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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군산 백화수복과 베리나인 골드의 추억

 

1970년대 군산을 얘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백화양조’다. 백화양조는 한때 청주는 물론이고, 연이은 위스키 히트작으로 1970년대와 198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차례나 제사상에 올리는 제주(祭酒)의 대표 격인 청주 ‘백화수복’이 백화양조의 간판 상품이었다. 1985년 백화양조가 두산에 팔리고, 백화양조를 산 두산주류마저 롯데주류로 넘어가면서 백화수복을 처음 만들었던 회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백화수복은 아직도 그 상표 그대로 팔리고 있다.

백화양조가 만들었던 술 가운데 최고로 히트한 것이 아마도 ‘베리나인’시리즈가 아니었을까. 백화양조는 양주에 손을 대면서 위스키 원액 19.9%의 기타재제주 ‘죠지드레이크’를 선보였는데, 이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원액함량이 낮다는 이유로 죠지드레이크에 ‘위스키’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게 되자, 이번에는 위스키 원액을 25%로 높인 ‘베리나인’을 만들었다.

베리나인도 잘 팔렸지만, 이것보다 더 인기를 누렸던 건 원액함량 30%의 고급버전인 ‘베리나인 골드’였다. 원액함량이 30%만 넘으면 특급 위스키라 부를 수 있었던 시절에 베리나인 골드는 국내 특급 위스키 시장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백화양조의 몰락은 청주나 양주에 비해 판매가 저조했던 소주의 주정배정권을 매각하면서 시작됐다. 소주를 포기하자마자 2차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청주나 양주의 소비는 크게 줄고 소주 판매량이 급등했다. 여기다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위스키 원액 100% 양주 ‘베리나인 골드 킹’을 내놓았는데, 이게 OB 시그램의 ‘패스포트’에 밀려 참패하면서 회사의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

백화양조 몰락의 전조로 1976년 4월 백화양조 계열회사 사장의 아들이 벌인 살인사건을 꼽는 이들도 있다. 계열사 사장의 고교생 아들이 사귀던 여학생을 백화양조 공장으로 불러들여 ‘바람을 피운다’는 이유로 추궁하다 살해한 엽기적인 사건이었는데,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그런데 하필 고교생이 여학생을 양조장 술통에 넣어 숨지게 했으니….

백화양조의 번성을 있게 한 월명동 백화수복 공장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현대오솔아파트가 들어섰다. 인근의 도시재생 공간과 가까워 관광객들이 아파트 앞을 수시로 지나다니지만, 안내판 하나 없으니 백화양조나 베리나인 골드를 알 턱이 없다. 백화양조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단서가 딱 하나 있다. 오솔아파트 앞 보도에 세워놓은 조형물이다.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김형섭 작가의 조형물인데 여학생이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조형작품의 제목은 ‘즐거운 하루’. 이곳이 군산여고와 중앙여중, 군산여상으로 가던 길목이라 여학생의 추억이 깃든 곳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런데 조형물이 딛고 선 좌대가, 자세히 보니 뉘어놓은 양주병이다. ‘베리나인(VALLEY 9)’이라는 양주 상표와 과거 군산의 대표기업 ‘백화양조’의 상호가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