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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전라감사 밥상, ‘찬품극정결(饌品極精潔)’



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이하곤(1677∼1724)은 전라감사가 먹었던 밥상을 ‘찬품극정결(饌品極精潔)’이라 기록했다.
'찬품극정결(饌品極精潔)'은 '음식에 극진히 정성을 다해 바르고 훌륭하다'는 의미다. 
그는 1722년 10월 29일 전주에서 전라감사 황이장(1653~1728, 1722년 9월~1724년 1월 재임)으로부터 저녁에 술과 안주를 대접받았을 때 나온 찬품을 대하곤 이처럼 말했다.
이는 송영애 전주대 식품산업연구소 연구교수의 연구 결과물이다.
 전주문화재단은 2019년 '청년으로 다시 태어나는 전라감영'을 주제로 '문화벗담'을 발간했다.
장명수 전북대 명예총장은 ‘관찰사 밥상, 내아에서 받다’를 통해 관찰사의 밥상 상물림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장 명예총장은 “국가적 경축이나 특별한 날은 감영 영리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데 임금의 은혜를 널리 퍼지게 함이었다”며 “비장과 육장이 먹고 나면 통인들이 먹고 이어 하급 관리들이 먹고 마지막으로 부엌데기들이 나눠 먹는다"고 했다.
관찰사는 왕명을 지방 수령에게 전달하고 수령을 평가하는 왕권 대행자이자 지방을 규찰(糾察)하는 최고 권력자였다.
그만큼 감영에서는 800여명이나 되는 영리가 근무했고, 외부 손님과 고을 백성 등이 수시로 찾아 영주(주방)에서는 이들을 위한 다양한 음식을 챙겼다.
감영에서 벌이는 잔치도 많아 칠월연(고종황제 탄생일)엔 당대 판소리 명창들이 밤 늦게까지 열창했고 경연이 끝나면 국수, 떡, 유과 등을 나눠줬다.
동짓날엔 판소리 장원을 뽑는 대사습놀이가 벌어지는 동안에는 팥죽을 한 그릇씩을 맛보게 했다. 이처럼 음식은 왕실문화를 계승하는 것이자 상물림을 통해 통치 수단이 됐고, 전주 한정식의 뿌리가 됐다.
전라관찰사는 아침에 선화당에 출근해 집무를 보고, 오후에 내아에서 식사를 하는 등 개인생활을 했다.
장 명예총장은 "취미 생활은 내아 동쪽에 있는 연신당에서 했고, 연신당 출입문 앞에는 관찰사의 내아 공사 생활을 지원하는 비서실장인 예방비장이 근무하는 응청당이 있었다"고 했다.
관찰사가 내아에서 잠을 깰 무렵이면 시종들이 댓돌 양쪽에서 기립을 했다고 한다.
관찰사가 일어나 기침을 하고 방울을 흔들어 일어났음을 알리면, 시종들이 안부를 여쭙고 마루에 세숫물을 준비해 올렸다.
장 명예총장은 "흔히 임금이 생활하는 궁을 구중궁궐이라 말한다. 관찰사의 처소인 내아도 이에 못지않게 깊숙이 놓여 있었다. 감영을 들어가는 포정문에 들어서면 중삼문이 열리고 다시 내삼문을 지나 선화당을 건너 연신당을 거쳐 내아에 이른다. 구중내아였다"고 했다.
조선시대 백성들의 식사는 먹을 양식이 부족했기에 아침과 저녁 2끼가 표준이었다고 한다.
양반과 부유층은 새벽에 죽을 먹고, 아침, 점심, 저녁에 이어 야식까지 5끼를 먹었다.
