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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규경의 '지리산변증설(智異山辨證說)'의 청옥채(靑玉菜)‧자옥채(紫玉菜)

이규경의 '지리산변증설(智異山辨證說)'
의 청옥채(靑玉菜)‧자옥채(紫玉菜)가 나는데 줄기는 가는 젓가락 같다.

ㅡ운봉현에서 25리 되는 동점촌(銅店村)에서 오르면 반야봉이다.

이 글은 조선말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실려 있는 '지리산에 관한 종합보고서' 격의 글이다. 오주(五洲)는 그의 호이고 연문(衍文)은 군더더기 글로 사족(蛇足) 같은 것이며, 장전(長箋)은 긴 글을 적은 쪽지, 산고(散稿)는 산만한 원고라는 뜻이니 전체적으로 자신의 저서를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다.
그는 역사·경학·천문·지리·불교·도교·서학·풍수·예제·재이(災異)·문학·음악·병법·풍습·서화·광물·초목·어충(魚蟲)·의학·농업·화폐 등에 관한 내용을 망라하였고, 60권 60책에 1,400여 항목의 방대한 내용을 ‘○○○변증설’이라는 이름을 붙여 정리하였다. 변증설이라 함은 고금의 설을 비교 검토하여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덧붙인 고증학적 방법을 말한다.
이 책은 조선시대 백과사전류의 책으로 《지봉유설》《성호사설(星湖僿說)》《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등의 맥을 잇는 책이다. 당시에는 본서 뿐만 아니라 윤정기(尹廷琦)의 《동환록(東寰錄)》,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松南雜識)》, 최한기(崔漢綺)의 《명남루총서(明南樓叢書)》 등 백과사전류의 책이 대량으로 저술되어 백과사전적 학풍이 큰 흐름을 이루었다.
이규경이 《장전산고》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저서는 그의 조부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였다.
청장관전서에 얽힌 이야기 하나. 정조 때 규장각의 4검서(檢書)로 유명했던 이덕무가 죽자, 평소 그의 재주를 아끼고 그의 글을 사랑하고 그의 불우함을 애석히 여기던 정조 임금이 신하들에게 명하여 이덕무의 유고를 선집(選集)케 하고 내탕금(內帑金)을 지원하여 간행하게 하였으니, 《아정유고(雅亭遺稿)》(*청장관전서에 포함) 8권이 그것이었다. 임금의 특별한 지우(知遇)였다. 
현재 《장전산고》는 한국고전번역원(구.민족문화추진회)에서 人事‧經史 부문, 즉 전체의 약1/4 가량이 번역되어 나와 있으며, 『지리산변증설』은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가객님의 명을 받고 시작하였으며, 원문은 고전번역원의 교감본(校勘本)을 이용했는데 저자가 인용한 원전(原典)에 대하여 더 세밀히 대조확인해야 할 필요성은 느꼈으나 능력 밖이라 일일이 그렇게 하지는 못하였다. 원전 중 이미 번역된 글은(택리지 등) 번역본을 참조하였다.
참고로 『청학동변증설』은 최석기 교수의 《지리산유람록1》에 번역 수록되어 있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읽어두기】

○ 독립된 서명(書名)은 《…》로 표시하였고, 책 속의 글 제목은 『…』로 표시하였으며,

○ 다른 서적에서 인용한 글은 「…」로 구분하였고, 인용문 속의 재인용문은 “…” ‘…’로 묶었다.

○ 원주(原註)는 작은 글씨로 청색 […] 속에 넣었고, 역주(譯註) 역시 작은 글씨로 흑색(…) 속에 넣었으며, 내용이 긴 것은 각주(脚註)로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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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변증설(智異山辨證說)

천하에는 세 개의 대간룡(大幹龍 *풍수에서는 산줄기를 龍이라 한다. 대간룡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산줄기)이 있는데 모두 곤륜에서 시작된다. 세 줄기로 나누어져 중국으로 들어가며, 북쪽 줄기는 하해(河海 *곤륜산에 있다는 깃털도 가라앉는다는 호수)에서 나와 기‧연(冀燕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지역)지방의 산이 되었고, 그러고도 남은 기운은 백두산이 되었으며, 백두산은 흘러 조선의 뭇산이 되었다.

백두산은 곧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하는 불함산이니 일국의 지붕이 된다. 몽라골현[북도의 길주목에 있다]에서 서남쪽으로 구불구불 이어져와 장령[갑산부에 있다]이 되고 또 흘러 두리산이 되고 함흥의 백덕산이 되고 영흥의 검산이 되고 분수령이 되고 철령이 되었다.1) 또 흘러 대관령이 되고 태백산 소백산이 되고 죽령이 되고 조령이 되고, 두 영(嶺)의 남쪽으로 이화현이 되고 속리산이 되고 분수현이 되고 지리산이 되었다. 지리산은 곧 방장산으로, 웅장하여 수백리에 걸쳐 있고, 백두의 맥이 흘러와 여기에서 멈췄기 때문에 일명 두류산(頭流山)이라 하며, 옛날 신라와 백제의 경계였다.

《습유기(拾遺記)》「부상(扶桑)은 오만리, 거기에 방당산(磅磄山)이 있고 산위에는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둘레가 백 아름이나 되며, 만년에 한번 열매를 맺는다. 울수(鬱水)는 방당산 동쪽에 있고, 푸른 연뿌리가 나는데 길이가 천길이나 된다.」

지봉 이수광이 말하기를, “내 생각에는 방당과 방장은 음이 비슷하므로 세속에서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한다.”고 하였다.

두보의 시에 ‘방장은 삼한의 밖에 있다’고 하였다. 또 말하는 사람들은 삼신산은 모두 우리 동방에 있다고 하면서, 방장은 지리, 영주는 한라, 봉래는 금강이라고 한다. 신라 고려에서 전해지는 말이 이와 같으니 혹 닮았다고 할 수 있을까?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에서 말하였다. 「금대암은 고찰이다. 들보 위 반자(盤子)속의 그을음이 끼고 어두컴컴한 곳에 소룡을 그린 금니화가 있었다. 비늘과 지느러미 발톱과 뿔이 꿈틀대며 움직여 은은히 일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로새긴 듯하여 결단코 동방의 평범한 솜씨가 아니었다. 벽에는 기문이 있었는데 매우 질박하였고,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지리산은 일명 봉익산(鳳翼山)이라 하는데 그 형상을 취한 것이고, 일명 두류산이라 하는데 백두산에서 흘러와 갈라졌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신라 승려 의상은 《청구비기(靑丘祕記)》에서, “지리산은 일만 문수가 속세에 머무는 곳이며 그 아래 세상은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질박하다.”고 하였다.

《지지(地誌)》에 “지리산은 태을(太乙 *신선의 우두머리)이 사는 곳이며 신선의 무리가 모이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고려 쌍명재 이인로는 《파한집(破閑集)》에서, “두류(頭留)는 북녘의 백두산에서 일어나 시작되어, 꽃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이 이어져 대방군[대방은 호남의 남원부이며 지리산에서 동쪽으로 60리이다]에 이르러 수천 리를 내려온 것이 서리어 맺히었다. 산 주위에는 10여 고을이 있는데, 한 달은 걸려야 그 끝까지 다 돌아볼 수 있다.” 하였다.

점필재 김종직 공은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서 “악양현의 북쪽을 청학사 골이라 하고, 그 동쪽을 쌍계사골이라 한다.” 하였다.

