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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유봉래산일기와 음식

 

 

 

풀 속의 오솔길을 따라 한 곳에 이르니, 숲속 어둡게 그늘진 곳에서 바람 소리가 성난 듯 들려왔다. 천 자 깎아지른 벼랑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인데, 귀신이 대숲에서 울부짖는 것 같았다. 절벽 위에 한 신당(神堂)이 있는데, 수성당(水聖堂)이라고 했다. 벽 위에 한 부인이 천연히 앉아 있는 그림을 그렸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물귀신이 신당에 있는 것 같았다. 초연하면서도 슬프고 숙연하면서도 두려워, 떨려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난곡(蘭谷) 소승규(蘇昇奎)유봉래산일기(遊蓬萊山日記)1897414일부터 55일까지 19일 동안의 여정을 일기형식으로 적어 부안 곳곳의 자원에 대한 기억을 들려준다. 난곡 일행이 격포진(格浦鎭)과 적벽강을 유람하며 수성당에 이른 날인 423, 그 느낌을 이렇게 적고 있다.

 

유봉래산일기는 산수의 유려함을 기록하는 한편 동행했던 소초 김은학과 동운 황치경 등 3명이 번갈아 지은 여든 세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난곡 소승규가 변산 채석강에서 지은 시를 소개하면,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

나 또한 욕심을 잃은 지 이미 오래니

강호 어느 곳 경치가 가장 좋던가.

 

白鷗翩翩莫飛去, 捕爾者非我(백구편편막비거, 포이자비아)

我亦忘機今己久, 江湖何處景最好(아역망기금기구, 강호하처경최호)

 

동행하는 선비들이 돌아가며 시를 짓는 경우에는 미리 떼어둔 운을 맞추어 지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시를 지을 때나 산수를 묘사할 때도 고금의 예를 인용하는 것을 보면 좋은 글쓰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격포에서 작은 고개를 넘어 의정부포(議政府浦)에 이르자 어살(漁箭)이 물속에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장삿배들이 바닷가에 매여 있는데, 돛이 없는 작은 이양선(異樣船) 한 척 이 바다 위에 떠 있었다. 풍랑에 흔들려 몹시 위태롭게 보였다. 배 안에는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아무 생각도 없이 앉아 있고 누워 있었다. 그래서 까닭을 물었더니, 왜인(倭人)이 먼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다 이곳에 와서 파는데, 수참(水站)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그 배의 모양을 보니 뱃머리에 두 기둥을 마주 세웠는데 높이는 겨우 너댓 자였다. 기둥머리에 놓은 것은 오리(鵝鴨) 같으니 괴이한 일이다. 곳곳마다 고기 잡는 그물이고, 집집마다 막걸리여서, 술 마시고픈 생각을 참기 어려워 술집에 몇 잔 마셨다. 배 한 척을 세내어 중류에 띄워 놓고 가다가 멈추는 곳을 찾아 쉬었다.

마침 한 사람이 탕건에 지팡이 차림으로 뱃머리에 와서 섰다. 그의 성을 물으니 흥덕에 사는 진선달(鎭先達)이라고 했다. 어살의 주인인데 이곳에 와 머문다고 한다. 잠시 뒤에 고기잡이 배 한 척에 뱃사공 수십 명이 타고 노를 저으며 노래에 화답했다. 고기를 잡아가지고 오더니 장삿배에 자주 넘겼다. 그 모습 역시 장관이었다.

배에서 내리려고 하자 진선달이 저녁밥에 반찬거리를 주겠다는 생각에서 생선 네 마리를 주었다. 초면에 호의를 거절하자니 공손치 않아 보였고, 받자니 염치없어 보였다. 그러나 공손치 못한 것이 염치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여겼기에 생선을 지고 온 종을 보내어 저녁밥을 지으라고 재촉하게 했다. 석양 돌아가는 길에 봉우리 그늘이 땅에 지기에 올려다보니 봉화대였다

 

이는 소승규의 유봉래산일기에 전하는 글이다.

1897년 당시의 궁항 마을 풍경이 고스란히 그려졌다. 그런데 궁항을 의정부포(議政府浦)라 불렀는데 포 앞에 왜 의정부가 붙여졌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격포마을 앞 동쪽 들이 궁답(宮畓)으로 조선시대 말 조대비(趙大妃)의 논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의정부포도 같은 맥락의 땅이름들인지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궁항의 들쭉날쭉한 바닷가에서는 예부터 어전어업(漁箭漁業, 어살)이 성했다. 어살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갯벌에 울타리처럼 대나무나 싸리나무를 엮어 함정을 만들어 놓고 밀물을 따라 밀려온 고기떼가 썰물 때 이 울타리 안에 갇히게 하는 어로방법이다. 요즘처럼 어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주로 연근해 어장에서 어업이 이루어지던 시절에 어찌 보면 원시적이랄 수 있는 이 어살이야말로 조수를 따라 회유해 들어오는 고기떼를 일시에 다량으로 포획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어로방법 중의 하나였다. 그러기에 "좋은 목에 있는 어살은 못자리하고도 안 바꾼다."는 옛말이 있다.