임금 밥상은 수라상으로, 관찰사 밥상은 진지상으로 불렸다. 관찰사 밥상의 기본은 3탕, 9첩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라관찰사 밥상을 차리는 곳은 감영 주방인 영고청이었다.
영고청에는 지금으로 치면 셰프인 칼자이를 필두로 고기 담당, 채소 담당, 밥 짓기 담당, 물 담담 등이 있었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밥상은 노비들이 들고 내아 부엌으로 가져갔다.
내아 부엌으로 옮겨진 이 밥상은 죽과 찌개를 데우고 반찬을 다시 차리는 과정을 거쳐 예방비장의 지휘에 따라 관찰사 앞에 놓여졌다.
관찰사 밥상에는 기생 교육기관인 교방에서 온 기녀가 앉아서 잔심부름을 했다고 한다.
수저를 올리고 반찬을 집어주며 생선 가시를 발라 먹기 좋게 입에 받쳤다. 식사 중에는 반주가 곁들여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으로 경사스러운 날에 임금의 은혜가 만백성에게 퍼지도록 하기 위해 감영 벼슬아치들에게 음식이 제공됐다.
이때 관찰사 밥상 물림이 있었다고 한다.
관찰사 비서인 비장이 먼저 먹고 나면 잔신부름꾼들이 먹고, 이어 하급 관리들까지 먹은 뒤 마지막으로 부엌데기 등이 남은 음식을 나눠 먹었다고 한다.
그러고도 남은 음식은 기름종이에 집으로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 이렇게 가져간 음식이 요리 표본이 됐다.
장 명예총장은 "아전집 부엌에서 모방과 재창조 과정을 거친 요리법이 부유층으로 갔고, 바로 이것이 전주 한식의 뿌리가 됐다"면서 "관찰사의 밥상이 전주한정식의 원류"라고 말했다.
송영애 전주대 식품산업연구소 연구교수는 ‘전라감영 관찰사는 어떤 음식을 드셨을까’에서 “관찰사 밥상 음식을 선정하기 위해선 다양한 문헌과 함께 이 지역 최고 권력자였고, 전주의 식재료와 조리법을 활용한 것을 고려해야 한다”며 “안주상이 아닌 전통 상차림으로 9첩 반상에 준해 문헌에 기초한 식재료로 선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반상은 밥이 주식, 반찬이 부식이 되는 차림으로, 반찬의 가짓수에 따라 첩으로 구분한다.
9첩 밥상의 '첩'은 밥, 국, 김치, 장, 찌개, 찜, 전골 이외의 음식을 말한다.
'쟁첩'에 담는 반찬의 수에 따라 첩의 수가 달라진다. 반찬은 가짓수에 따라 3첩, 5첩, 7첩, 9첩 반상으로 나뉘었다. 임금에게 올리는 수라상은 12첩이었고, 민가는 최고 9첩까지 제한됐다고 한다.
이에 송교수는 "조선시대에는 계급에 따라 의식주가 뚜렷하게 구분됐다"면서 "관찰사는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지방 8도에서는 왕권을 대행하는 최고 통치자였음을 감안해 전라감영의 관찰사 밥상을 9첩으로 제시했다"고 밝혔다.
이어 "음식과 관련된 고문헌이 전무한 전주에서 외국인(G. C. Foulk)이 기록해둔 전라감영에서 대접받은 아침 밥상은 전라감영의 음식문화를 알 수 있는 최고(最古)이자 최초의 기록"이라며 "타 지역의 감영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감영의 주안상, 연회 문화 등이 있어 그 가치를 더 해준다"고 설명했다.