《지지(地誌)》 「두류 동부(頭流洞府 *동부洞府는 신선이 사는 별천지. 洞天, 別府 다 비슷한 말. 통상 골짜기 속이 넓은 곳을 동부라 하기도 한다.)는 서로 연결되어 깊고 넓으며 토질은 땅이 두텁고 비옥하여 산 전체가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는 백 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많고, 왕왕 사람이 이를 수 없는 곳이 있어 세금을 내지 않기도 한다.

땅이 남해에 가까워 기후가 온난하니 산중에 대나무가 많고 또 감나무 밤나무가 많아 저절로 열렸다가 저절로 떨어진다. 높은 봉우리 위에 기장과 조를 뿌려도 씨앗이 잘 자라지 않는 경우가 없으며, 촌민과 승려가 섞여 살고, 농사는 애쓰지 않아도 두루 풍족하다.

산의 남쪽에는 화개동 악양동이 있고, 모두 사람이 살며 산수가 매우 아름답다. 옛부터 전해오기를 만수동 청학동이 있다고 하였는데, 만수동(萬壽洞)은 곧 지금의 구품대(九品臺)이고 청학동은 바로 지금의 매계(梅溪)이다.

서쪽에는 화엄사 연곡사가 있고, 남쪽에는 신응사 쌍계사가 있다. 산 북쪽은 함양군 땅이며 영원사 군자사 유점촌(鍮店村)[남사고는 복지福地라 하였다]이 있고, 또 벽소운(碧霄雲) 추성동이 있는데 모두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지리 북쪽의 계곡물이 합쳐 임천이 되고 용유담이 되어 함양군의 남쪽 엄천에 이르는데 시내를 따라 아래위로 물과 돌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었다. 산의 서남쪽 섬진강 상류에 버금간다.」 (*어떤 지지(地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위 내용은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나온다.)

대체로 중봉으로 오르면 역시 흙으로 덮인 봉우리이다. 함양군에서 엄천을 거쳐 오르는 사람들은 북쪽의 제2봉을 中이라 한다. 마천에서 오르는 사람들은 시루봉(甑峯)을 제1봉이라 하고 여기를 제2봉이라 하기 때문에 역시 中이라 칭한다.

시루봉을 지나면 저여원(沮여原)에 닿는데 저여원은 산등성이에 있고, 평탄하고 넓어 오륙 里 가량 되며 수풀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흘러 농사지어 먹고 살만하다고 한다.

운봉현에서 25리 되는 동점촌(銅店村)에서 오르면 반야봉이다. 거기서 보는 최고 꼭대기는 천왕봉으로 평지로 치면 70리쯤 된다. 보(步)로 셈하면 25,200보, 척(尺)으로 재면 151,200척이 된다. 하늘 위에는 맑고 서늘한 기운이 가득하여 꼭대기에 오르면 한여름에 갖옷을 껴입어도 오히려 춥고 세찬 바람이 살을 에는 듯하다. 또 정상에는 열 사람이 앉을 정도의 공간 밖에 없다.

이 산에서 가장 이름난 곳은 청학동이다. 고려의 쌍명재가 처음 언급한 이래 천하에 회자된 것은 청(淸)나라 강희연간에 편찬하여 들여온 《연감유함(淵鑑類函)》때문이다. 상세한 것은 『청학동변증설』을 보라.

악양동은 산수가 매우 아름답다. 고려 때 한유한이 이자겸의 전횡이 심한 것을 보고는 장차 화가 일어날 것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가솔을 이끌고 지리산에 숨었다. 조정에서 그를 찾아 관직을 배수하여 불렀으나 유한은 도망가 숨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어디서 생을 마쳤는지 모른다. 혹은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단학수장(丹學修藏)》 「신라 최승우, 김가기, 승려 자혜 등 3인이 당(唐)에 들어가 종남산의 도사 신원지를 따라 노닐다가 신선 종리장군을 만나 내단(內丹)을 이루어 갈무리하는 비결을 얻어 돌아와서는 그 구결을 최고운과 이청(李淸)에게 전수하였다. 이청은 두류산으로 들어가 수련하여 신선이 되어 등천하면서 그 구결을 제자 명법에게 전하였고, 명법은 해화(解化 *형체를 버리고 신선이 되는 것)하면서 구결을 상락군 권청에게 전하였다. 권청은 거짓 미친 체하며 승려가 되어 수련하여 득도하고는 지리산에 숨었으니 고운과 더불어 이 산에 있지만 숨거나 나타나는 것을 자유자재로 한다.」

상세한 것은 《전도록(傳道錄)》에 보인다.[《전도록》에 “승려 자혜와 최승우가 唐에 들어가 도사 신원지에게서 道의 요체를 받아 돌아와 최고운과 이청에게 구결을 전수하였고, 이청은 두류산에 들어가 수련하였고 득도하여 신선이 되었다. 그 도를 승려 명법에게 전하였고 명법은 32년 만에 신선이 되어 상락군 권청에게 도를 전수하였다. 권청은 거짓 미친 체하며 승려가 되었고 득도하여 두류산에 숨었다. 元나라의 지배시에 설현이 원나라에서 동으로 와 반야봉에서 상락을 뵙고 그 정법을 얻었다.”고 하였다.]

「남추가 수련법을 배워 과거급제 후 기묘사화를 당해 곡성에 유배를 가서 지냈다. 일찍이 편지를 써서 하인을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여보냈다. 하인은 채색 단장한 누각에 두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한 사람은 고운, 한 사람은 자혜였다. 하인은 하루를 머물고는 답서를 받아 돌아왔는데 처음 2월에 산에 들어갈 때는 초목이 움트기 전이었는데 나와 보니 어느덧 9월초였다.」 《해동이적(海東異蹟)》에 상세히 나온다.

지리산 중봉의 성모묘(聖母廟)는(*중봉의 성모묘라 한 것은 착오로 보인다.) 삼칸 판자집이다. 그안에 있는 성모 석상의 목에는 이지러진 자국이 있는데, 우리 태조대왕께서 인월에서 크게 승리하던 해(1380년, 고려 우왕 6년)에 왜구들이 이 봉우리에 올라 석상을 찍고 갔기에 후인이 붙여 이어 놓았다.

또 석가의 모친 마야부인이라고 하는데, 일찍이 고려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보인다. ‘성모가 선사(詵師)에게 명하였다’하고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天王)이니, 바로 고려 태조의 모친[妣]인 위숙왕후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는 곧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에 관한 이야기를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선도성모란 삼국사에 「성모 사당이 경주 서악의 선도산에 있다. 성모는 한(漢) 선제(宣帝)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이다. 일찌기 신선의 술법을 터득하여 해동으로 와 머물며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고 마침내 神이 되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의 시조 혁거세는 성모가 낳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찬양하기를, 선도성모가 어진 이를 낳아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다.」고 하였다.

미수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말하였다. 「시중(侍中) 김부식이 일찌기 宋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우신관(佑神館)에 들렀는데 한 건물(堂)에 산선(山仙)을 모셔 놓은 것을 보았다. 관반(館伴 *사신을 접대하는 벼슬) 왕보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의 신인데 그대들은 압니까?” 하고 곧 이어 말하였다. “옛날 어떤 황실의 딸이 지아비 없이 애를 배어 사람들의 의심하는 바가 되자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아 해동의 첫왕이 되었으며, 후에 왕은 천선(天仙)이 되고 황제의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오랫동안 선도산(仙桃山)에 있었는데, 이것이 그 상(像)입니다.”」

쌍계사 시냇가의 석벽에는 고운의 큰 글자가 많이 새겨져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운이 득도하여 지금도 가야산과 지리산 사이를 오간다고 한다. 선조 신묘년간(1591)에 절의 중이 바위틈에서 종이 한 조각을 얻었는데 절구(絶句) 한 수가 적혀 있었다.

