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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71>추사 김정희의 가장 위대한 반찬

명문가에서 태어나 관직과 유배를 되풀이했던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만년에 가장 큰 즐거움을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이라고 했다.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채소이고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와 함께 한다'

명절이야말로 비교와 평가를 잠시 꺼두고 또 한 해를 무탈하게 버텨 낼 기운을 얻는 시간이다. 괴로움과 즐거움 모두를 가족이니까 함께할 수 있다. 조상을 핑계 삼아 웃고 떠들고 시끌벅적해도 마냥 좋은 날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가시밭길 생의 하루하루를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가 어린이 글씨처럼 쓴 ‘대팽두부(大烹豆腐)’ 대련이었다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

한자를 해석하면 이렇다

'가장 위대한 반찬은 두부·오이·생강(원서엔 가지)·나물이고,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손자가 함께하는 것'

이 글귀는 명나라가 망할 때 신하였던 오동리(吳東里)가 쓴 시 ‘중추가연(中秋家宴)’의 경련(頸聯; 8구 형식의 한시에서 5~6구)에 ‘大烹豆腐瓜茄菜, 高會荊妻兒女孫(좋은 음식은 두부 오이 가지 나물/훌륭한 모임은 아내 아들딸 손자)‘라는 대구를 살짝 바꿔 쓴 것으로 추정한다.

이 ‘대팽고회(大烹高會)’의 예서체 대련은 봉은사의 판전과 함께 추사가 칠십일과 시절에 쓴 명작이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대팽과 고회,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협서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
雖腰間斗大黃金印
食前方丈
侍妾數百
能享有此味者畿人
-爲古農書. 七十一果​.

'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 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한 말(斗)만한 큰 황금인을 차고,​
밥 앞에 시중을 드는 여인들이 수백 명 있다 해도
능히 이런 맛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고농을 위해 쓴다. 71살의 과천노인​'

소박한 밥상과 사랑하는 가족이 그가 71세에 얻은 명제이다. 굳이 대련의 뜻을 설명한 것은 간절한 마음 때문 아닐까.
추사 만년의 따뜻한 인간미가 묻어나는 명구이다.
김정희는 1840년 55세로 유배를 왔다.
'위리안치'라는 형벌을 받았고 지금의 가택연금과 같은형벌로 누가 찾아와주지 않은 낮과 밤의 생활동안 외롭고 가혹함속에 그림,문학을 발전시켰다.

​척박한 제주 대정읍 안의 시골의 고립된 곳에서의 생활은 가족들이 보내주는 생필품과 음식도 있었지만 제주도까지 도착하면 많은 음식이 상해서 먹을수 있는것은 젓갈등 남은 것들로의 끼니를 때웠고 실제로 젓갈은 자주 드셨다고 기록되어있다.

당시  유배인의 신분이 낮은경우는 직접 집과 음식을 마련해야 했고, 명망있는 유배인은 유배인을 관리하는 보수주인이 있어 음식의 재료만은 구할수 있었지만 그래도 스스로 해서 먹어야했던 생활의 기록이 있다.

유배지와 바다가 가까운 곳이라 재료를 얻었 터이다.

따개비 같은 고둥, 바위에 붙은 생물따위 낚시하여 잡은 생선과 겨우 얻은 소금으로 만든 생선조림, 방풍나물(갯방풍), 감자, 고구마,옥수수, 보리와같은 곡물에 끓인 나물죽으로 한번의 끼니를 버텼다.

1848년 12월 6일 죄인 추사 김정희는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어 유배지 제주도를 떠나게 된다. 그 무렵 나폴레옹은 프랑스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1848년은 반동적인 통치에 대한 광범위하고 점증하는 불만이 유럽에서 혁명의 물결을 고조시키던 해였다.

제주도를 떠나는 추사의 나이는 63세.

8년 3개월의 제주도 귀양살이가 비로소 끝난 것이다. 이 상황을 조선왕조실록은 ‘하교하기를 이목연, 조병현, 김정희를 석방하라 하였다(敎曰李穆淵趙秉鉉金正喜放)’라고 간단히 전하고 있다.

추사가 풀려난 표면적인 이유는 여섯 가지 경사 때문이었다.

대왕대비 육순, 왕대비 망오(望五), 순종 추상존호(追上尊號), 대왕대비 가상존호(加上尊號), 익종 추상존호, 왕대비 가상존호가 그것이다.

망오란 임금과 왕후, 왕대비가 쉰이 되기 이삼년 전에 베풀던 경축연을 말한다. 가상존호는 앞의 임금이나 왕후의 덕을 기리기 위해 붙이는 칭호인 존호를 나중에 올리는 일이며, 임금이나 왕후의 존호에 다시 더 존호를 붙이던 일이 바로 추상존호다.

이 덕에 추사가 풀려나긴 했지만 사실은 배후에서 친구 조인영과 권돈인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결코 가능치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다 신헌, 허련, 조희룡 같은 제자들도 헌종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최선을 다해주었다.

추사가 석방 소식을 접한 건 12월 19일이었다.
석방 소식을 접하자마자 “7일 이내에 10년 묵은 온갖 잡다한 일을 다 처리했다”고 했을 만큼 서둘러 살림을 정리했다. 마음이 급했을 것이다.

추사는 짐 목록인 물목(物目)을 4개 만들어 꾸린 살림들을 일일이 기록했다.

첫째 물목과 둘째 물목에는 가죽 농에 담은 것을 적었다.
셋째 물목에는 싸리나무 상자에 담은 것을, 넷째 물목에는 별도로 음식물을 담은 항아리들을 적었다.

