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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인문학 이야기] 만경강의 모래찜질과 춘포역


[인문학 이야기] 자연과 인간은 공생, 만경강의 모래찜질과 춘포역

예년보다 때 이른 더위가 찾아와 우리나라 곳곳을 달구는 요즘. 모래찜질로 뜨겁게 달궈진 몸은 해변에서 솟는 차가운 용천수로 식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만경강 춘포의 모래찜질 풍습은 호남지방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목련꽃 필 무렵 당신을 보내고(이복규 엮음)' 340쪽의 기록을 보면 이춘기(1906-1990)씨가 1963년 5월 31일 금요일자에 모래찜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음력 4월 20일은 모래찜질을 하는 날이다. 실은 오월 단오절에 찾는데 이앙기라 미리 앞당겨서 하는 모양이다. 과수원 일도 않고 여자 아이들이 모래사장에 간다고 하나도 오지 않았다.(중략) 술이 취해 곤드레가 되어 걸어가는 노친네도 있고, 허름한 차람에 얼굴에 먼지 뿌옇게 쓰고 가는 부인네들, 술취하지 안은 멀쩡한 남자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생긴 사람이 있을리 없지, 소풍 겸 나오는 판이지 대부분 촌부인들이다.’

만경강은 전북 익산의 먼 북동쪽인 완주군 원정산에서 발원하여, 고산천·전주천 등의 지류와 합쳐지면서 삼례를 거치고, 익산의 남쪽을 지나 서해(새만금)로 흘러가는 길이 약 80km의 큰 강줄기입니다.

모래가 많은 물줄기였는지 원래 모래 사(沙) 자를 써 '사수', '사탄' 등으로 불리던 것이 일제 강점기에 '만경강'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872년 군현도를 보면 사천진(沙川津)이 나옵니다. 익산시 춘포면 용연리에 위치한 포구이자 나루터 같습니다. 바로 사천까지 새우젓배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천진(沙川津)<사미르내나루<사미내나루<사내나루(사천진).
모래가 싸인 냇가라는 '모래내'가 사천(沙川)으로 문자화 되고 만경강도 예전에는 사수강(泗水江) 혹은 사미르강이었습니다.


삼복 더위에 강가나 바닷가의 뜨거운 모래 속에 몸을 묻고 땀을 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습니다. 이를 모살뜸·사욕(沙浴)·사증(沙蒸)이라고도 일컫습니다.

우리네 선조들은 모래사장에 구덩이를 만들고 들어가 겨드랑이, 사타구나,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까지 모래가 닿도록 한 뒤 햇볕을 가린 채 하루 2~3시간에서 4~6시간 동안 모래찜질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뜨거운 모래의 자극과 모래 속에 있는 유용한 균 덕분에 몸속의 노폐물이 제거돼 건강증진에 크게 도움이 됐습니다.

광복 이후에도 1960년대 ‘만경강 모래찜’이 유명하던 시절에는 하루 150~200명씩 익산 춘포역을 이용했고, 익산 지역에서 섬유산업이 발달한 1970년대에는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이 역을 통해 출퇴근하곤 했습니다.

1978년 철도통계연보에 기록된 1977년 실적을 보면, 그해 춘포역(대장역) 승하차 인원은 무려 29만9,022명.

전라선 전북 구간 21개 역(익산역 제외) 가운데 전주·남원·동이리(동익산)·덕진·오수·삼례역에 이어 7번째로 많은 인원이 이용했습니다. 같은 해 19만2078명이 이용한 관촌역이나 18만4839명이 이용한 임실역보다도 10만 명 이상 많은 기록입니다.

춘포역의 전성기는 1960~70년대였다. 전국 각지에서 만경강 모래찜질을 하러 춘포역을 통해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합니다.

한자어 춘포(春浦)를 풀어보면 우리말로 '봄 나루'입니다. 옛날엔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던 나루터 마을이었습니다. 이곳에 춘포역이 있습니다.

익산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선 모래찜질 하는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익산천의 위치가 예전에는 조금 아래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1960-1970년대 ‘만경강 모래찜’이 유명하던 시절에는 하루 150~200명씩 춘포역(당시엔 대장역으로 부름)을 이용했고, 1970년대에는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이 역을 통해 출퇴근하곤 했습니다.

춘포역에 열차 지붕 위까지 빼곡히 타고온 사람들이 내리면 역은 꽉 차고, 그들이 3km 정도되는 모래밭까지 가는 행렬은 성지를 가는 순례자의 행렬과 같이 장엄하기도 하고 모래찜에 의지해 뭔가 치유되기를 바라는 소망의 길이었까요?

당시로서는 모여드는 인파가 오히려 우리의 구경거리도 됐습니다. 또, 대보뚝 뚝방에 올라서 새강(만경강)과 모래 바탕을 바라보면 높은 산에 오른 정복감도 느꼈을 터입니다.

이곳 모래찜(沙蒸)은 음력 4월 20일 또는 단옷날, 만경강변에서 행해진 풍속입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모래사장에 가서 뜨거운 모래를 파헤쳐 구덩이를 만들어 한 시간쯤 볕에 쪼인 후, 그 속에 들어가 누우면 다른 사람이 모래를 덮어주었습니다.

그 속에서 30여 분 동안 누웠다가 일어나는 일을 두 세 사람이 도와가며 교대로 하게 되면 부스럼도 낫고 예방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춘기의 일기를 보면 건강만을 목적으로 삼은 풍속은 아니었습니다. 건강 도모를 명분으로 많은 사람들, 특히 부녀자들이 축제의 기회로 삼아 춘향제때 그네를 타고 담너머 세상을 보라보듯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지 않았을까요.

바로 이때 솥단지를 걸어놓고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친구들 중에 모래찜 구데기(자리) 팔아 아이스케끼(삼례 약대) 사먹던 이야기할 때는 1970년경으로 추정합니다.

1934년 6월 12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대장촌역(대장역)의 모래찜질을 즐기기 위해 호남은 물론 충청도, 경상도의 남녀노소가 인어떼가 몰려들어 장관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또, 1935년 6월 11일자 조선일보를 보면,
대장의 모래찜(사욕)과 전주 덕진 수역 등 2곳에 수만의 인파가 모였다고 기록됐습니다.

모래찜이 사라진 것은 ‘만경강제수문’이 생기고 난후 일이라는 주장이 많습니다.

만경강의 하상이 높아지면서 모래사장이 사라지면서 이 풍속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문화관광자원화로 살려낼 수는 없는 일인가요.

완주(삼례읍)와 익산(춘포면)의 경계를 지나면 익산천이 만경강에 합류합니다. 본격적인 익산 구간입니다. 탐조대에 오르면 만경강의 보다 더 너른 둔치를 담습니다. 무성한 풀들이 하중도를 집어삼켰습니다.

강의 생태가 복원되고 있다는 소식에 백사장 모래찜질의 날을 그려봅니다. 언제나 자연과 인간은 공생합니다.

http://www.sjbnews.com/news/news.php?code=li_news_2019&number=658750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304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