'콩을 섞은 쌀밥과 무와 계란이 들어간 소고깃국, 꿩탕, 숯불고기, 닭구이, 콩나물무침….’

1884년 11월 10일 전라감영을 방문한 주한미국공사관 해군무관 조지 클레이턴 포크(1856~1893)는 관찰사 김성근(1839∼1919)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은 다음 날 오전 10시 풍패지관(豊沛之館·보물 제583호)에서 받은 아침 밥상을 이같이 소개했다.
전라감영은 조선시대 지금의 전북과 전남, 제주를 총괄하던 곳으로 전주에 자리했으며 포크는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전라감영을 방문하기 6개월 전, 주한미국공사관에 임명됐다.
포크는 원반 위에 차려진 밥, 국, 반찬 등 17가지 음식의 종류와 위치를 그림으로 그리고 번호를 매겨 여행일기에 자세히 기록했다.
그는 이를 “가슴까지 차오르는 엄청난 밥상”이라고 극찬했다.
포크의 기록은 미 국무부 명에 따라 조선의 경제적 가치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전주의 음식문화와 조리법을 알 수 있게 기록한 최고(最古)·최초 문헌이자 타 지역 감영에서 발견되지 않은 감영의 접대·연희 상차림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지금까지 전주의 음식은 세종실록지리지 등 다양한 문헌과 ‘미암일기’(유희준), ‘호남일기’(이석표, 이상황), ‘완영일록’(서유구) 등 전라감사들이 기록한 일지에 등장하지만 이처럼 식자재와 조리법 등을 유추할 수 있게 자세히 기록한 것은 유일하다.
포크는 다양한 상차림과 연희문화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했다.
그는 주안상을 받은 자리에서 “기생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가늘고 큰 목소리로 ‘다 잡수소!’라고 외치자 다른 남자들 3명이 복창했다.
작은 접시에 음식이 최고 1피트(약 30㎝)가량 높이 쌓였고, 접시마다 열 사람이 먹을 만큼 많았다”고 적었다.
또 “커다란 연희에는 사람들이 현란한 옷을 입고 있었고, 나도 제복이 아니라 아주 단정하지만 하찮은 캐시시어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그들은 내가 그곳의 주인이라고 말해주었다”고 전했다.
그는 전라감영에서 받은 융성한 대접에 대해 “모든 소리와 유흥은 중국에서 본 어떤 것보다 웅장했다. 실로 환상적인 날이다. 감영은 작은 왕궁이다”고 감탄했다.
전주시는 포크의 일기를 토대로 전라감염 복원사업에 발맞춰 관찰사 밥상과 외국인 손님 접대상, 연회 등을 복원했다.
관찰사 밥상은 조선시대 전라감영 관찰사(종2품)의 상차림을 기본으로 전주 식자재와 조리법을 활용하되, 현대 식문화까지 고려해 조선시대 수라상(12첩)보다 한 단계 낮은 9첩 반상(일상적 상차림)으로 개발했다.
전라감영 관찰사 밥상은 ‘맛의 도시’ 전주의 조리법으로 복원한 밥상들로, 9첩반상 2종(춘하·추동)과 5첩반상 1종, 국밥 2종, 다과 1종, 도시락 1종 등으로 이뤄졌다.
송교수와 전주시는 2019년 전라감사 서유구의 공문서 일기인 <완영일록>과 조선시대 학자 유희춘의 <미암일기> 등 고문헌과 1884년 주한미국공사관 대리공사였던 조지 클레이튼 포크(1856∼1893)가 그린 일기장을 토대로 조선시대 전라도 식재료와 조리법을 연구해 관찰사 밥상을 복원했다.
그 결과, 관찰사 밥상에 오른 기본 음식은 △쌀밥 △고깃국 △김치(강수저, 배추김치, 물김치) △장류(간장, 초간장, 초고추장) △찌개(생선조치, 조기찌개) △닭찜 △쇠고기 전골 등이 선정됐다.
또, 반찬은 △무생채 △미나리나물 △숭어구이 △생치조림 △양하적 △죽순해 △쇠고기자반 △새우젓 △어채 등이 이름을 올렸다.
최종 음식 선정 기준은 가치성, 지역성, 현실성 등을 고려해 조선시대에 왕권을 대행하는 지역 최고통치자인 전라감영의 관찰사 밥상을 9첩으로 제시했으며, 감영이 위치한 전주의 식재료와 조리법을 고려했다.
시는 앞으로 시민과 관광객들이 실제 관찰사 밥상을 맛볼 수 있도록 상품으로 만들어 지역 음식점에서 메뉴별로 먹을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관찰사 밥상 취급업소를 선정해 판매할 수 있도록 교육할 계획이다.
137년 전 조선에 온 외국인에게 전라감사가 내어준 상차림처럼 상품화한 관찰사 밥상에 전주의 맛을 통해 코로나19로 침체한 지역경제에 기여하도록 세심하게 전라감사가 먹었던 밥상을 상품화할 계획이다.


