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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전주의 폐백 음식

친정어머니의 자존심 폐백이야말로 딸 가진 죄인에서 벗어나길[영화에서 음식을 맛보다] ■폐백

 송영애(전주대학교 식품산업연구소 연구교수) -

19금 영화가 아닌 이유


< 방자전>(The Servant, 2010). 방자(김주혁)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 알려진 춘향(조여정)과 몽룡(류승범)보다 방자의 역할이 크다. 그래서 ‘춘향전’이 아니라 ‘방자전’이다.
월매가 운영하는 청풍각에서 몽룡은 춘향이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반면 춘향의 마음은 방자 쪽으로 기운다. 향단이의 마음도 방자에게 있다. 몽룡은 양반 신분일지라도 인기는 없다. 영화 속에서는 춘향이와 몽룡, 향단이와 방자로 이어지는 짝꿍이 어긋나다 못해 얽혀져 간다.
방자는 몽룡에게 사사건건 무시만 당하는 신세다. 마음 상한 방자는 몽룡에게 복수하듯 춘향이의 마음을 먼저 사로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이때 마영감(오달수)이 등장한다. 마영감은 몽룡이 집에서 지내는 식객이다. 호색한 영감으로 이름이 나 있어 하인들은 모두 피해 다닌다. 방자는 마영감에게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스승으로 삼고 제자를 자초한다. 마영감 역시 연애의 기술을 숙맥인 방자에게 하나씩 전수해준다.
이성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러 기술이 나온다. ‘툭 기술’, ‘차게 굴기’, ‘은꼴편’, ‘뒤에서 보기’다. ‘툭 기술’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상대 여성을 방심시키는 기술이다. ‘차게 굴기’는 늘 따뜻하게 대해주다가 갑자기 차게 굴어서 상대방을 심란하게 만드는 작전이다. 요즘 말로는 ‘밀고 당기기’의 준말인 ‘밀당’과 같다. ‘은꼴편(은근히 꼴리는 편지)’은 야한 내용의 편지로 유혹하는 기술이다. 마영감이 전라도 한량 장판봉 선생으로부터 사사 받은 누구에게도 쉽게 알려주지 않는 비법들이다.

 

조연 역할을 주로 해왔지만 ‘천만 요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배우 오달수가 마영감으로 변신하였다. 능청스러운 연기가 더 흥미롭다.
마영감은 ‘연애 기술’만 가지고 있는 ‘연애 전문가’가 아니다. 식객으로 있으면서 몽룡이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음식을 준비한다. 청풍각의 술상에는 술과 함께 전, 적, 잡채, 수육, 신선로가 반짝이는 유기그릇에 담기고, 베이징 카오야(北京烤鸭)처럼 윤기 나게 구워진 돼지 뒷다리에 화려한 고명을 올려 들기도 힘든 큰 접시에 담겨 나온다. 그래도 눈길은 마영감이 만드는 음식에 간다. 문어 오림과 대추 고임, 백산자, 약과, 곶감, 밤이다. 모두 잔치 음식이며 이 중에서도 폐백음식이다.
마영감이 등장할 때마다 옛날 식도구까지 나온다. 체, 소쿠리, 가마솥, 유기그릇, 소반, 백자, 제기, 함지박, 절구 등이다. <방자전>은 식기와 주안상 그리고 폐백음식을 공부할 수 있는 음식 영화다. 특히 마영감이 긴 문어 다리에 칼로 문양을 촘촘히 새겨 넣어 꽃으로 만드는 장면은 비디오 영화처럼 되감아 볼 수 없어 아쉬울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를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전체 관람가, 12세 이상 관람가, 15세 이상 관람가, 청소년 관람불가, 제한상영가로 분류한다. <방자전>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영화로 일명 빨간색 영화다. 그러나 음식 전공자의 눈으로 본다면 분명 ‘전체 관람가’다. 아니, 교육방송이다.

폐백은 역시 ‘전주폐백’


옛날에는 혼례 날이 되어서야 신부가 신랑과 시부모님을 뵐 수 있었다. 이날 신부 집에서는 정성껏 마련한 음식으로 신부가 시부모님과 시댁의 여러 친척에게 첫인사를 드리게 되는데 이 예절이 폐백(幣帛)이다. 현구고례(見舅姑禮)라고도 한다.
폐백음식은 친정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시댁에서도 탈 없이 귀여움을 받으며 살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시댁 어른들께 솜씨를 보이는 상차림이다. 음식이 화려하고 다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성이다. 『예기(禮記)』에서도 “폐백은 반드시 정성을 다해야 한다.”라고 되어있다. 예와 정성을 다한 폐백을 올림으로써 신부는 완전히 시댁 사람이 된다.
폐백음식은 지방이나 집안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아무리 간소한 폐백음식을 차려낼지라도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이 있다. 육포와 밤, 대추다. 『오례의(五禮儀)』에서 “신부가 시가(媤家)로 가서 시부모를 뵐 때는 밤, 대추, 포를 드린다.”라고 하였다.