  “東國花開洞(동국화개동)  동국의 화개동은

   壺中別有天(호중별유천)  호리병 속의 별천지로구나.

   仙人推玉枕(선인추옥침)  선인이 옥베개를 밀치고 일어나니

   身世倏千年(신세숙천년)  몸은 세상에 있건만 잠깐만에 천년이 지났네.”

글자와 획이 새로 쓴 것 같았고, 그 글씨도 세상에 전하는 고운의 필적과 동일하였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두류산 꼭대기에 올랐을 때 날개옷을 입은 신선을 본 적이 있었는데, 오산 차천로의 《설림(說林)》과 청학동변증설에 보이므로 지금 다시 군더더기말을 덧붙이지 않으니 《오주연문장전》을 살펴보라.

이러한 것들은 두류산 신선들의 자취이며 또 이서(異書 *진기한 책)들도 있으니 또한 이 산의 일사(逸史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될 만하다.

우리 태조대왕께서 잠룡(*즉위하기 전) 시절에 어떤 스님이 문앞에 와서 책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지리산의 바위 속에서 얻었다고 하였다. 거기에는 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태조는 을해년(乙亥)에 나셨다.](*木子乘猪下는 돼지해에 태어난 李씨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 삼한의 지경을 바로잡을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사람을 시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가버려 찾지 못하였다. 야사(野史)에 상세히 나온다.

이 외에도 도사와 승려들이 저술하여 서로 전하는 것들이 삼한시대에서 오늘날까지 몇 종이나 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 다만, 거두어 가버려 볼 수 있는 것은 《지리성모(智異聖母)》[서명(書名)이다]이다.

세조(3년) 정축년(1457)에 팔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祕詞)》부터 《대변설(大辯說)》과 《智異聖母》《지도설(至道說)》《한도참기(漢都讖記)》등 19종의 서적들은 사사로이 간직하기에 마땅치 않으니 만약 간직한 자가 있으면 진상하게 하라.”2)고 한즉 이때의 《지리성모》가 바로 이책 이름이다.

지리산 은자들의 방서(方書 *신선술에 관한 책) 속에는 조삼법(造蔘法 *수삼을 백삼이나 홍삼으로 만드는 방법)도 있는데 이러한 것들 또한 기서로서 비밀히 전하는 것이다.

석정곤(石井崑) 수곡대승(水谷大勝) 동점촌(銅店村) 남두류동(南頭流洞)은 모두 이 산의 동천 복지(洞天福地)로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겨놓은 곳이다. 『청학동변증설』에 상세히 있으므로 더 이상 첨언하지 않는다.

산의 재앙과 이변 역시 기록할 만한 것들이 있는데, 갑술년(1814)의 장맛비로 지리산이 붕괴되고 수목이 뿌리채 뽑히고 호랑이와 표범이 떠내려가 죽었다.[때는 순조임금 14년이었다.] 여름의 이런 홍수는 옛날에도 없었다고 영남사람들은 말하며, 초목과 벌레 새에게도 괴이한 일이 미쳤으니 또한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 흥덕왕 3년 무신년(828)에 김대렴을 唐에 보내 차(茶)의 씨앗을 얻어와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는데 지금까지 그 종자가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당총(唐蔥 *당나라 파)이 있는데 줄기는 나무인데 뿌리는 파다. 전하는 말에 唐에 파종한 것을 얻어 심었기에 이름을 당총이라 한다 했다.

대나무 열매를 복(竹+復)이라 하는데 우리 태종임금 때 관동 강릉부의 대령산에 대나무 열매가 있었는데 그 모습은 밀 같고 찰지기는 율무 같으며 맛은 수수 같아 마을사람들이 따서 술을 만들어 먹는다고 하였다.

지리산의 대나무도 또한 열매를 많이 맺는데 열매를 맺으면 죽고 혹은 말하기를 대가 만약 열매를 맺으면 그해에는 흉년이 든다고 한다. 오직 지리산의 대나무는 해마다 열매를 맺는데, 일찍 채취하는 것은 담황색으로 끈적이며 늦게 채취하는 것은 심황색으로 떫다. 맛이 밀(小麥)과 비슷하여 산승(山僧)들이 식량으로 삼는다.

《계성부(稽聖賦)》를 살펴보니 대나무에 열매가 열리면 뿌리가 마르고 파초에 꽃이 피면 밑동이 마르므로 그리되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다. 이제 지리산의 대나무가 열매를 맺었는데도 죽지 않는 것으로 보건대 이것은 잘못된 말이며, 또 대나무에 열매가 생기면 흉년이 든다는 말 역시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지리산의 소나무 그림자가 그늘진 연못이나 시냇물에 비쳐 고기로 변하는데, 아롱진 무늬가 중의 가사(袈裟) 같아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한다. 점필재의 시에

  “達空寺下水梭花(달공사하수사화)  달공사 아래에 있는 수사화는

   紫鬣斑鱗味更嘉(자렵반린미경가)  붉은 지느러미에 얼룩 비늘, 맛 또한 좋아라.”

라고 하였는데, 달공사는 운봉현에 있으며, 절에서는 고기(魚)를 수사화(水梭花 *물속에 있는 베짜는 북처럼 생긴 꽃)라 부른다.」 또 이수광의《지봉유설》에도 보인다.

또 지리에는 청옥채(靑玉菜)‧자옥채(紫玉菜)가 나는데 줄기는 가는 젓가락 같고 흰꽃이 피면 산승들이 말려서 쌓아놓고 삶아서 국을 끓이기도 하고 데쳐 먹기도 하는데 맛이 매우 맑고 담백하며, 이름 또한 아주 고아하다.

야사에, 광해군 12년 경신년(1620) 12월, 흑조(黑鳥)가 일본에서 허공 가득히 바다를 건너 지리산 속에 모여서는 몇 날을 서로 싸워 죽은 시체가 쌓였으며 냄새가 산 밖에까지 진동하였고 나머지 새들은 북쪽으로 날아갔다고 하였다.

이 글(지리산변증설)과 청학동변증설은 서로 참조하는 문장이 많은즉 지리산과 청학동은 같은 산이기 때문이니 보는 사람들은 중복되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라.

점필재의 『유두류산록』도 참고할 것이 많으니 간략히 기술한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함양군수가 되어 임진년(1472) 중추(仲秋 *음력8월)에 뇌계 유호인, 매계 조위와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고 유산록을 남겼으니 지금 그 줄거리만 적는다.

「무인일(8월14일). 엄천을 지나 화암에서 쉬었다. 지장사에 이르러 말을 버리고 지팡이를 짚고 1리쯤 가니 바위가 있는데 환희대라 하였으며,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었고, 금대암‧홍련암‧백련암 등의 여러 사찰들이 내려다보였다.

선열암에 들렀다가 고열암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의론대가 서쪽에 있는데 석굴이 있고 노숙(老宿 *덕이 높은 승려) 우타가 거기에 거처하였다. 일찍이 선열암‧신열암‧고열암 세 암자의 스님들과 더불어 대승‧소승과 돈오(頓悟)에 대해 논하였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의론대라 부른 것이다.

나는 첫 산행으로 극도로 피로하여 푹 잤다. 기묘일 날이 밝아 한 언덕을 지나는데 이것이 구롱(隴 *고개, 언덕 또는 등성이) 가운데 첫 번째였다. 연달아 세 번째 네 번째 언덕을 지나니 한 동부(洞府)가 있었는데,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였다. 여기서 20리를 가면 의탄촌에 도달한다.

