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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부안의 청어와 어살

 김홍도의 그림 ‘어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 속에 나무를 세워 고기를 들게 하는 울을 어살 또는 어전(漁箭)이라고 한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종실록 13, 중종 648일 정해 3번째기사(1511년 명 정덕(正德) 6) ‘부안현감 김개가 군무·어전·번상 등의 일로 상소하니 정원에 내리다를 보면 흥미로운 일이 기록됐다.

 

부안 현감(扶安縣監) 김개(金漑)가 상소했눈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이번 군적(軍籍)을 고칠 때, 산간 고을의 조졸(漕卒)과 연해 지방(沿海地方)의 육군을 서로 바꾼다고 한 것은, 군정(軍政)을 의논하는 자가 무슨 소견이 있어 이렇게 한 것인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각건대, 최근 수년간에 조운(漕運)이 실패가 많으니, 이는 산간 고을 거주민들이 배를 부릴 줄 몰라서, 많은 실패를 가져온 것이다.’ 하여, 이 계책이 있었는가 합니다. 그러나 구군졸(舊軍卒)은 산간 고을에 살더라도 그 업을 대대로 전하여 실지 조운하는 일에 익숙하고, 신군졸(新軍卒)은 해변에 가까이 살아도 본업이 육군이니, 배에 대한 일에는 결코 잘 알지 못합니다. 이런 전혀 알지 못하는 군졸에게 조운선을 맡겨 풍파 위로 몰고 가게 한다면, 취패(臭敗)하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근자에 듣건대, 신군졸들이 조선(漕船) 개조하는 일을 모르므로, 재산을 털어 사람을 고용해서 만들어 조선소에서 전세(田稅)를 싣는 곳으로 돌아온다 합니다. 빈 배를 전운(轉運)함이 어려운 일이 아니요, 해로가 멀지 않은데도 자신이 전운하지 못하고 사람을 고용하여 전운하는데, 더구나 창해 풍파에 여러 날을 전운하여 스스로 서울까지 닿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감당하지 못하여 재산을 내어 사람을 사서 전운할 것이니, 그 폐해가 하나입니다.

대저 사람의 재주는 한정이 있으니, 스스로 뛰어나서 문·무과 출신이 되는 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중 좀 재주가 있는 자는 혹 녹사(錄事습독(習讀)이 되어 벼슬길에 이르며, 혹은 갑사(甲士별시위(別侍衛)가 되어 제몸의 벼슬을 지킵니다. 그런데 조수군(漕水軍) 같은 경우는, 양과(兩科) 외의 모든 잡과(雜科)의 사로(仕路)에 다 통하지 못합니다. 지금 산간 고을 조군의 정원을 바다 가까운 고을에 옮기면 근해 지방의 백성이 태반은 조졸(漕卒)이 될 것이니, 혹 제 스스로 잡직(雜職)의 벼슬아치가 되고 싶더라도 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의 억울이 이보다 더 큼이 없으니, 그 폐해가 둘입니다.

또 조졸이 처음에는 본도의 전세(田稅)를 수운하고, 다시 충청도 전세를 수운하여 1년 동안에 혹 두 번씩 전운하기도 합니다. 또 경창(京倉)에 수납(輸納)할 때에는 거의 다 모감(耗減)되어 그 모자라는 것을 한 배의 군졸이 모두 나누어 바치게 되니, 원근의 일족이나 절린(切隣)이 그 해를 입습니다. 이 번이 그러하니 다음 번도 그리하여, 조졸의 생계는 날로 군색해집니다. 조종조에서 처음 조졸을 설치할 때에, 어찌 다 연해 거민으로 충당하여 조참(漕站)에 나가기에 편리하게 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마는, 반드시 이 군졸이 평민 중에서 제일 괴로운 자들이므로 대개 산간 고을의 백성들도 아울러 충당하여 힘드는 것을 고르게 하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결같이 산간 고을 조졸을 모두 근해 거민으로 바꾼다면, 신의 생각으로는 연해 지방 고을은 34년을 지나지 않아 민생이 궁핍해져서 끝내는 구언할 수 없게 될까 염려되니, 그 폐해가 셋입니다. 대신에게 하유하시어 한결같이 구법을 준수하고 서로 바꾸지 말게 하여, 길이 민폐를 제거하소서.

