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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선교사들이 가져온 감자와 과일

자유무역협정(FTA) 등 수입 개방에 밀려든 농산물이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며 도시 소비자들의 수입 농산물에 대한 거부감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내놓은 '농업·농촌에 대한 2020년 국민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수입 농산물에 대한 인식에서 도시민의 49.2%'별다른 거부 반응이 없다'고 응답했다. 이는 201538.6%에 견줘 10.6% 포인트(p) 증가한 수치다. 같은기간 '수입 농산물에 대해 인식은 좋지 않지만 가격이 저렴해 구매한다'는 응답은 25.7%에서 17.3%로 떨어졌다. 상당수 도시민이 수입 농산물에 대해 거부감이 없고 거리낌없이 구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과, 감자, 딸기를 국내에 보급한 사람이 선교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대구 청라(靑蘿) 언덕은 기독교 역사가 묻어있는 곳이다. 박태준이 작곡하고, 이은상이 작시한 동무생각의 가사를 통해서 많이 알려졌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아와 그 시비 앞에서 '동무생각'을 합창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대구시에서는 골목투어의 한 곳으로 정했으며 이 언덕은 꽤나 유명한 곳이 되었다.

그러나 청라라는 말은 푸른 담쟁이 넝쿨을 의미한다. 황무지와 같은 땅에 선교사들이 심은 청라가 무성했던가 보다.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대구 경북 복음화의 산실이라는 점이다. 이 언덕은 대구선교의 3인방인 미북장로교 선교사 아담스, 존스, 브루언 등 세 사람이 언덕에 서서 대구읍성을 바라보며 다윗의 망대가 서있는 예루살렘 같다고 외쳤다고 한다.

미국에서 온 아담스(James E. Adams, 1896-1923, 한국명 안의와), 존슨(Dr. Woodbridge Odlin Johnson, 1898-1913, 한국명 차인차), 브루언(Rev. Henry M. Bruen, 1899-1944, 한국명 부해리) 선교사는 영남지역의 복음화의 선두 주자였다. 이들에 의해 대구를 중심한 영남지방에 교회가 설립되고 서양식 병원과 학교가 세워지는 등 한국 개화기를 이끌어간 선구자들이다.

대구 중구 계명대 동산의료원 구 의료선교사 사택에는 지금도 3세목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존슨이 미국에서 사과나무 묘목 3종류 72그루를 가져다 심은 것이 대구를 사과의 주산지로 만들었다. 선교사들은 사과묘목을 농가에 나누는 일을 했는가보다. 이로 인해 대구가 사과의 고장이 됐다.

200010월에 역사성과 상징성을 감안해 대구시 보호수 1호로 지정하게 된다. 하지만 미조리는 품종이라기 보다는 지역을 대표하는 것이라서 나무의 품종을 정확히는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과나무 100이라는 안내 표시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학명 : Malus domestica BORKH, 여기에 뿌리내린 이 사과나무는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미국에서 들여온 한국 최초 서양 사과나무의 자손목으로서 동산의료원 역사를 말할 뿐 아니라 대구를 사과의 도시로 만든 의미 있는 생명체이다. 초대 병원장인 존슨박사가 미국 의료선교사로 동산병원에 재임하면서 미국 미조리주에 있는 사과나무를 주문하여 이곳에서 재배한 것이 서양 사과나무의 효시이다' 라고 되어있다.

 

이걸 보고 가는 중이요. 동쪽으로. 해가 뜨는 곳으로. 불꽃 속으로.”(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에서)

 

서슬 퍼런 헌병대장이 서양인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변명도 공박도 다 소용 없었다. 자신을 선교사이자 학교 교장이라고 밝힌 사내의 요구는 딱 하나, ‘내 학생들을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그 요구가 관철되기 전까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을 듯 느껴지는 기색이었다.

이들은 조선인이지만 동시에 미국북장로교 소속 학생들이오. 그런 학생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한데 대해 나는 우리 정부에 보고하겠소. 폐교를 운운한 당신의 망언도 함께 말이오. 당장 풀어주시오. 이 아이들은 치료가 필요합니다

아담스는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온 지 12년째, 그는 일제에 모든 것을 빼앗긴 이 땅의 백성들과 울분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캔자스주에서 사괴 묘목을 들여와 대구의 정원에 심었다고 한다. 존슨은 그냥 묘목을 심었다면 애덤스는 미국산 사과나무 가지를잘라 조선의 토종 능금나무에다가 접붙임을 했다고 전한다. 미국에서 들여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정성껏 키운 사과 또한 대구능금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을 먹여 살리는 지역의 대표 산물이자, 일제의 경제침탈에 맞선 물산장려운동의 보배 역할을 했다.

능금은 임금(林檎)’에서 유래된 것으로 임금()과 발음이 같은 상서로운 과일로 생각되어 조선의 태조는 능금(임금) 재배를 장려했다. 효종 때 인평대군이 청나라로부터 사과를 도입(1658년 경)하면서 역관(譯官)이 작은 과실인 사과(沙果)를 큰 과실인 능금(林檎)으로 오인한 때문에 능금에서 사과로 유래가 바뀌었다고 한다.