구롱을 지나면 산등성이 길로 가는데 몇 里를 못 가서 등성이를 돌면 남쪽은 곧 진주 땅이다. 청이당에 이르렀다. 당집은 판자로 지은 집이었다. 여기서부터 영랑재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매달린 듯 극히 위험하였다. 날이 이미 정오를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재에 올랐고, 거기서 천왕봉을 우르러보았다. 영랑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로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수에서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소년대는 봉우리 곁에 있는데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다. 산의 동쪽 서쪽 계곡에는 잡목은 없고 모두가 삼나무․전나무․소나무․녹나무였는데 말라 죽어서 뼈만 남아 서 있는 것이 3분의 1은 되었다. 산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쏠려 휘어지고 굽어 머리카락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해유령을 지날 때 길 옆에 선암이 있었다. 중봉에 올랐는데 중봉은 흙을 이고 선 단정 진중한 모습이었다.

성모묘에 이르렀다. 3칸 판자집이었다. 성모석상이라고 하는 것의 목에는 금이 가 있었다. 태조께서 인월에서 크게 승리하던 해에 왜구들이 이 봉우리에 올라 칼로 찍고 갔으므로 뒷사람이 붙여 이어 놓았다. 또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이승휴의《제왕운기》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에게 명하였다’고 하고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은 바로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는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에 관한 이야기를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성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 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한 것이다.

날이 또 어두워지자 음랭한 바람이 마구 불어오고 안개가 모여들어 의관이 모두 축축해졌다. 사당 안에서 서로를 베개삼아 누웠는데 한기가 뼈에 스며 다시 두꺼운 솜옷을 껴입었다.

경진일, 종자(從者)들을 향적사에 먼저 보내 음식을 준비하게 하였다. 몹시 미끄러운 돌길로 몇 里쯤 내려가니 쇠난간길(鐵鎖路)이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였다. 바위구멍을 통과해 나와 향적사로 들어갔는데, 향적사에는 중이 없어진 지가 벌써 2년이나 되었다. 문 앞의 반석으로 나아가 바라보니, 살천이 구불구불 길게 이어져 있고, 여러 산과 바다의 섬들은 혹은 완전히 드러나기도 하고 혹은 반쯤 드러나기도 하였다.

신사일, 새벽에 해가 떠오르니 노을빛 채색이 영롱하게 빛났다.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하여 먹고 지름길로 석문을 거쳐 성모묘에 들어갔다. 이 때 날이 막 개서 사방은 구름 한 점 없었다.

이 산은 북쪽에서 달려와 남원에 이르러 높이 일어나 반야봉이 되었고, 동쪽으로 거의 이백 리를 굽이쳐 이 봉우리에 이르러 다시 우뚝 솟구쳤다가 북쪽으로 서리어 끝난다.

꼬리를 끌 듯 둘러선 성첩은 함양성이고 흰 무지개가 가로지른 듯한 것은 진주의 강물이며 푸른 소라처럼 촘촘이 서 있는 것은 거제 남해의 여러 섬이다. 그러나 산음 단계 운봉 구례 하동은 겹겹의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북쪽에 있는 가까운 산으로는 안음의 황석 함양의 취암(鷲巖)이 있고, 멀리 있는 것으로는 함음(*거창 가조)의 덕유 공주의 계룡 금산의 주우(走牛) 지례의 수도 성주의 가야가 있다. 동북쪽의 가까운 산으로는 산음의 황산(皇山) 삼가의 감악산이 있고, 먼 것으로는 대구의 팔공 안동의 청량이 있다.

동쪽에 있는 가까운 산으로는 의령의 자굴(闍崛) 진주의 집현이 있고, 멀리 있는 것으로는 현풍의 비슬(毗瑟) 청도의 운문 양산의 원적이 있다. 동남쪽의 가까운 산으로는 사천의 와룡이 있고, 남쪽의 가까운 산으로는 하동의 병요(甁要) 광양의 백운이 있고, 서남쪽의 먼 먼 산으로는 흥양(*고흥)의 팔전(八顚)이 있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운봉의 황산(荒山), 멀리 있는 것은 광주의 무등 부안의 변산 나주의 금성 고산(*완주)의 위봉(威鳳) 전주의 모악 영암의 월출이 있고, 서북쪽에 멀리 있는 산은 장수의 성수(聖壽)이다.

이 산들 중 어떤 것은 나지막한 언덕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음식 그릇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지만, 오직 동쪽의 팔공과 서쪽의 무등만은 여러 산에 비해 활등처럼 하늘 높이 솟았다.

계립령(鷄立嶺) 이북은 아득한 푸른 기운이 허공에 가득하고, 대마도 이남에는 신기루가 하늘에 닿아 있어, 시력이 미치지 못하여 더 이상은 또렷이 볼 수가 없다.

정오가 되어 석문을 지나 내려와 중산(中山)에 올랐더니 이 또한 흙으로 덮인 봉우리였다. 이 고장 사람들이 엄천을 거쳐 오르는 자들은 북쪽에 있는 제이봉을 中이라 하고, 마천에서 오르는 자들은 증봉(甑峯 *시루봉, 지금의 촛대봉을 말하는 듯)을 제일봉이라 하고 이 봉우리를 제이봉이라 하기 때문에 또한 이것을 中이라 일컫는다.

시루봉을 지나 저여원(沮洳原)에 도착했다. 이 평원은 산등성이에 있는데 평탄하고 넓은 것이 5∼6리 가량 되고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다. 저물녘에 창불대에 올라가 보니, 그 아래에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었다. 두원곶‧여수곶, 섬진강의 끝이 내려다보였다.

악양현의 북쪽이 청학사가 있는 동네이고 그 동쪽이 쌍계사가 있는 동네이다. 최고운이 일찍이 이 곳에서 노닐었다.

영신사에서 잤다. 절의 북쪽에는 가섭(迦葉)의 석상이 있는데, 세조 임금 때에 매양 중사(中使 *내관)를 보내 향화를 행하였다. 그 석가섭의 목에도 흠집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가 찍은 것이라고 한다. 가섭전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라는 것이다. 법당에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頭陀第一(두타제일)  불도를 닦는 것이 제일이니

  是爲抖擻(시위두수)  이는 번뇌를 떨치기 위한 것

  外已遠塵(외이원진)  밖으론 이미 속세를 멀리하였고

  內已離垢(내이리구)  안으론 이미 마음의 때를 벗었네

  得道居先(득도거선)  먼저 도를 깨치고

  入滅於後(입멸어후)  나중에 적멸에 들었으니

  雪衣鷄山(설의계산)  설의와 계산은

  千秋不朽(천추불후)  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으리라.

하였고, 그 곁에는 소전체(小篆體)의 청지(淸之)라는 인장이 찍혀 있었으니, 바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삼절(三絶/詩書畵)이었다.

곧장 지름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동쪽으로 우르러보니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가파른 곳을 다 내려와 지팡이를 끌면서 걸었다. 골짜기 어귀에는 야묘(野廟)가 있었는데, 마침내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 실택리에 당도하였다. 등구재를 넘어 지름길로 군의 관아로 돌아왔다.」

청나라 성조(*강희제 1661-1722 재위) 때 편찬한 《연감유함》에 “조선의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고, 그곳은 텅 비어 넓고 사방이 모두 기름진 땅으로 곡식을 심기에 알맞으며, 오직 청학만이 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실려 있다. (*이 내용은 이인로의 『청학동기』에 나온다.)