육포(肉脯)는 단수(腶修)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腶)’은 육포의 고기를 고르게 저며야 하는 까닭에 ‘한결같다.’, ‘수(修)’는 육포를 말릴 때 정성을 다해 뒤적여야 하므로 ‘정성을 다한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어머니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라는 의미로 시어머니 앞에 드린다. 시어머니도 ‘며느리의 부족함을 먼저 감싸주겠다.’라는 마음으로 앞에 놓인 육포에 손을 얹어 살며시 만져주어야 한다.
밤과 대추는 시아버지 앞에 드린다. 흔히 알고 있듯이 ‘다산’과 ‘장수’ 외에도 ‘어렵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살아가겠습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대추는 비바람이 세차게 불면 더 잘 여무는 특징이 있다. 부부의 연으로 만나 한평생 살아가는 데 있어 누구나 어려운 일은 겪기 마련이다. 이러한 어려움 앞에서 대추를 본보기로 모든 역경을 이겨나가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밤은 음이고, 대추는 양이다. 신랑과 신부가 치마폭에 받은 밤과 대추는 첫날밤에 함께 먹는다. 음식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어 육포와 밤, 대추가 빠진 폐백음식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깊은 의미가 있는 음식을 올리고도 친정어머니는 시집가는 딸이 서운하여 음식을 더하고 더했다. 곶감 오림, 약과, 강정, 엿, 구절판, 다식, 정과, 경단, 송편 등이다. 오징어 오림도 문어를 오려 만든 봉황으로 정성과 화려함을 더했다.
그 화려함은 우리 지역 전주에서 찾을 수 있다. 식재료가 풍부하고 손끝이 야무지기로 소문난 전주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전주폐백을 어느 지역에서나 으뜸으로 알아준다. 전주 며느리를 얻으면 시댁에서는 폐백음식에 은근히 기대도 한다.
2015년에는 폐백음식이 전주향토음식으로 추가 지정되었다. 폐백 명인도 있다. 따지고 보면 세계적으로 1호다.
전주다운 폐백음식을 찾자면 ‘지단 닭’이다. 닭을 찌고 그 위에 노른자와 흰자로 나누어 얇게 부친 지단을 예쁘게 올려 장식을 하면 된다. 그 이전에는 ‘한지 닭’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한지 닭은 한지를 모양내어 오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염색된 색이 음식에 스며든다는 문제로 서서히 사라져왔다. 20년 전부터는 지금의 ‘오징어 닭’이 유행처럼 번졌고, 다른 지역에서 생각하는 전주폐백이란 이 오징어 닭을 의미하게 되었다. 마른오징어를 손질하여 꽃 모양이나 깃털 모양으로 오려 닭 위에 올려준다. 보기에도 아까운 음식이다.
또 하나는 꽃사지다. 황색, 녹색, 청색, 홍색, 분홍색 한지를 접고 잘라서 화려하다. 가운데에는 솔잎에 꽂은 잣이나 은행을 함께 묶어 꽃 모양으로 만든다. 한지가 유명한 지역이라서 한지 닭과 함께 꽃사지도 전주를 대표하는 폐백음식이 되었다.

친정어머니의 자존심


옛날 폐백음식이야말로 혼인날이 잡히면 친정어머니가 하나씩 준비한 음식이었다. 지금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클릭으로 쉽게 살 수 있는 저가의 음식으로 변했다. 중국산 식재료에 음식을 담는 그릇 마저 작아졌다. 먹을 수 없는 플라스틱 모형물 같은 폐백음식도 있다. 싼 것이 비지떡이다.
폐백상에 수박 카빙, 팥 양갱, 과일 바구니, 떡 케이크 등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전통은 사라지고, 어설픈 퓨전만 남았다. 심지어 쿨한(?)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준다며 폐백을 생략하는 경우도 흔해졌다고 한다. 누구를 탓할 수 없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혼례문화의 현실이다. 그러나 폐백의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한다면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친정어머니로서 홀가분하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알고 보면 폐백음식이야말로 친정어머니의 자존심을 우뚝 세워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기도 하다. 더불어 시어머니까지도 말이다.
앞으로 친정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면 대추 고임과 육포부터 서서히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딸 가진 죄인’은 혼인을 앞둔 친정어머니들의 단골 푸념이다. 앞으로는 죄인이라 생각 말고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폐백의 예는 갖추어야 한다.
예(禮)는 몸은 조금 힘들지 몰라도 마음만은 편안하게 해주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송영애(전주대학교 식품산업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