국가에서 왜적이 변경을 침구한 후로 남쪽 지방 군민 중 무재(武才) 있는 자를 다 추려내어 번을 나누어 방수(防戍)하여, 다시 침구하는 변에 대비하는 것은 생각이 매우 원대합니다. 대저, 군사가 많으나 정밀하지 못하면 적고 정밀함만 못합니다. 적이 오는데 우리 군사가 먼저 지쳐 벌써 노병(老兵)이 된다면 비록 많은들 무엇하겠습니까? 지금 각진(各鎭)에 번을 나누어 수자리하는 군졸을 본지의 원 군사와 합하면 수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니, 방비하는 일을 잊지 않고 밤낮으로 정려한다면 또한 도둑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추동 간에 왜노(倭奴)의 거짓말로 인하여, ()을 합하여 방수(防戍)시키고 종군하는 집에서 수개월의 양곡을 준비하게 하니, 능히 스스로 계속 운수할 수 있는 자 몇 사람이겠습니까? 둔병(屯兵)한 곳에 주리고 궁핍함이 문득 이르러, 인마가 엎어지고 도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서로 잇달았으니, 주리고 궁핍하고 게으르고 미련한 군졸로 강한 도둑의 불의의 변에 대처한다면 패망하지 않을 자 드물 것입니다. 수자리를 파할 기약이 없으니 해가 지날수록 군사는 더약해져서 도둑을 대적할 수 없고 변방 성지(城地)를 보전할 수 없겠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평시에는 번을 나누어 방수하여 번갈아가며 군마의 힘을 쉬게 하여, 도둑떼가 변방을 침범하면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 지키다가 힘이 대적할 수 없게 된 뒤에, 또 하번(下番) 군사를 징집하여 제어함이 가할 듯 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모신(謀臣)들에게 수의하여 영세 장구한 계책을 도모하소서.