엄천사는 나의 할아버지의 《한죽당섭필》에 나온다. 「계묘년(1783) 6월[삼가 살펴보니 정조임금 8년이었다] 내가 두류산을 유람할 때, 엄천사에 들러 고적이 있는지 물었더니 절의 승려가 책 하나를 바쳤는데, 거기에는 인목대비가 죽은 아우의 명복을 비는 발원문이 실려 있었다. 또 계묘년 6월23일 아들 광류와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면서 군자사에서 묵었다. 절의 사적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천령의 남쪽 오십리 쯤에 지리산이 있는데 동쪽 기슭 아래의 큰 시냇가에 군자사가 있다. 진(陳)의 대건 11년 무술년(578) 신라 진평왕이 잠저(潛邸 *즉위 전)시절에 왕위를 피하여 여기에 머무를 때 태자를 낳았고 서라벌로 돌아가서는 마침내 머물렀던 집을 절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이름을 군자사라 하였다.’

또 진주 단속사에는 신행선사비가 있는데 중 영업이 글씨를 썼으며, 쌍계사에는 진감국사비가 있는데 최치원이 글을 짓고 썼다.」

신라 의상대사는 《청구비결》에서, 「두류산은 은거하기 위한 사람들이 많이 귀착하는 곳이며, 뛰어나게 훌륭한 인사들이 대대로 많이 배출된다. 계원3)(雞園 *사찰)에서 도를 이야기하며 원숭이 사는 (궁벽한)곳에서 법을 닦는 인사들 또한 이곳에 모여드니, 이런 일이 매우 성하다.」하였다.

정조임금 때 신홍주와 백동수에게 명하여 지리산의 도적을 토벌하게 했을 때4), 백公이 석벽 위에 탁자(坼字 *한자의 글자를 나누거나 합쳐서 점을 치는 것. 파자(破字)와 같은 말)가 적힌 종이 하나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종이의 탁자는 다음과 같았다.

  八一自有尾 小一几 口弓虎 禾千十木 囗王丁口 目几禾多

또 그 아래에는 시 2구절이 적혀 있었다.

“바다 밖 끝에는 무석국(海外限無石) / 유사(流沙)는 영주에 고하고(流沙詔嬰洲) / 꽃이 그르지 사람은 그르지 않고(花誤人不誤) / 바람은 놀라도 뜻은 놀랍지 않네.(風驚意不驚)”5)

또 그 밑에는 ‘팔십 단(單)의 백춘(白春)의 가르침을 보이려고 기년(寄年) 기월 기일에 새로 새긴 것을 들고와 바치고는 그 집에 그 道를 남긴다.’고 씌어 있었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순조임금 경진년(1820) 겨울, 백公의 서자 심진4)이 그것을 소매 속에 넣어와 보여주었지만 괴이하여 감추어 놓았다. 그 다음해 청의 도광제(道光帝)가 즉위하여 연호를 도광(道光)이라 하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탁자가 풀이가 되었다.

八一自有尾(*八一自에 꼬리가 있는 것)를 합치면 ‘道’자가 되고, 小一几를 합치면 ‘光’자가 되며, 口弓虎를 합친 글자는 ‘號’자이고, 禾千은 ‘秊’(*年과 동일), 十木은 ‘末’, 囗王은 ‘國’, 丁口는 ‘可’, 目几은 ‘見’, 禾多은 ‘移’가 된다. (*이으면 道光號年末 國可見移가 된다. 즉 도광년호의 말에 나라의 대통이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는 뜻이다.) 

기이하게도 도광이란 연호가 있을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아래의(末 國 可 見 移) 의미는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기유년(1849)이 되어 헌종 임금이 후사(後嗣)없이 승하하고 今上(지금의 임금 *철종)께서 계통을 이었다. 이때는 청 황제 연호인 도광의 말년이라는 말과 맞아 떨어지며, 천명이 지금의 임금(當宁)에게 옮겨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경술년(1850) 정월에 청 황제가 붕어했으니 바로 도광의 말년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두류의 은자들은 앞일을 아는 재주가 있어서 파자(破字)를 미리 만들어 참설(讖說)6)로써 보여주는 것이니 참으로 이것은 괴이한 일이다. 고로 변증의 마지막에 붙여둔다.

고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시가 있다.

  送智異山智居寺住持覺冏上人(송지리산지거사주지각경상인) / 지리산 지거사 주지 각경상인을 보내며

  南遊何處聽溪聲(남유하처청계성)  남쪽에서 노니는데 어디선가 시냇물소리 들리고

  智異山高萬丈靑(지리산고만장청)  지리산은 높아 만 길이나 푸르네.

  春院日長無個事(춘원일장무개사)  봄날 절에 해는 길고 일은 없어

  沙彌來學妙蓮經(사미래학묘연경)  사미가 와서 묘연경을 배우네.

<끝>

 

【註】

1) 참고로, 정감록에 들어 있는 삼한산림비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삼한의 산맥은 몽라골현에서 시작되어 용처럼 날고 봉황처럼 춤추며 구불구불 에워 돌아 남쪽으로 내려와 장령산이 되고 두흑산이 되고 백두산이 되고 검산이 되어 동옥저에서 멈추었다.[三韓山脈 初自蒙羅骨峴 龍飛鳳舞 逶迤而南 爲長嶺山 爲豆黑山 爲白頭山 爲劍山 止於東沃沮]」

2) 이때 금서로 지정된 서적은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의 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 노원 동중의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智異聖母), 하사량훈(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이 기록하고 수찬(修撰)한 1백여 권(卷),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蝨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의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이었으며, 이후 2차례 더 금지된다.

3) 원문은 鷄國으로 되어 있으나 뜻이 통하지 않아 『삼한산림비기』에 따라 鷄園으로 고쳐 해석하였다. 鷄園이란 부처님 당시의 고대 인도의 절 이름이었다 하며, 뒤에는 그냥 사찰의 뜻으로 쓰인다.

4) 조선왕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아래에 나오는 백동수의 아들 심진(心鎭)은 서자가 아니라 적자였고, 백동수 생전에 요절하였다. 아마 재혼하여 낳은 아들 성진(性鎭)의 착오가 아닌가 싶다.

5) 이 시는 조선왕조실록 정조11년(1787) 6월14일의 기사, 김동익 등의 반역사건 공초에도 나오는데 좀 다르다. 당시 이런 참언(讖言)이 나돌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석벽 위에 이인(異人)이 쓴 시가 있어서 ‘꽃이 그르치지 어찌 사람을 그르칠 것인가? 바람이 놀라지만 뜻은 놀라지 않네, 단지 바다에 돌이 없음이 한스럽지만 유사(流沙)가 북앵(北鸚)에 조(詔)하네.[花誤人何誤 風驚意不驚 只恨海無石 流沙詔北鸚]’이라 하였는데, 대개 3월에 거사한다는 것을 가리키며 비록 잘못되더라도 마침내는 반드시 그르치지 않을 것이니 소란스런 말이 헛되이 경동시키더라도 모름지기 놀라지 말라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6) 참설(讖說) 도참(圖讖) 참위설(讖緯說) 등의 용어는 거의 동일하게 구분없이 사용되었다. 참설은 앞날에 대한 주술적 미신적 예언이다. 도참의 도(圖)는 앞으로 일어날 일의 상징‧표시‧징후‧암시‧조짐 등을 의미하며, 참(讖)은 국가나 사람의 길흉‧화복‧성패 등을 예언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나라에선 금하였다.

원래 기원은 고대 중국의 참위설(讖緯說)이었다. 참위설은 음양오행설에 바탕을 두고 일식‧월식‧지진 등의 천지이변이나 은어(隱語)‧부호(符號) 등에 의하여 인간사회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설이다. 참(讖)은 예언이며, 위(緯)는 경전을 견강부회하여 해석한 위서(緯書 / 經 vs 緯)를 말한다. 한(漢)의 대유학자 동중서가 주장한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사람이 하는 바에 따라 하늘이 복이나 재앙을 내린다는 설)도 참위설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민중의 불만과 새 세상에 대한 기대가 반영된 도참설은 -특히 중국에서- 구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야심가에게 민중을 선동하기 위한 더없이 좋은 사상이었고, 권력의 정당성을 퍼뜨리기에도 아주 적합한 수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 잡은 뒤에는 그것을 금지시켰던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풍수 자체가 곧 도참은 아니다. 풍수를 그렇게 이용할 때 도참이 되는 것이지.. 어쨌든 동일어는 아니다.)

