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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74> 유학자 엄명섭, 붕어탕으로 장풍 낫다

 



술로 장풍이 났는데 붕어탕 한 그릇을 먹고서 큰 효과를 봤기에 절구 한 수를 지어 잊지 못할 마음을 부침 

경와 엄명섭

기질 병약한 이 몸은 병 또한 많아
늘 약물을 찾고 필요할 때가 많네
내 장풍의 피 낫게 한 그대에게 감동했으니
한자 넘는 가는 비늘이 효과는 참 많구나

 이 시는 1955년 3월 21일 경와 엄명섭선생이 지었다. 붕어탕은 부어탕(鮒魚湯)으로 나온다.
 장풍(腸風)은 변혈을 주증으로 하는 치질 질환으로
 선혈후변(先血後便)하며 혈색은 선홍색인 것이 특징적이다. 그런데 붕어탕을 먹고 효염을 보았다는 시가 이색적이다.
붕어·메기·쏘가리는 찬바람 불면 ‘제 맛’이다.
긴팔 옷을 입지 않으면 안되는 계절이 왔다. 찬 기운이 돌 때, 민물에서 잡은 고기에다 여러 가지 양념을 넣고 바글바글 끓이면서 소주 한잔을 곁들여 먹는 민물 매운탕은 맛이 일품이다.
민물매운탕에 쓰이는 민물고기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붕어는 흔히 매운탕 재료로 많이 쓰인다. 붕어요리는 탕 뿐 만아니라 찜, 조림, 회, 죽으로도 많이 이용한다.
붕어는 잉어의 사촌격이다. 생김새가 잉어와 흡사하나 몸집이 작고 수염이 없으며 몸길이는 주로 10~20cm 정도이나 간혹 40cm가 넘는 것도 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호서의 제천현(堤川縣)의림지(義林池) 붕어는 먹으면 비린 맛이 없고 맛도 제일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며, 호남 전주부(全州府) 삼례역(參禮驛) 붕어찜(鮒魚蒸)도 유명하며, 또 관서의 평양부(平壤府) 붕어찜과 의주부(義州府) 붕어 반찬은 전국에서 제일이라 한다''고 했다.
또 서유구의 '전어지'엔 "흐르는 물에 사는 붕어는 등의 비늘이 노랗고 맛이 좋지만 연못이나 늪에 사는 것은 등이 검고 맛이 떨어진다"고 했다.
한방에서는 붕어가 오장을 튼튼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본초강목'에서는 "여러 생선이 모두 화(火)에 속하지만 오직 붕어는 토(土)에 속하기 때문에 비위를 고르게 하고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한다"고 적었다. 또한 '동의보감'에는 "위를 다스리고 오장을 이롭게 하며 속을 조절하고 기운이 떨어지는 것을 막으며, 설사를 멈추게 할 뿐만 아니라 붕어의 알은 뱃속을 안정시키고 간의 기력을 더해 준다"고 기록돼 있다.
서유구의 '임원십육지'에는 "치질을 고치고 여러 가지 부스럼을 고치게 하며 회로 먹으면 다리의 풍이나 흥분을 가라앉힌다"고 소개돼 있다.
붕어죽은 붕어를 푹 고아서 체로 거른 뒤에 그 국물에 쌀과 생강, 소금 등을 넣은 죽이다. 이 죽은 노약자와 만성질환으로 몸이 허약해진 환자의 보신 식품으로 매우 좋다.
본초서에 보면 ‘붕어는 맛이 달고 성질은 따뜻하다. 
모든 물고기는 오행 중 화에 속하나 붕어만 유독 토에 속한다. 토는 능히 수를 제압하므로 위를 조화롭게 하며 장을 실하게 하는 공이 있다. 위가 허약하여 소화가 되지 않는 노약자의 경우 배추나 무 잎 말린 실가리로 탕을 끓여 먹으면 위를 건강하게 만든다.
붕어를 먹을 때는 맥문동이 들어 있는 한약이나 겨자, 설탕, 돼지 간을 함께 먹으면 안된다’라고 했다. 
민물매운탕의 재료 중 하나가 메기다. 메기는 미끈미끈한 타액이 많으며 이 타액은 소갈병을 치료한다.
본초서(本草書)에 ‘메기는 부종을 내리게 하고 소변을 잘 통하게 한다’라고 했다. 따라서 메기탕은 복막염이나 수족, 안면이 붓는 부종을 치료한다. 고방에는 중풍으로 입이 돌아간데 메기껍질을 붙이면 즉시 정상으로 돌아서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산후에 기혈이 부족하고 젖이 잘 나오지 않을 때에도 효과가 있다. 산후 젖이 부족할 때에는 메기 한 마리를 푹 고아서 국물을 낸 후 계란을 풀고 소금과 생강으로 간하여 먹으면 좋다. 이 국물은 산후 젖 부족만이 아니라 소변을 잘 통하게 하고 몸의 붓기를 빼는 데도 좋다.
쏘가리탕의 쏘가리는 궐어, 금린어라고 한다. 쏘가리는 허로한 몸을 보하고 비위의 기능을 활성화시킨다. 장풍사혈을 치료하고 뱃속의 충을 죽이며 기력을 돋워 준다. 쏘가리 쓸개는 물고기 뼈가 목구멍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 것을 치료한다.

근대 유학자 경와(敬窩) 엄명섭(嚴命涉, 1906∼2003)은 곡성, 장수, 전주 등 전북도 일대에서 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유학을 잇는 스승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훗날 문집으로 간행하기 위해 자신의 글을 각종 문체별로 손수 적어 정리했는데, 바로 이 책의 저본이 되는 '경와사고(敬窩私稿)'다.
그는 일제강점기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현대까지 유학의 이념과 가치를 올곧게 지키며 학문을 닦은 도학자였다.
1906년 아버지 엄주용(嚴鑄容 1871~1932)과 어머니 충주지씨(忠州池氏) 지용재(池龍載)의 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전남 옥과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율곡(栗谷) 이이 선생과 간재(艮齋) 전우선생을 사숙했고, 해방 후 학문이 완성 되어가는 불혹에 전주 옥류동(玉流洞)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금재(欽齋) 최병심 선생을 찾아가 예를 올리고 가르침을 청했다.
그 후 1960년대 장수군 번암면 대성산방(大聖山房), 1970년~80년대 전주향교 명륜당과 동재, 1990년대 전주 송천동에서 송천서사(松川書舍), 우가재(尤可齋)에서 교학 활동을 했다.
2000년 다시 전주향교에서 두어 해를 머무르며 초학을 지도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2003년 98세의 일기로 교학을 마쳤다.
선생은 '공교막부(孔敎莫負)' 네 글자를 사명으로 삼고, 항상 '사무사 무불경(思無邪 無不敬=생각함에 사특함이 없고, 공경치 아니함이 없다)' 여섯 글자는 몸에 가까운 벽에 걸어 놓고 일상에서 실천했다. 필자는1980년대에 전주향교에서 선생을 여러 번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