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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종근의 행복산책2]무(무우)


‘바람은 자도 꽃은 떨어지고 새소리에 산은 더욱 그윽하다. 새벽은 흰구름과 더불어 밝아오고 달은 물 속에서 흘러간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도 보이지 않아 짚신이 다 닳도록 온 산을 헤매였네. 봄 찾는 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니 울타리의 매화나무에 꽃 한송이 피어 있네’



순천 송광사 종고루 근처에 새겨진 옛 사람이 쓴 선시가 생각나는 이성재화백의 그림엔 소쿠리 가득 고추며 양파며, 노란 새순이 돋아나는 무(무우) 등 생명붙이들의 찬란한 함성이 배어나오고 있습니다. 잘 나가던 사업을 정리하고 화가가 되겠다고 허허벌판에 나서 얼마나 된서리를 맞았을까요. 그래서 일까요, 이때 그린 무 그림을 보면 아주 강한 기운과 집념의 파동이 겹겹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화가는 알았을 터입니다. 껍질 속 구석구석 틈새마다 꼭꼭 채워진 땅속 호두의 튼실한 만족을. 흙 알갱이 속에서 자란 굼뱅이가 땅 속에서 7년의 세월을 견뎌낸 후, 매미로 태어나 여름 한나절을 읊조린다는 사실을. 숨어우는 새의 더욱 고운 목소리는 자신의 어둠을 훼치고 빛을 발하기 까지는 선한 모습의 멜로디 라는 사실을.

동태찜에 들어가는 미더덕이 목구멍에서 터질 때 느끼는 짜릿한 쾌감처럼 말입니다. 봄은 이처럼 간난신고를 모두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므로, 한 발 한 발 시나브로 아주 천천히 오는 것인지도 몰라요.

한 없이 낮아져 풀잎에 부는 바람처럼, 머리를 잠시 스쳐 지나가는 구름처럼, 숲을 지켜주며 졸졸졸 흐르는 옹달샘처럼 시린 영혼에 희망과 소망을 던져주면서 말입니다.

1999년에 태동한 모 기관의 분원장을 최근들어 후배 교수에게 물려주고 자리를 흔쾌히 내놓은 저의 은사님, 이제 완전한 자유를 찾게 됐으니 참 부럽습니다. ‘가을 무 꽁지가 길면 겨울이 춥다’고 해서 준비한 긴 뿌리, 이제, 세상의 빛이 되었군요.

오늘은 삶을 살아가면서 고요 속에 잠겨 있을 때가 약이 된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사랑에 젖고 또 젖으면서 겨울 햇살에 비추인 은빛 햇살을 벗삼았던 지난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까닭입니다.

겨울의 옹달샘이지만 항상 가을 햇살의 따뜻함이 물에 담겨 있으므로 어쩌면 봄의 찬가는 미리 예정된 것일지도 몰라요. 흐르는 물이 썩지 않아 이제 봄이런가요. 새순이 막 나고 있는 무처럼, 온기를 갖고 만물을 보호하는 만물의 어머니 땅같은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 소중한 당신, 그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바람막이와 방패막이를 해주는 여러분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이 봄은 바로 ‘당신 때문에’가 아닌, ‘당신 덕분’에 오고 있는 것이로군요. 많이 많이 아주 많이 감사합니다. 이제, 인생의 가장 값진 것은 당신으로 인해 제 자리만 찾을 일만 남았는가요. 모든 것을 잃어도 정신을 잊는 것은 전부를 버리는 것이란 사실을 무 그림을 통해 비로소 배우고 느꼈습니다.

저의 새순, 더도 덜도 말고 희망의 파란 싹 하루에 한뼘씩만 자라도록 노력 하리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가져도 저의 나태한 정신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되는군요.

운명은 분수에 맞춰 개척하는 것, 주어진 환경 탓일랑 고이 접어 저 강물에 띄워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는 그날이 바로 그날이 오늘이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인간사, 말이 필요 없어 ‘무(無)’인가요. 먼 옛날 굴뚝 밑에 묻어 놓았던 옥빛 구슬이 지금도 빛나고 있는지 찾으러 이제 막 길손되어 그 여정. 마실가는 기분으로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