【본문에서 인용한 서적들】

《산해경(山海經)》 중국 최고(最古)의 지리서(地理書)이자 신화적 상상력의 보고. 전국시대 후기의 저작으로 보임. 산의 계보와 강 이름, 거기서 나는 약초와 보석 광물은 물론, 거기에 사는 기이한 짐승과 새들을 망라하여 기록하였다.

《습유기(拾遺記)》 중국의 전설을 모은 지괴서(志怪書). 10C경.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제32책. 저자가 1783년(정조 7) 경상도 함양군 사근역 찰방으로 있을 때, 영남지방의 명승·고적과 고금인물·풍속 등에 관하여 기술한 것이다

《청구비결(靑丘祕訣)》 그 내용으로 보건대 정감록에 수록된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를 말하는 것 같다. 내용은 우리 나라 산천의 생김새와 산맥의 분포, 도읍지 등을 설명하였다. 저자를 도선 의상 등으로 거론하고 있으나 알 수 없다.

《지지(地誌)》지리서를 통털어 지지(地誌)라 하는데 어떤 지리서인지는 알 수 없다.

《파한집(破閑集)》 고려시대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지은 시화(詩話)·일화(逸話)·기사(奇事)집. 이 속에 청학동기가 실려 있다. 이인로의 자는 미수(眉叟). 호는 쌍명재(雙明齋)

《연감유함(淵鑑類函)》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 1661-1722 재위)의 칙명에 따라 편찬된 유서(類書). 1710년에 완성. 모두 450권. 유서(類書)라 함은 일종의 백과사전을 말한다.

《단학수장(丹學修藏)》 어떤 책인지 알 수 없다. 도가(道家) 계통의 단학(丹學) 관련 책임을 짐작할 뿐..

《전도록(傳道錄)》은 곧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을 말한다. 1610년 한무외(韓無畏 1517-1610)가 찬술한 도가서(道家書). 우리나라의 도가 단학(丹學), 즉 내단수련(內丹修鍊)의 요체와 도가의 계보를 밝힌 책

《해동이적(海東異蹟)》 1666년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이 펴냄. 신선과 단학에 관한 설화를 수집하여 32명의 전기를 수록함

《제왕운기(帝王韻紀)》 이승휴(李承休 1224-1300)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시로 쓴 장편 역사시(歷史詩). 고려의 자주성을 강조. 단군신화 수록.

《설림(說林)》은 《오산설림( 五山說林)》을 말한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1556∼1610) 지음. 조선 초부터 선조 때까지의 조선조 명인들의 일화·사적·시화 등을 비롯하여 중국 시문(詩文)에 대한 평어(評語)를 수록하였다.

《지봉유설(芝峯類說)》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 총 3,435조목을 천문‧지리‧인사‧경서 등의 25부문 182항목으로 나누어 싣고 있다. 공리공론만을 일삼던 당시의 학계에 매몰되지 않고 고증적이고 실용적인 학문태도를 중시하였다.

《계성부(稽聖賦)》 중국 남북조 시대의 문인 안지추(531~591)가 지었다는 글. 그의 저서로는《안씨가훈(顔氏家訓)》이 유명하다.

智異山辨證說

[원문 : 한국고전번역원]