사과를 글자대로 풀면 모래같은 과일이라는 뜻이 된다. 모래 사자가 쓰였을까. 사과속과 사과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잘 보면 사과속은 모래알 입자를 지니고 있다색깔도 비슷하다. 그리고 사과에서는 즙이 많이 나온다. 이를 담아낼 수 있는 한자가 모래사자다. ‘모래사자는 작을 소()와 물수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자 자체에 모래입자와 물기의 뜻이 들어 있다사과의 사촌은 능금이다역시 한자에서 왔다수풀림’()날짐승 금’() 자를 썼다중세이름은 한자 그대로 림금이었다풀어쓰면 맛이 달아 뭇새들이 숲으로 모여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림금닝금을 거쳐 능금이 됐다

독일 선교사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 중국명은 곽실렵(郭實獵)1832717일 한국 몽금포를 방문해 한 달여 남짓 머물렀다. 30일에 서양에서 감자를 처음 들여와 백성들의 구황식품으로 배고픔의 고통을 덜어주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담그는 방법도 전수했다.

1832730일 일기에는 "우리는 감자를 심으러 가서 밭에 감자를 심고, 성공적인 감자 재배 방법에 대하여 필요한 내용을 글로 써주고 파종했다. 그러나 이 같은 유익한 선행마저도 처음에는 주민들이 완강하게 거부했다. 이 나라 국법에 어떤 외국 농작물의 수입도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거부 행위에 개의치 아니하고 '혁신이 있어야 수익이 있다'라고 그들이 수긍할 때까지 열심히 설명하자 말없이 승복했다"고 기록됐다.

암허스트허 함장 린제이의 기록을 보면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좋은 땅을 선정해 100개가 넘는 감자를 심었다. 수백 명의 주민이 둘러서서 놀라운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중략)조선의 토양과 기후는 감자 재배에 매우 적합해 보였다'고 나온다.

넬리 랭킨(N. B. Rankin, 1879~1911, 한국명 나은희)선교사는 전주 기전 여학교 2대 교장으로 사역했고, 전주 서문교회 주일 학교에서 여학생 대상으로 성경교육을 가르쳤다.

그는 1879년 미국 조지아 주 사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장로인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면서 아그네스 스캇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19072월 남 장로교 교육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녀의 나이 28세에 독신으로 내한한 것이다. 그녀는 내한 후 전주 선교부에 소속되어, 기전 여학교 2대 교장으로 헌신했다. 학교 건물을 세우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 1910년 완공했고 전킨 기념학교로 명명했다.

 

녀는 여학생을 가르치는 것에 기뻐했고, 한국에서 사는 것에 후회없이 평생 살려는 마음을 가졌다. 또한 한국인들이 개화에 늦은 것을 안타깝게 여겼기에 일제의 침략에 매우 안타까워 하였다.

그녀는 전주 서문교회에 소녀 주일 학교를 개설하고 성경을 가르쳤다. 1908년에는 400여명이 주일학교에 참석하였고, 1910년에는 다니엘 선교사와 협력해 불신자 주일학교를 개설하여 복음을 전했다. 그녀는 한국 어린이를 딸로 입양했고, 한국의 전원생활을 좋아해 정원 꾸미기와 텃밭 가꾸기를 즐겨 했다. 말타기를 좋아해 119km를 단숨에 달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녀는 19118월 급성 맹장염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했다. 그녀는 숨을 거두면서 '내가 한국에서 일하면서 가졌던 즐거움을 생각하면 내 목숨을 몇 번이고 기꺼이 바치겠다'고 유언처럼 말했다.

그녀의 시신은 전주 선교사 묘지에 안장됐다. 한국에서 4년 반 사역하면서 50통의 편지를 남겼다. 소천하기 10일 전에도 미국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녀의 편지에는 한국 사랑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고 당시 전주지역의 생활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전주기전여중고는 개교 백 주년인 2001년 그녀의 일기를 모아 '사랑을 심은 사람들' 제목으로 책을 발간했다.

딸기도입에 대하여 기전여학교의 설립자 랭킨은 딸기는 조선에 자라는 토종이 아니며, 잉골드(Mattie Ingold,1868~1962)가 들여와 전국으로 확산했다고 했다.

 

While the strawberry is not native here. Mrs. Tate ordered fifty about two years ago and has not only supplied our station with plants but practically the whole mission.(1907. 5. 27)

 

랭킨의 기록에 의하면 '1907527일 잉골드가 수확한 딸기를 잉골드가 거의 5갤런이나 가져와 나는 학생들을 딸기 잔치에 초대하니 즐거워했다고 했다. 딸기를 심은 자리는 전주 화산동이었다. 잉골드는 자신의 텃밭에 딸기를 비롯, 토마토, 고추 등을 심어 기르는 전원생활을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

실제로 신흥중고등학교에 딸기밭이 있었다고 전한다.

군산출신 서양화가 이동근의 그림엔 딸기, 포도 등 다채로운 소재들이 등장한다. 그림과 사진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은 노동집약적인 작가의 손맛이 그대로 전해진다.

빨간 딸기가 그려진 그림이 한 점보인다. 침샘을 자극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꽃잎이 다섯 장인 딸기 꽃이 소박하게 피었다가 지고 나면 300개가 넘는 씨앗이 알알이 박힌 탐스런 딸기 열매가 열린다. 한 광주리 가득 잘 익은 딸기만을 골라 담은 그림으로 그 맛이 꿀맛임을 잘 보여준다.

이번 조사는 가격이 비싸도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구입하겠다는 소비자 충성도는 갈수록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과거의 선교사들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글 이종근, 그림 이동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