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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63> 유희춘이 박순과 함께 진안루에서 노닐 때 '헌근가 (獻芹歌)'를 짓다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63>  유희춘이 박순과 함께  진안루에서 노닐 때 '헌근가 (獻芹歌)'를 짓다

1569년 7월에 유희춘은 백인걸·노수신과 함께 당상(堂上)에 올랐다. 그해 11월 6일에 미암은 홍문관 부제학이 됐고 1571년 2월 4일에 전라관찰사로 제수됐다.

'미나리 한 펄기를 캐어서 씻우이다.
년대 아니아 우리 님께 바자오이다.
맛이야 긴치 아니커니와 다시 씹어 보소서'

이 시조는 전라감사 유희춘(1513∼1577). 이 봉안사(奉安使)로 전주에 온 박순과 함께  진안루(鎭安樓)에서에서 노닐 때 지은 헌근가(獻芹歌)이다. 
'미암(眉庵)'이란 호는 전남 해남읍 금강산에 있는 초승달 같고 미인 눈썹처럼 생긴 바위 이름에서 따왔다.

'여씨 춘추'의 ‘벼슬에 있지 않는 이가 살찐 미나리를 캐어서 임금께 바치고 싶다‘는 구절에 착안하여 살뜰한 연군의 정을 표현했다. 

'미나리가 물이 올라 싱싱하고 좋기에 한 포기를 캐어서 씻습니다.
다른 곳이 아니고, 우리 임께 바치옵니다.
맛이야 좋지 않겠지만 다시 씹어 보십시오'

하기야 미암 입장에서는 선조에게 무엇이든 못 바치랴. 그를 등용하여 특별 승진시켜준 이가 선조 아니던가.

'유희춘은 선조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특히 경연에서는 특출했다. 그의 박학과 암기에 감탄하여 선조는 유희춘의 강독과 해석만을 따랐다. 강독관이 왕왕 이설(異說)을 제기하여도 선조는 유희춘의 의견을 따랐는데, 선조는 "유희춘은 경적(經籍)을 널리 보아 학술이 정밀하고 자상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선조실록 1571년 11월 5일자)'

미나리를 한 묶음 캐어서 맑은 물에 정성들여 씻습니다. 다른데가 아니라, 우리 님께 바치려고 말입니다. 맛이야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지요마는, 그래도 다시 잘 씹어 보십시오. 내 정성의 맛이 날 것이외다. 

진안루는 마령면 강정리에 위치한 ‘수선루(睡仙樓)'가 아닐까.

이는 1686년 숙종 임금 때 연안 송 씨 4형제 네 분이서 부모님께서 친구분들과 바둑도 두시고 신선처럼 노닐 수 있도록 지어놓은 2층 누각 목조 건물이다. 유희춘의 생몰 연대와도 맞기 때문이다.

조촐한 술상임을 말하면서도 전주 미나리를 자랑하고 있다.

 봄 미나리가 계절 식품으로서 참으로 신선하고 귀한 식품이었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먼저 맛보게 했던 것이다. 그 옛날의 진안루와 미나리의 흔적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