天下有三大幹龍。皆始於崑崙。分派三條。以入中國。北條出河海爲冀、燕之山。餘氣爲白頭山。流爲朝鮮諸山。而白頭。卽《山海經》所謂不咸山。作一國華蓋。自蒙羅骨峴。【在北道吉州牧】逶迤西南爲長嶺。【在甲山府】流而爲頭里山。爲咸興白德山。爲永興劍山。爲分水嶺。爲鐵嶺。流爲大關嶺。爲太白山、小白山。爲竹嶺。爲鳥嶺。二嶺之南。爲伊火峴。爲俗離山。爲水分峴。爲智異山。卽方丈山也。雄盤數百里。白頭之脈。流而止於此。故一名頭流山。古羅、濟分界之地也。《拾遺記》편001。扶桑五萬里。有磅磄山。上有桃樹百圍。萬歲一實。鬱水在磅磄山東。生碧藕長千尋편002。芝峯李睟光曰。余意磅磄與方丈音近。俗謂智異山爲方丈山云。杜甫詩。方丈三韓外。且說者以爲三神山皆在我東。而方丈爲智異。瀛洲爲漢挐。蓬萊爲金剛。自羅麗傳道如是。則或可髣髴者耶。《寒竹堂涉筆》曰。金臺庵。古刹也。梁棟承塵上金畫小龍。煙煤黯昏之中。鱗鬐爪角。蠕蠕欲動。隱起如刻鏤。決非東方凡手。壁有記文甚拙。有曰智異山。一名鳳翼山。取其象也。一名頭流山。從白頭山而爲流派故云。新羅釋義相《靑丘祕記》。頭流山。一萬文殊住世。其下歲豐民愿。《地誌》。以知異爲太乙所居。群仙所會。高麗雙明齋李仁老《破閑集》。頭留。始自北朝白頭而起。花峯萼谷。綿綿聯至帶方郡。【帶方。湖南南原府。智異東距六十里。】蟠結數千里。環山而居者十餘州。歷旬月可窮其際畔。佔畢齋金公宗直《遊頭流山錄》。岳陽縣之北曰靑鶴寺洞。其東曰雙溪寺洞편003。《地誌》。頭流洞府。盤互深鉅。土性肉厚膏沃。一山皆宜人居。內多百里長谷。往往有人所不到處。不應官稅。地近南海。氣候溫暖。山中多竹。又多柿栗。自開自落。撒黍粟於高峯之上。無不茁茂。村居與僧居相雜。農功不勞而周足。而山之陽。有花開洞、岳陽洞。皆人居。而山水甚佳。舊傳有萬壽洞、靑鶴洞。萬壽洞。卽今九品臺。靑鶴洞。卽今梅溪。西有華嚴寺、燕谷寺。南有神凝寺、雙溪寺。山北咸陽郡地。有靈源洞、君子寺、鍮店村。【南師古爲福地】又有碧霄雲、楸城洞。俱勝地。智異以北。澗水合爲臨川。爲龍遊潭。到郡南嚴川。沿溪上下。泉石竝絶。竝西南局於蟾津上流。大抵登中峯。亦土峯也。郡人由嚴川而上者。以北第二峯爲中。自馬川而上者。以甑峯爲第一。此爲第二。故亦稱中焉。歷甑峯抵沮洳原。原在山之脊。而夷曠可五六里。林藪蕃茂。水泉縈廻。可耕而食云。自雲峯縣。距二十五里銅店村而上。則爲般若峯也。其最上巓爲天王峯。距平地可七十里。計以步。則爲二萬五千二百步。度以尺。則爲十五萬一千二百尺。扶輿磅礴。上于雲霄。故躋其絶頂者。雖盛夏襲裘。猶寒。罡風刮面。而頂上不過可坐十人之地也。一山之最有名者。靑鶴洞是已。麗朝雙明齋創言。而仍膾灸天下者。淸康熙收入所纂《淵鑑類函》故也。詳見《靑鶴洞辨證說》。岳陽洞편004。山水甚佳。高麗時韓惟漢。見李資謙橫甚。知禍將作。棄官挈家。隱智異山。朝廷物色之。拜官召之。惟漢仍逃隱不見於世。莫知所終。或以爲仙云。《丹學修藏》。新羅崔承祐、金可紀、僧慈惠三人入唐。從終南天師申元之遊。遇仙鍾離將軍。得內丹返還之訣。東還。以口訣授崔孤雲及李淸。淸入頭流山。修煉仙去。以訣授弟子明法。解化。以訣傳上洛君權淸。淸佯狂爲僧。修煉得道。隱於頭流山。與孤雲俱在此山。隱現無方。詳見《傳道錄》中。【《傳道錄》曰。僧慈惠與崔承祐入唐편005。受道要於申天師元之。東歸。以口訣授崔孤雲、李淸。淸入頭流山修煉。得道昇去。傳其道於僧明法。三十二解去。明法授上洛君權淸。淸편006佯狂爲僧。得道隱於頭流山。與孤雲隱現無方。逮元時。有偰賢自元來東。見上洛於般若峯。得其正法云。】南趎學修煉法登第。當己卯士禍。謫谷城仍居焉。嘗裁書送奴入智異山靑鶴洞。見綵閣中有二人對棋。一則孤雲。一則慈惠。奴留一日。受答書而還。始以二月入山。草木未生。及出乃九月初也。詳《海東異蹟》。智異山中峯聖母廟。三間版屋。所謂聖母石像。項有缺痕。我太祖捷引月之歲。倭賊入此峯。斫之而去。後人和黏屬之。乃釋迦之母摩耶夫人也。嘗見麗朝李承休《帝王韻紀》。聖母命詵師注云。今智異山天王。乃指麗太祖之妣威肅王后也。麗人習聞仙桃聖母之說。欲神其系。創爲是說。仙桃聖母。三國史。聖母祠在慶州西岳仙桃山편007。聖母。漢宣帝女。名娑蘇。早得神仙之術。來止海東。久而不返。遂爲神。世傳羅祖赫居世。乃聖母之所誕也。故中國人讚。有仙桃聖母娠賢肇邦之語。李眉叟仁老《集》云。侍中金富軾嘗朝宋。詣佑神館。見一堂設山仙像。館伴王黼曰。此貴國之神。君等知之乎。遂言曰。古有帝室之女。不夫而孕。爲人所疑。乃泛海扺辰韓。生子爲海東始王。後爲天仙帝女爲地仙。長在仙桃山。此其像也。雙溪寺沿溪石壁편008。多刻孤雲大字。世傳孤雲得道。至今往來於伽倻、智異兩山間。宣廟辛卯年間。寺僧得一紙於巖石편009間。有絶句一首曰。東國花開洞。壺中別有天。仙人推玉枕。身世倏千年。字畫如新。其字法與世傳孤雲筆同焉。徐花潭先生敬德。登頭流山巓。見羽衣仙事。見車五山《說林》及《靑鶴洞辨證說》。今不復贅。考《五洲衍文長箋》。此是頭流山仙蹟也。又有異書。亦可作此山之逸史也。我太祖在潛龍時。有僧踵門獻書云。得於智異山巖石之中。有木子乘猪下。【太祖乙亥歲誕降】復正三韓境之句。使人迎之則已去。尋之不得見。詳野史。此外黃冠緇髡之著述。互相傳授者。自三韓之世以至今日。更不知有幾許種。則但收已見者。《智異聖母》。【書名】世祖丁丑。諭八道觀察使曰。自古朝鮮祕詞大辯說及《智異聖母》、《至道說》、《漢都讖記》等書十九種。不宜藏於私處。如有藏者。許令進上云云。則《智異聖母》。又是書名也。智異山隱者方書中。有造蔘法。亦是奇書而祕傳者。石井崑、水谷大勝、銅店村、南頭流洞。竝玆山之洞天福地。天慳地祕處也。詳見《靑鶴洞辨證說》。今不贅。山之災異。亦有可記者。歲甲戌霖雨。智異山崩頹。樹木盡拔。虎豹漂死。【時。純廟十四年。】夏大水。嶺南人以爲振古所無。至於草木蟲鳥有異。亦不可無傳。新羅興德王三年戊申。遣大廉如唐。得茶子來。王命植于智異山。未知至今遺種也否。又有唐蔥。幹木根蔥。傳言得種於唐播種。故名唐蔥。竹實曰(竹+復)。我東太宗朝。關東江陵府大嶺山。竹實狀如小麥。黏如薏苡。味如蜀黍。村人摘取爲酒食云。智異山竹亦多結實。結實則死。或言竹若結實則年荒。而惟智異之竹。年年結實。早採者。色淡黃性粘。晩採者。色深黃性澁。味似小麥。山僧以爲糧。按《稽聖賦》。竹布實而根枯。蕉舒花而株枯。言其必死者。以智異竹實不死見之。乃是謬說也。且竹生米於歉荒之說。亦非實蹟也。《寒竹堂涉筆》。智異山松影蔭潭溪水。化爲魚。斑斕如袈裟。名爲袈裟魚。佔畢齋詩。達空寺下水梭花。紫鬣斑鱗味更嘉。按達空寺在雲峯縣。佛氏以魚爲水梭花。又見李睟光《芝峯類說》。又曰。知異産靑玉菜、紫玉菜。乃莖如細箸。開白花。山僧乾儲。烹而爲羹爲茹。味甚淸淡。名亦奇雅。野史。光海君十二年庚申十月。黑鳥自日本滿空過海上。而集智異山中。相戰屢日。死者多積。臭聞山外。餘鳥向北飛去。此山辨說。與《靑鶴洞辨證》。文多參互。卽智異靑鶴爲一山故也。覽者勿怪其重複焉。佔畢齋《遊頭留山錄》。多有可考。故略記之。佔畢齋金先生宗直편010。爲咸陽郡守。壬辰仲秋。同兪㵢溪好仁、曺梅溪偉。遊頭流山。有遊錄。今略記之。戊寅歷嚴川憩花巖。至地藏寺舍馬。策杖一里許。有巖曰歡喜臺。其下千仞。俯見金臺、紅蓮、白蓮諸刹。訪先涅庵。抵古涅庵。日已曛。議論臺在其西。有石窟。老宿優陀居之。嘗與三涅僧。論大小乘頓悟。仍以爲號。余試險極勞。熟睡。己卯黎明。行度一岡。此九隴之第一也。連度三四。得一洞府。寬閑奧邃。行二十里。達于義呑村。度九隴。由山脊行。不數里。循脊南。乃晉州之地。抵淸伊堂。以板爲屋。自此至永郞岾。道極懸危。日已過午。始登岾。到此仰視天王峯。永郞新羅花郞之魁。領三千徒。遨遊山水。嘗登此峯。故以名。少年臺。在峯側。蒼壁萬尋。山之東西谿谷無雜樹。皆杉檜松柟。枯死骨立者。三之一。其在岡脊者。困於風霧。枝幹皆左靡拳曲。雲髮飄颺。歷蟹踰嶺。旁有船巖。登中峯。戴土而端重。詣聖母廟。三間板屋。所謂聖母石像。項有缺畫。太祖捷引月之歲。倭登此峯。斫之而去。後人和黏屬之。釋迦之母摩耶夫人也。嘗讀李承休《帝王韻紀》。聖母命詵師註云。今智異天王。乃指高麗太祖之妣威肅王后也。高麗人習聞仙桃聖母之說。欲神其君之系。創爲是談。承休信之。筆之《韻紀》。日且昏。陰風橫吹。嵐霧坌入。衣冠皆潤。枕藉祠內。寒氣徹骨。更襲重綿。庚辰。先遣從者於香積寺具食。石矼滑甚。下數里許。有鐵鎖路甚危。穿石穴而出。投香積。無僧已二載。出門前편011盤石。望薩川蜿蜒。而諸山及海島。或全露或半露。辛巳。曉日出。霞彩映發。遂促晨餔。徑往石門。入聖母廟。時因新霽。四無纖雲。是山自北而馳。至南原。首起爲般若峯。東迤幾二百里。至此峯。更峻拔。北蟠而窮焉。雉堞若曳者。咸陽之城。白虹橫貫者。晉州之水。靑螺矗立편012者。南海巨濟之群島。若山陰、丹谿、雲峯、求禮、河東。皆隱於襞積之中。山之在北而近。曰安陰黃石。曰咸陽鷲巖。遠。曰咸陰德裕。曰公州雞龍。曰錦山走牛。曰知禮修道。曰星州伽倻。東北而近。曰山陰皇山。曰三嘉紺嶽。遠。曰大丘八公。曰安東淸涼。在東而近。曰宜寧闍崛。曰晉州集賢。遠。曰玄風毗瑟。曰淸道雲門。曰梁山圓寂。東南而近。曰泗川臥龍。在南而近。曰河東甁要。曰光陽白雲。西南而遠。曰興陽八顚。在西而近。曰雲峯荒山。遠。曰光州無等。曰扶安邊山。曰羅州錦城。曰高山威鳳。曰全州毋岳。曰靈巖月出。西北而遠。曰長水聖壽。或若培塿。或若飣餖。而惟東之八公。西之無等。在諸山稍爲穹窿也。雞立嶺以北。縹氣漫空。對馬島以南。蜃氣接天。眼界已窮。不復了了。亭午穿石門而下。登中山。亦土峯也。郡人由嚴川而上者。以北第二峯爲中。自馬川而上者。甑峯爲第一。此謂第二。故亦稱中焉。歷甑峯抵沮洳原。在山之脊。而夷曠可五六里。林藪蕃茂。水泉縈廻。可耕而食。暮登唱佛臺。其下無底。其上無草木。俯望荳原串、麗水串、蟾津之委。岳陽縣之北。曰靑鶴寺洞。其東。曰雙溪寺洞。崔孤雲嘗遊于此。宿于靈神寺。寺北有石迦葉。世祖時。每遣中使行香。其項有缺。亦爲倭所斫。迦葉殿之北峯。有二巖突立。所謂坐高臺也。法堂有蒙山畫幀。其上有贊云。頭陀第一。是爲抖擻。外已遠塵。內已離垢。得道居先。入滅於後。雪衣雞山。千秋不朽。榜印淸之小篆。乃匪懈堂之三絶也。由直指而下。面東仰視。天王峯若咫尺矣。旣下峻趾。曳杖而行。谷口有野廟。遂更衣乘馬。抵實宅里。踰登龜岾。徑還郡齋。淸聖朝《淵鑑類函》。載朝鮮智異山中有靑鶴洞。其境虛曠。四隅皆良田沃壤。宜播植。惟靑鶴棲其中。故以爲名。嚴川寺。我王考《寒竹堂涉筆》。癸卯六月편013。【謹按正廟八年】 余遊頭流山。歷入嚴川寺。問古蹟。寺僧獻一冊。載仁穆大妃爲亡弟追福願文。又曰。癸卯六月二十三日。與子光霤游頭流山。宿于君子寺。有揭板曰。天嶺之南。五十許里。有智異山。東麓下편014大溪邊。有君子寺。陳大建十一年戊戌。新羅眞平王潛邸。避位居此。因生太子而還國。遂捨家爲寺。以是名焉。又曰。晉州斷俗寺。有神行禪師碑。釋靈業書。雙溪寺편015有眞鑑國師碑。崔致遠撰書。新羅義相大師《靑丘祕訣》。頭流之山。隱居者多歸之。卓犖奇偉之士。世世多産。談道雞國演法猴地之士。亦萃于玆。甚盛。正廟朝。命申鴻周、白東脩。搜捕智異賊徒時。白公於石壁上。有坼字一紙粘焉。其紙坼字曰。八一自有尾。小一几口弓虎。禾千十木。囗王丁口。目几禾多。其下又書二句詩曰。海外限無石。流沙詔嬰洲。花誤人不誤。風驚意不驚。其下又有示八十單白春敎于寄年寄月寄日揭來進呈翻本留其家其道。未知何謂。歲純廟庚辰冬。白公庶子心鎭袖來示之。故怪而藏之。其翌淸道光帝卽位。改元曰道光。始解坼字。八一自有尾。合書則道字也。小一几。合書則光字也。口弓虎。合書則號字也。禾千。合書則秊字也。十木。合書則末字也。囗王。合書則國字也。丁口。合書則可字也。目几。合書則見字也。禾多。合書則移字也。奇其豫知有道光年號。然其下義。未知爲何意也。及當己酉。憲廟昇遐無嗣。今上承統。則適當淸帝道光年號末也。天命意移於當宁矣。歲庚戌元月淸帝崩。則非道光末耶。大抵頭流隱居者。有前知術。預作坼字讖說以示。寔是怪且異也。故付辨證之末。高麗鄭圃隱先生夢周《送智異山智居寺住持覺冏上人》。南遊何處聽溪聲。智異山高萬丈靑。春院日長無個事。沙彌來學妙蓮經。

