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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설날의 '도소주'와 안중식의 '탑원도소회지도'

설날의 '도소주'와 안중식의 '탑원도소회지도'

언제나 새해 소망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옛 그림이 한 점 있습니다. 심전 안중식의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입니다.

어스름한 달밤에 누각 마루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술병을 앞에 두고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탁자 앞에 모여 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왠지 차분한 분위기입니다. 그 중 한 인물은 누각 너머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합니다. 주변을 보니 누각 옆으로 무성한 나무가 있고 뒤쪽으로는 수풀이 스잔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 너머에 하얀 탑 하나가 서 있습니다. 다만,상륜부가 보이지 않고 탑신과 지붕돌만 그려져 있습니다. 누각 주위는 안개가 몰려와 마치 호숫가에 정자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즐겁고 흥겨운 모임을 표현했다기보단 왠지 쓸쓸하고 조용한 분위기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누구일까요? 그 해답은 좌측 화제에 적혀 있습니다. 그림의 좌측 여백에 고졸한 예서체로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라고 화제(畵題)를 적은 후에 그 뒤로 간략하게 누구를 위해 어떤 장면을 그린 그림인지 적어놓았습니다.
화제의 내용으로 보면 1912년 정월초하루 밤에 위창 오세창의 집에서 열린 도소회 모임을 묘사한 그림으로 안중식 화가가 위창선생을 위해 붓을 든 그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도소회’라는 다소 생소한 명칭이 나오는데 ‘도소회’란 산초(山椒), 방풍(防風), 백출(白朮) 등의 한약재로 빚은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소주는 중국 후한시대 전설의 명의인 화타가 만들었다고도 전해지지만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도소주는 새해 첫날 차례를 마치고 온 가족이 모여 한 해 동안 건강과 악운을 떨치기를 바라며 함께 마시던 술입니다. 이름 그대로 도(屠)는 죽이다, 잡다의 뜻이고, 소(蘇)는 사악한 기운, 술 주(酒)자로 "사악한 기운을 잡는 술" 또는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술"이라는 뜻입니다.
도소주를 새해 첫날에 마시는 풍습은 한대부터 내려온 중국의 오랜 세시풍속이며, ‘동국세시기’의 정월편에도 세주(歲酒)의 기원으로 도소주를 언급하고 있을 만큼 조선후기 문사들에게도 잘 알려진 풍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소회에 참석한 인물들은 누구일까요? 먼저 집주인 오세창과 그림을 그린 안중식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오세창과 가장 가까웠던 인물들 손병희, 권동진과 최린, 그리고 평생 그림 벗인 조석진과 김응원, 무척 아끼던 후배 고희동 등이 참석했을 것입니다. 1919년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독립선언은 7년 전 바로 탑이 보이는 탑원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달빛 어스름한 정월 초하룻날 저녁, 어느 집 누각 마루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시대를 아파하며 자신들의 무능을 곱씹었던 지식인들이 있었습니다.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산수화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묻어나는 먹먹한 애잔함은 이 그림이 평범한 산수화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지식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요.

임인년(壬寅年) 새해와 설날에는 행운과 평안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