첫째 물목에는 책, 둘째 물목에는 책과 공책 그리고 종이, 셋째 물목에는 책, 향, 초, 먹, 병풍 등이 빼곡 적혀 있다. 추사의 꼼꼼하고도 깔끔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특기할 만 것은 물목 앞부분에 “의복은 두 상자에 나누어 담았으며 별도로 언문이 들어 있다”라고 적혀 있다.
맨 나중 물목 끝에는 “민석어 봉지 하나”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예산에서 온 것이기에”라고 적혀 있다.

별도의 언문은 부인에게 썼던 편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부인은 추사의 귀양살이가 한창이던 헌종8년(1842) 11월 13일에 눈을 감았으니 편지는 6년 넘게 보관했던 셈이다. 버리지 않고 갈무리해둔 정성이 애틋하다.

추사가 유배지 대정 땅을 떠난 것은 다음 해 1월 7일이었다.

서러운 땅, 대정. 가슴에 슬픈 칼을 품고 이 땅을 밟던 것이 언제쯤이었던지 기억이 감감했을 것이다.

대정을 뒤로하여 도착한 곳은 화북으로 그가 제주도에 들어올 때 처음 발을 내렸던 포구다. 그때 그는 필히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다시 그 곳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두 번째 서신이 온 뒤로는 예전 처소에 더 이상 오래 머물 수가 없어서 속히 돌아갈 행장을 꾸리는데 애들의 정성스럽고 자상한 보살핌과 철규의 부지런한 주선으로 7일 이내에 10년 묵은 온갖 잡다한 일을 다 처리했다네. 그리하여 이 달 7일에는 대정에서 출발하여 본주로 향하다가 본주 아래 김리(金吏)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지금은 포구로 내려와 순항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정한 계획이 없네”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추사는 특별히 찾아온 장인식 제주목사와 석별의 정을 나눈다. 장인식 목사야말로 추사에게 매달 물품(月惠)을 보내주면서 귀양살이에 큰 도움을 준 고마운 조력자였다.

바닷바람이 거칠었던지 순항을 비는 제문을 지어 해신사에도 올린다. 바람이 거칠지 않았더라도 제주바다를 탈 없이 건너가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추사로서 신의 힘을 외면할리 만무했다.

해신사는 제주목사 한상묵이 해상 왕래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1820년경부터 ‘해신지위(海神之位)’를 모셔놓고 해상의 안전과 수복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현재 제주도 지방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어 화북 포구 한 쪽을 지키고 있다.

제문을 읽어보자.

'남해신에 올리는 제문(祭南海神文)

높은 사람 바다를 지나니 온갖 신이 영을 드날리어 해약이라 천오마저 모두 다 인에 길들었네. 하찮은 이 몸 가고 오매 왕령을 의지한 것 옛 귀양엔 잡귀 도왔고, 이제 풀려 돌아가니 빛나도다. 왕의 영은 신 또한 거역 못하리. 상서 바람 조각 돛에 천리 파란 잠잠하여 탈없이 잘 건너가는 신의 힘에 달렸다오. 감히 엷은 정성 올리오니 신이여 강감하소서'

“간절하면 가 닿으리”라는 시구처럼 추사의 제문이야말로 간절함이 절절하다. 제문을 쓰면서 그의 마음은 이미 제주도를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신사에 제문을 짓고도 불안했던지 제단을 내려와 또다시 남해신께 제문을 올린다. 제문은 다음과 같다.

'자욱이 뭉친 저 혼이여 맺혀맺혀 못 오르니 저녁 조수(潮水) 새벽 썰물 아득아득 몇 만년을 솟아 날고 굽어 서리니 뉘 더불어 도창(導暢)하리. 예로부터 주식(酒食)이란 배불리고 즐기는 것. 화풍(和風)으로써 마시고 화기(和氣)로써 밥을 지어 함께 태화에 감싸이면 거의 뉘우침 없으리라'

해신에게 제사를 지낸 뒤 드디어 추사는 매서운 겨울 바닷바람을 맞으며 제주도를 떠나게 된다. 아마도 제주시인 문충성의 표현처럼 “파도 소리가 열어 놓는 하늘을 보면서” 제주바다를 넘었을 것이다.

조밥의 날 된장이 전부였던 김정희는 8년 3개월 유배생활 끝에 음식은 '무엇을 먹느냐' 아닌 '누구와 먹느냐'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제주 사계절에는 봄엔 멜, 여름은 냉국과 자리, 가을에는 육지의 재료와 바다 해산물, 겨울엔 조밥이 전부였다고 말한다.

김정희는 화전대신 호박전을 스스로 붙여 먹었고 유배시절 된장도 직접 담궜다고 전한다.

​유배지에서의 영양실조는 당연했지만 영양이 늘 부족하여 면역력이 낮아져 그 시대의 풍토병이 걸렸다니 건강상 문제가 참으로 많았다.

​ 3일에 한번은 먹어야했던 방풍나물죽은 건강을유지했던 음식으로 바닷가에 자라는 야생식물로 염증,폐질환 감기로 인한 호흡기질환에 좋은 무기질,비타민,식이섬유,단백질로 해독작용,면역력증가,통증,진통완화에 도움되는 약초라하여 봄,여름에 유용한 나물로 건강을 겨우 이겨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대팽(大烹)' 을 찾아다니며 세상을 돌아다녔던가.

산해진미를 다 먹어보았으나 돌아와 보니 소박한 두부와 오이・ 생강 ・나물이 최고의 반찬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많은 회합을 가져보았으나 돌아와 보니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딸, 손자의 가족이 최고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인생 만년에 깨달은 그의 위대한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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