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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서정주와 음식 이야기

 

서정주시인과 음식 이야기

이종근

1.서정주시인과 양하(양해) 나물

미당 서정주시인은 1974년 4월 여성동아를 통해 '양하 나물'이란 글을 통해 전주와 정읍 언저리에서 생산되는 양하보다 더 맛있고 향기로운 것을 모른다고 했다. 그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한다.

'도둑 마음보를 가진 한 가족이 경치 좋은 깊은 산속 외딴 곳에서 구경 오는 나그네를 상대로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가지고 온 보따리를 털어서 그들을 잘살았다. 터는 방법은 뭐냐 하면 폭력이나 사기나 절도질이 아니라 맛 좋은 양하 나물을 잘해서 먹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맛이 너무나 좋아 나그네들은 거기 도취해서 온갖 걱정뿐 아니라 들고 온 보따리까지도 깡그리 그만 잊어버리고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의 겨울 기온엔 살아남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고 하면서 올해 만일 이것이 잘 자라 추석에 나물을 만들어서 술안주를 하게 되면 나는 무엇을 잊어버려야 할까를 생각해본다"고 했다.

다음은 '질마재신화'의 내용이다.

2.눈들 영감의 마른 명태

' 눈들 영감 마른 명태 자시듯'이란 말이 또 질마재 마을에 있는데요. 참, 용해요. 그 딴딴히 뼈다귀가 억센 명태를 어떻게 그렇게는 머리끝에서 꼬리끝까지 쬐금도 안 남기고 목구멍 속으로 모조리 다 우물거려 넘기시는지, 우아랫니 하나도 없는 여든 살짜리 늙은 할아버지가 정말 참 용해요. 하루 몇십리씩의 지게 소금장수인 이 집 손자가 꿈속의 어쩌다가의 떡처럼 한 마리씩 사다 주는 거니까 맛도 무척 좋을 테지만 그 사나운 뼈다귀들을 다 어떻게 속에다 따 담는지 그건 용해요.
이것도 아마 이 하늘 밑에서는 거의 없는 일일 테니 불가불 할 수없이 신화(神話)의 일종이겠읍죠? 그래서 그런지 아닌게아니라 이 영감의 머리에는 꼭 귀신의 것 같은 낡고 낡은 탕건이 하나 얹히어 있었습니다. 똥구녘ㅇ께는 얼마나 말라 째져 있었는지, 들여다보질 못해서 거까지는 모르지만······.

3.알묏집 개피떡

알뫼라는 마을에서 시집 와서 아무것도 없는 홀어미가 되어 버린 알묏댁은 보름사리 그뜩한 바닷물 우에 보름달이 뜰 무렵이면 행실이 궂어져서 서방질을 한다는 소문이 퍼져, 마을 사람들은 그네에게서 외면을 하고 지냈습니다만, 하늘에 달이 없는 그믐께에는 사정은 그와 아주 딴판이 되었습니다.
음(陰) 스무날 무렵부터 다음 달 열흘까지 그네가 만든 개피떡 광주리를 안고 마을을 돌며 팔러 다닐 때에는 「떡맛하고 떡 맵시사 역시 알묏집네를 당할 사람이 없지」모두 다 흡족해서, 기름기로 번지레한 그네 눈망울과 머리털과 손 끝을 보며 찬양하였습니다. 손가락을 식칼로 잘라 흐르는 피로 죽어가는 남편의 목을 추기었다는 이 마을 제일의 열녀(烈女) 할머니도 그건 그랬습니다.
달 좋은 보름 동안은 외면(外面)당했다가도 달 안 좋은 보름 동안은 또 그렇게 이해(理解)되는 것이었지요.
앞니가 분명히 한 개 빠져서까지 그네는 달 안 좋은 보름 동안을 떡 장사를 다녔는데, 그 동안엔 어떻게나 이빨을 희게 잘 닦는 것인지, 앞니 한 개 없는 것도 아무 상관없이 달 좋은 보름 동안의 연애(戀愛)의 소문은 여전히 마을에 파다하였습니다.
방 한 개 부엌 한 개의 그네 집을 마을 사람들은 속속들이 다 잘 알지만, 별다른 연장도 없었던 것인데, 무슨 딴손이 있어서 그 개피떡은 누구 눈에나 들도록 그리도 이뿌게 했던 것인지, 머리털이나 눈은 또 어떻게 늘 그렇게 깨끗하게 번즈레하게 이뿌게 해낸 것인지 참 묘한 일이었습니다.


고창군 부안면 중흥리엔 알뫼장터가 있었다 .예전에 중흥리 알뫼장터에서 음력 정월 초사흘에 당산나무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냈다. 하지만 지금은 당산나무도 없고 당산제도 지내지 않는다.
한국의 근현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창 지역 민간신앙의 하나인 마을 제사의 변천과 소멸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중흥리 알뫼장터에는 알처럼 생긴 산이 있어 알뫼, 알메, 알미라 했다.
예전에는 큰 장이 섰는데 지금은 매월 5일과 10일 닷새 간격으로 장이 섰다. 장터 동쪽 입구 양조장 옆에 높이 10m, 둘레 2m 정도 되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마을을 수호하는 신목(神木)으로 당산이라 불렀다.
당산나무에 제사를 지내면 동네가 잘 되고 어린아이들의 잔병도 막을 수 있다고 해서 당산제를 지냈다. 40여 년 전 즈음에 도로를 내면서 없어졌고, 그 후 20년 정도 지나 새로 당산나무를 심어 가꾸다가 어느 해에 태풍이 불어 쓰러져버린 뒤 미관상 좋지 않아 깨끗이 잘라버리는 바람에 지금은 흔적도 없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진행될 때 도로 정비와 미신 타파로 인해 마을의 당산나무가 없어졌다. 노인들에게도 어렴풋한 기억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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