는 생강을 캐는 봉동의 아가씨를 소재로 해서 부른 노래입니다.
'봉동생강캐는 아가씨'는 3·3조 음수율에 4음보로 되어 있고 독창으로 부릅니다.

'봉동에 아가씨는 생강장사 아가씨 // 요쪽을 캐면은 무강이 나오고 // 저쪽을 캐면은 생강이 나온다'

봉동읍은 생강의 생장 조건이 좋아 생강골로 불릴 만큼 생강으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생강 캐는 아가씨의 모습을 통해 전라북도 완주군 생활사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완주군 봉동읍의 지역 특산물을 소재로 한 노래라는 점에서 지역성이 드러나는 민요라 할 수 있습니다.

종자 생강을 파종해 새로 나온 생강을 신강(新薑)이라 하고, 싹을 틔우고 난 후 물렁한 상태가 된 생강을 구강(舊薑)이라 고 하는 바, 구강의 다른 말이 무강입니다. 무강은 새로운 생강을 얻기 위해서 먼저 심은 종자인 셈입니다.

'봉동생강캐는 아가씨'는 이쪽을 파면 무강이 나오고 저쪽을 파면 생강이 나올 만큼 생강을 풍부하게 생산하는 완주군 봉동의 지역적 특성을 간략하고 소박한 노랫말로 표현했습니다.

생강은 독특한 향과 맛이 나는 식물로,맵고 따듯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한방에서는 약용으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원산지는 인도, 말레이시아 등지의 열대지방입니다.

우리나라에 유입된 시기는 명확치 않으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1241)에 생강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응희(1579~1651)의 '옥담사집(玉潭私集)'에는 생강(生薑)의 모양과 효능을 아래와 같이 표현합니다.

우뚝해라 저 밭에 있는 식물 / 卓彼畦中物
다른 채소와는 형체가 달라라 / 能殊衆菜形
단단하고 굳기는 옥출과 같고 / 剛堅同玉朮
연이어 맺힌 모양은 황정을 닮았네 / 連結類黃精
먹고 나면 가슴이 먼저 후련하고 / 喫罷胸先豁
많이 먹으면 몸이 절로 평안하지 / 餤多體自平
정신이 통하고 탁한 기운 없애니 / 通神且去穢
일찍이 성인의 경전에 드러났네 / 曾著聖人經

생강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전주부에 토공(土貢),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전라도읍지(全羅道邑誌)'(1760), '여지도서(輿地圖書)'(1765), '여도비지'(1856), '대동지지(大東地志)'(1866), '호남읍지(湖南邑誌)'(1871), '완산지(完山誌)'(1905) 전주부 토산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 유서 깊은 작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읍(邑) 사람들이 업(業)으로 생강을 심고 있다”고 하였으니 전주 인근의 생업 작물이었습니다. '어우야담'의 생강 장수처럼 전주 상인들에게 생강은 큰 자금줄이 되어 전국을 누비게 하였습니다.

'우서(迂書)'(1800년대 전반)에는 생강 상인들의 평양 판매를 두고 상판(商販)의 사리와 액세(額稅)의 규제를 논의하는 문답을 논하기도 했습니다.

허균(1569~1618)은 '도문대작(屠門大爵)'(1611)에서 ‘생강[薑]은 전주에서 나는 것이 좋고, 담양과 창평의 것이 다음이다’라고 했습니다.

'전주의 풍요로움 팔도에 드물고 토속 민풍이 서울과는 다르네. 추녀는 누런 머릿카락에 말아 올린 머리 삐딱하고 약삭빠른 녀석은 하얀 얼굴에 산뜻한 옷으로 갈아입었구나. 마을 사람들은 평량자(平凉子, 패랭이) 쓰기를 좋아하고, 가게에는 모두 백산자(白散子)가 놓여 있네. 생강 수염으로 만든 김치 절임은 그 맛이 일품이니 북쪽 객은 새 맛을 보고는 돌아갈 길 모르네'

이하곤(1677~1724)은 1722년 호남을 유람하며 쓴 '남행집(南行集)'에서는 '전주의 기름진 시냇가 밭엔 모두 생강을 심었는데, 생강으로 담근 김치(薑鬚作菹)의 맛이 좋아 나그네의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봉동생강의 명칭은 전북 전주군 봉상면 생강을 부르던 것에서 유래됐습니다. 봉동생강은 일제강점기 때 윤건중이 전북 완주군 낙평리 일대를 중심으로 봉상산업조합(鳳翔産業組合)을 결성하고 생강산업 확대와 생강의 고장 봉동읍을 전국에 알리기 시작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봉동[봉상]생강의 역사는 구비 전승되는 이야기와 문헌 기록을 통해서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봉실산 아래 은하리 일대 지석묘 아래에서 향초[생강] ‘시앙’이 자생했다는 내용입니다. 이서구, 기조 조선, 신만석 유래설 등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연구된 자료에 따르면 봉동 생강은 고려초 신만석이라는 사람이 중국 봉성현이라는 곳에서 생강뿌리를 얻어와 전남 나주와 황해도 봉산군에 심었다가 실패한 뒤, 다시 봉(鳳)자가 들어가는 지명을 찾아 지금의 완주군에 있는 봉상(鳳翔, 지금의 봉동)에서 재배에 성공한데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전라감사로 내려온 이서구(李書九)가 관내 순시를 위해 봉동(鳳東)읍까지 행차를 하여 이곳 봉실산(鳳實山)의 산세와 지형을 두루 살피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서구는 봉실산의 이름을 만덕산(萬德山)의 옛 기봉산리(基鳳山里)들판을 보고 이 근처에서는 장차 향기로운 풀(香草)이 자라 사람에게 큰 복을 주는 풀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합다. 그 뒤 과연 향내 나는 풀이 자라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봉동의 생강이 됩니다.(완주향토사료지)