궁항에는 도당금 주변에 어살의 원조격인 독살(石箭, 石簾)이 많았으며,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는 곳이 있다. 독살은 대나무나 싸리나무 대신 돌로 담을 쌓는다는 점이 다를 뿐, 어살의 원리와 같다. 궁항의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도당금에 3~4곳의 독살이 있었으며, 그 때까지만 해도 독살에 고기가 들었다고 한다.

어살 같은 경우 워낙 부가가치가 높다보니 왕실이나 권문세가들이 요즈음 재벌들이 땅 투기하듯 목 좋은 어살을 장악했었다.

그 예로 효종 때 부안에는 어살이 20군데가 있었는데, 그 중 11군데는 궁가에 점유 당하고, 8군데는 성균관에서 붙였으며, 단지 1군데만 부안현에서 붙였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숙경공주 집에 빼앗기자, 전라감사 정지화는 빼앗겼던 옛 어살 1군데를 본 현에 다시 붙여 달라고 상소를 올렸음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에게 갯벌은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별스럽지 않은 풍경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갯벌을 품은 해안은 5%에 불과하다. 그만큼 희귀하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서해안은 지구상 5대 갯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전북 부안은 이 갯벌이 주는 보물, 조개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부안은 예부터 어염시초(魚鹽柴草)해서 생거부안(生巨扶安)하다는 말을 들어왔다. 물고기, 소금 같은 물산이 풍부해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라는 뜻이다. 부안의 갯벌은 강물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어 염분이 상대적으로 낮은 데다 먹이 생물이 풍부하다 보니 다양한 조개가 살고 있다.

 

마포(馬浦) 염막(鹽幕)에 이르러 소금 굽는 것을 보고 비로소 바닷물을 끓여 소금 만드는 이익이 큰 것과 소금 만드는 인부의 생애가 괴로운 것을 알았다.”

 

이 또한 유봉래산일기에 전하는 글이다.

소승규는 마포 마을 앞까지 조수가 드나들 무렵인 18974~5월경에 마포를 지나 격포로 가는 길에 마포의 염막을 보았던 것으로 그 당시 마포 갯벌에서 소금 굽는 광경이 선하게 그려진다.

변산면 합구마을에 사는 김효곤씨네 부부는 어전(漁箭) 방식을 고수한다. 어전이란 대나무로 울타리를 쳐 놓고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고기를 대나무 울타리 안에 가둬 잡는 방식이다. 이들에게 최고의 반찬은 백합조개다. 백합조개찜, 백합전통찜, 학꽁치구이, 졸복매운탕처럼 이름만 들어도 침이 꼴깍 넘어가는 바다의 밥상을 선보이고 있다.

 

전북의 어전

 

어전(漁箭)이란 일명 정치어업(定置漁業)이라고도 불리는 전통 어로 방법으로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 물고기를 함정에 빠뜨려 포획하는 방법의 어로 형태를 말한다. 어전(漁箭)은 어량(魚梁), 어기(漁基), 어장(魚腸), 방렴(防簾)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어전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의 주기적 변화인 밀물과 썰물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즉 물이 들어 왔을 때 함께 들어온 물고기를 특정한 모양의 구조물을 이용하여 함정에 빠뜨림으로써 물고기를 잡는 것이다.

 

어전의 발생 조건은 우리나라의 중부 서해안에 자리한 고군산군도 지역의 자연 조건과도 일치하여 이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어전을 해왔는데 고군산군도에서 행해진 어전은 그 방법과 종류가 독특해 우리나라 서해안 어전의 한 지류를 형성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고군산군도 어전 어업에 대한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호남에 어살이 3분되어 있으니 울타리 길이가 600파에서 최소 300파에 이르며 어살에 부과하는 세율을 보면 고군산군도의 세율이 가장 높고, 위도가 그 다음, 영광, 무안, 만경이 그 다음, 무장, 홍덕, 고부, 옥구가 그 다음이라고 하여 고군산군도의 어전이 가장 규모가 크고 옥구 지역 또한 어전을 이용한 어로 작업이 활발했던 곳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이르면 우리의 전통적인 어법인 주목망(柱木網), 홍선망(引船網), 어전, 중선망(中船網) 등은 꾸준히 행해졌지만 조선 총독부에서 우리나라 어업 생산량 증대 방안의 일환으로 일본에서 유입된 어구 어법의 보급을 꾸준하게 추진한 결과 점진적으로 일본의 어로 방법이 보편화 되게 된다.

 

하지만 호황을 누리던 서해안의 수산업과 어전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전승되지만 해방과 함께 선박 어법의 발달과 어족 자원의 부족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여 70년대에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전라도무장현도(全羅道茂長縣圖)’는 어전(漁箭)이 그려져 있는 것이 독특하다.

남원 일대에서는 대각선 방향으로 살담을 쌓아 강물을 가로막고, 그 끝에 대나무로 엮은 발을 설치해 고기를 가두는 독살(石箭)이 쓰이기도 한다. 봄철에는 섬진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오는 황어 등을 어획하고, 늦여름과 가을에는 바다로 내려가는 은어 · 참게 등을 주로 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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