 

【원문註】  (*원문에 딸린, 고전번역원에서 붙인 註)

 

[편-001]《拾遺記》 : 『拾遺記』부터 『或可髣髴者耶』까지는 李睟光 撰 《芝峯類說 卷2·山》에 보인다.

[편-002]尋 : 《芝峯類說》에는 『常』으로 되어 있다.

[편-003]岳陽縣之北曰靑鶴寺洞其東曰雙溪寺洞 : 아래의 『農功不勞而周足』과 『而山之陽』 사이에 있었는데, 《靑鶴洞辨證說》에 근거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편-004]岳陽洞 : 『岳陽洞』부터 『或以爲仙云』까지는 李重煥 撰 《擇里志·山水》에 보인다.

[편-005]僧慈惠與崔承祐入唐 : 『僧慈惠與崔承祐入唐』부터 『得其正法』까지는 韓無畏 撰 《海東傳道錄》에 보인다.

[편-006]淸 : 《海東傳道錄》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편-007]聖母祠在慶州西岳仙桃山 : 『聖母祠在慶州西岳仙桃山』부터 『此其像也』까지는 洪萬宗 撰 《海東異蹟·赫居世》에 보인다.[편-008]雙溪寺沿溪石壁 : 『雙溪寺沿溪石壁』부터 『其字法與世傳孤雲筆同焉』까지는 《擇里志·山水》에 보인다.

[편-009]石 : 《擇里志》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편-010]佔畢齋金先生宗直 : 『佔畢齋金先生宗直』부터『徑還郡齋』까지는 李德懋 撰 《靑莊館全書 卷69·佔畢齋遊頭流山》에 보인다.

[편-011]前 : 《靑莊館全書》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편-012]立 : 《靑莊館全書》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편-013]癸卯六月 : 『癸卯六月』부터 『崔致遠撰竝書』까지는 《靑莊館全書 卷69·寒竹堂涉筆下》에 실려 있는 여러 글에 보이는데, 嚴川寺에 관해선 《嚴川古蹟》에, 君子寺에 관해선 《君子寺》에, 斷俗寺와 雙溪寺에 관해선 《羅麗石刻》에 각각 보인다.

[편-014]下 : 《靑莊館全書》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편-015]寺 : 《靑莊館全書》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