문헌은 '태종실록'에 1414년(태종 14) 4월 19일에 ‘방간이 보낸 생강’이란 내용이 있습니다. 남행과 흔하지 않은 생강을 언급한 것은 전주부의 봉상생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심종에게 왜 생강을 주었나는 모르겠습니다. 이 생강으로 심종을 비롯하여 ‘회안대군 부자’ 불이익을 또 받았습니다.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悰)의 죄를 청하였으니, 심종이 지난해 가을에 어가(御駕)를 따라 남행(南幸)하였을 때에 몰래 방간(芳幹)의 보낸 생강(生薑)을 받고도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간·형조에서 회안군 부자의 죄를 청하였다"
태상왕(태조)의 부자애가 이렇습니다. 태종 1년 의자를 익주[익산]에 보내셨습니다.
"의자(醫者)가 익주(益州)에 와서 회안대군(懷安大君) 병을 치료하였는데 태상왕의 배려이었습니다. 행 전의감(行典醫監) 양홍달(楊弘達)이 익주에서 와서 태상왕께 아뢰기를, ‘회안대군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니 태상왕 사람을 시켜 임금에게 말하기를 “방간이 병들어 장차 죽게 되었으니, 급히 의자(醫者)를 보내라” 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화안대군의 전주생활입니다. 불리할 때와 좀 완화해 주는 대목마다 법과 혈육 간에 고뇌가 많은 듯합니다.

조선 최고의 생강 생산지역임과 동시에 1930년 한국 최초 생강조합인 봉상산업조합이 결성됐습니다. 이후 봉상생강은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주요 생산지인 봉상면과 인접한 우동면을 통합, ‘봉동면’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이후에는 봉동생강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봉동생강은 전통생강과 수입[중국]산 생강농업이 병행되고 있으며, 중국산은 주로 편강으로, 전통생강은 약재, 고급음식 등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2019년 ‘봉동생강 전통농업시스템’이 국가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됐습니다. 봉동생강 1, 000여 년의 유구한 재배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육즙이 많고 향이 강해 전국 최고 품질을 자랑합니다.

농업유산지정자문위원회 심의와 현장 조사를 거쳐 ‘완주생강 전통농업시스템’을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국가중요 농업유산이란 보전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해 국가가 지정한 농업유산입니다. 농업유산은 농업인이 해당 지역의 환경·사회·풍습 등에 적응하면서 오랫동안 형성시켜온 유·무형의 농업자원입니다.
봉동 생강은 한때 전국 생강의 60% 이상을 차지했고,‘생강굴’이라는 독특한 봉동의 생강 저장 시스템이 존재하는 등 오랫동안 형성시켜온 농업자원 중 보전할 가치가 있는 훌륭한 농업자원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전북지역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은 2017년 ‘부안 전통 양잠농업시스템’에 이어 2번째입니다. 전국에서는 2013년 전남 완도 청산도 ‘구들장 논’이 제1호로 지정된 이후 모두 13개로 늘었습니다.

‘완주생강 전통농업시스템’은 수확한 생강을 오랫동안 자연 보관할 수 있도록 땅을 파내 저장기능을 확보한 구조가 핵심으로 과학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점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저장방식으로는 온돌식 토굴, 수직 하강식, 수평 이동식 등이 있다. 현재 완주지역에는 봉동을 중심으로 온돌식 토굴 508개와 수직 강하식 초굴 336개, 수평식 토굴 21개 등 다양한 생강 저장굴 854개가 분포하고 있습니다.

온돌식 토굴은 집을 지을 때 땅속에 생강굴을 먼저 판 뒤 그 위에 구들장을 놓거나, 가옥을 건축한 뒤 구들장 밑으로 파 내려가는 방식으로 조성합니다.
이 경우 아궁이 열로 생강굴 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추운 겨울에도 동해와 부패로부터 종자를 잘 보존할 수 있습니다. 현재 봉동을 중심으로 완주 일대에서는 466개 농가가 111㏊에서 매년 1176t가량 생강을 생산하고 있으며, 20%가량은 이런 방식으로 보관 중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수직 하강식은 생강 재배지나 인근의 땅을 5∼8m가량 파 내려간 뒤 좌우에 저장공간을 확보하는 방식입니다. 수평 이동식은 이와 비슷하지만 경사지나 구릉지를 사방 1.5∼1.8m 크기로 파고 들어가는 데 차이가 있다. 두 방식 모두 온돌식 토굴보다 더 많은 양을 저장할 수 있는 게 특징입니다.

농식품부는 국가중요농업유산에 지정된 완주에 국비 10억을 지원하며 전북도와 완주군은 4억원을 보태 농업유산의 체계적인 정비와 브랜드 가치 증진, 농가 소득증진을 위한 연계사업 등에 활용할 계획입니다.

국가중요농업유산은 농업인이 지역환경과 사회·풍습 등에 적응하며 오랫동안 형성해온 유·무형의 농업자원 중 보전·전승할 가치가 있는 농업유산에 대해 인정하는 제대로 2013년부터 지정해 오고 있습니다.

완주군은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을 계기로 봉동생강 전통농업 보존과 농업 소득 증진에 힘써 옛 명성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