망궐례와 전라감사 행차

전라감사는 백성을 잘 받들어 안민보위를 잘하고 있다는 다짐의 예를 갖춰 한양의 임금께 망궐례를 올렸다.
이는 공직자로서의 바른 자세를 다짐하는 의식, 부활한 2008년 망궐례 역시 당대의 역사속에서 공직자의 바른 자세를 되돌아보는 역사적 교훈을 담고 있다.
망궐례는 경기전에서의 열림마당, 전라감사 행차 재현, 객사에서의 망궐례 재연으로 구성됐다.
전라감사 행차는 군관과 기장대, 집사도사, 취타대 청옥용정 의장대 뚝 비장,육방 별감 순령수등 112명의 행렬이 뒤따랐다.
임금에게 예를 올리는 망궐례가 마치면 판소리와 민요 무용 모듬북연주 등 전라감사 향연이 펼쳐졌다.
2008 년 전라감사 행차와 망궐례의 전라관찰사는 정숙지 관찰사.
전라감사 정숙지선생 (1499년(연산5년)에 전라관찰사를 역임)후손인 정택수씨가 그 대역을 맡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숙지의 인간됨을 ‘상명하고 강개하며, 여러 관직을 지내어 감당하지 못할 일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숙지 관찰사의 후손인 정택수(1937년생, 서울시) 씨가 맡았다.
정씨는 정숙지 관찰사의 16세손이다.
상공부에서 공직 생활을 하였으며, 은퇴 후 전기조명기구 제조 기업의 대표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봉화정씨 참판공파 종회장을 맡고 있었다.
과거에는 전라관찰사 역을 망궐례 집행위원회가 지목해 선정했다. 2008년에는 전라관찰사를 배출한 명문가문들이 적극적으로 본 행사 참여를 희망해 문의 전화가 쇄도했다.
자신의 가문을 적극적으로 홍보한 명문가문 중에는 행사 비용의 일부를 지원하겠다는 가문이 있을 정도로 높은 관심을 보였다.
최종 물망에 오른 명문가문들은 전라관찰사 역을 한 명만 선정할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관찰사를 선출해 행사를 진행하자는 의견을 제시해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조선시대 전라관찰사를 역임한 모든 가문을 초청해 관찰사 행렬을 뒤따르게 하자는 좋은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1월 2일 ‘2008 전라관찰사 망궐례와 행차’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40여 명의 봉화정씨 원로 종친들이 본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전주 나들이를 나섰다. 이날 한국사진작가협회 임원 및 회원 2,000여 명이 본 행사의 명 장면을 찾아 촬영했다.

망궐례란?

‘망궐례’는 관찰사 및 관리들이 나라와 백성, 그리고 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행사로 매월 1일과 15일에 객사에서 행해졌던 의례이다.
객사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여관으로 출장 중이던 관리들이 묵었던 곳이며 왕과 나라에 제례를 올릴 수 있는 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망궐례를 통하여 나라와 백성에게 헌신하도록 마음가짐을 바로 잡는 엄숙한 의식을 행한 곳으로 충성맹세의 장이었다.

전라관찰사 행차란?

‘전라관찰사’는 전라감사라고도 한다. 현재의 전라남북도지사, 제주도지사의 행정영역을 아우르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의 통치 대리자였다. 전라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던 전주는 호남을 관할하는 중심도시였다.
‘전라관찰사 행차’는 왕의 권한을 부여받은 전라관찰사가 이곳 전주를 출발하여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애환과 고통을 직접 듣고 해결하기 위해 행차하는 이동 도청이며 감영이었다.
전라관찰사는 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의 행차라 하여 왕의 반차 다음가는 행렬이었다. 관리와 국가에 속한 관속까지 대동하여 백성들에게 큰 구경꺼리를 주던 행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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