국가가 연해 지방의 백성에게 어전(魚箭)을 세워 고기를 잡아서 그 이를 얻게 하고, 또 세납 고기를 사재감(司宰監)에 바치게 한 것이 옛 규례였는데, 지난 폐조(廢朝) 신유년(1501, 연산군 7)에는, 각도의 어전세를 모두 포목으로 바꾸어 사섬시(司贍寺)에 바쳐, 국가 경비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어전이 과연 이익이 많은 것이라면, 빈민에게 주어 그 생계로 삼게 함이 마땅합니다. 국가에서는 들어오는 것을 계량해 비용을 삼고, 또 함부로 쓰지 않는다면 상례로 공납(貢納)하는 수량으로도 경상비에 부족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어전에서 거두어 들여 백성들과 이익을 다툰 후에 쓰기에 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처음 상정(詳定)할 때 황폐한 어전에 절반을 추가 과세하였으니, 세납을 산출하는 잔재주가 심합니다. 대저 백성이 고기를 잡는 데는, 자진하여 나가서 이() 얻은 것을 허가하고 거기에 따라 세를 받는 것은 그런대로 가하지만, 힘이 혹 미치지 못하고 혹은 사고로 황폐하게 되었는데도 그대로 그 절반을 세 받는 것은 매우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신이 맡은 부안현 서해에 활도(猾島)가 있는데, 옛날부터 청어(靑魚)가 많이 나서 서민(庶民)들 중 전답 없는 자들이 섬을 의지하여 어전을 매고 이를 보는데, 예전에는 15개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상정할 때, 이 섬 어전의 이가 다른 곳의 배나 된다 하여 청어의 수량을 많이 정하니 관에 바치는 수량이 많다고 하겠으나 전일 많이 잡힐 때에는 백성들이 그런대로 어전 설치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지난 을축년(1505, 연산군 11) 뒤로는 청어가 나지 않고 세납은 전과 같아, 어전 설치자들의 소득이 바치는 수량을 충당하지 못하니, 지난 정묘년(1507, 중종 2)간에 국가에서 그 폐를 분명히 알고, 병인년 이전의 황폐한 어전은 모두 세를 거두지 말게 하며, 정묘년 이후의 황폐한 어전은 자세히 실지를 캐어 세를 면하게 하니, 덕이 지극히 넉넉합니다. 그러나 병인년 이전의 것은 실지 황폐했어도, 경차관(敬差官, 지방 민정 등을 살피기 위하여 임금이 파견하는 관원)이 어전 설치한 준례대로 문서를 만들었으니, 세납 공물의 징수를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정묘년에 세안을 마련하는 도회관(都會官), 수교(受敎)의 본의는 헤아리지 않고 황폐한 어전에 대하여 절반을 더 세로 징수하는 것으로 시행하니, 국가에서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가 지극하지 않음이 아니나 백성으로서 은택을 입지 못함이 이러하니, 역시 통렬히 개혁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기사년(1509, 중종 4) 가을 본 임지에 와서 세공(稅貢)의 미납을 상고하니, 그 수가 매우 많았으므로 그 연유를 물으니 전에 어전 설치한 자가 태반이나 도망가고 이웃 백성들도 따라 도망갔으며, 현재 있는 자도 재산이 없어 여러 해를 납입하지 못한 것이다.’ 합니다. 신이 곧 그 세공의 수량을 구획(區劃)하여 인리 족친에게 나누어서, 일시에 독촉 진수하지 않고 수년을 기한하여 준비되는대로 납입하게 하였는데도, 지금까지 3년 동안 징수된 것이 아직 절반이 못 되며, 민생이 궁핍하여 다시 징수할 형편도 되지 못하므로 신이 그윽이 생민을 위해서 매우 아깝게 여깁니다. 두어 고을 백성의 황폐한 어전 세납을 감할 수 있을 때가 없고, 전일 세 받지 말라는 전지(傳旨)는 허문(虛文)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왕의 구법을 따르시어, 빨리 어전세로 포목을 사서 바치는 것을 없애고 어물만을 거두어서 백성들과 이를 다투지 않는 뜻을 보이소서. 그리고 활도같은 데는, 병인년 이후 3년 간의 묵은 어전세를 역시 해조에 명하시어, 그 미납된 수량을 상고해서 우선 임시로 절반을 감하여 고을 인민의 걱정을 풀어주소서.

 

국가에서 외방에 거주하는 공천(公賤)으로 번을 나누어 선상(選上, 시골의 노비를 뽑아 서울로 올리는 일)하는 것을 형조에서 다 관장합니다. 전에는 번차(番次)가 정액(定額)이 없어서, 분정(分定)하여 행문 이첩(行文移牒)할 때에,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번차의 드물고 잦음이 거의 공평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계해년(1503, 연산군 9) 간에, 국가에서 이런 폐단을 징계하여 여러 곳에서 정하여 올리는 수를 외방에 사는 노자의 수와 대조하여 7번으로 나누었습니다. 법을 마련한 처음에는 선상의 일이 과연 균일하여, 3년을 지나 번을 들게 되니 백성들의 원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10년이 못 되어 선상하는 번차가 점점 촉박해지니, 신은 적이 미혹합니다. 본 고을 공안(貢案, 공납 장부.의 선상하는 수는 8명뿐인데, 지난 경오년(1510 중종 5) 춘하등(春夏等)에는 27명이요, 추동등에는 30명이며, 금년 춘하등에는 또 22명에 이릅니다. 더 정하여 행문 이첩하므로 공안의 수에 비하여 혹 2배가 넘고 혹 3배가 넘으니, 한 고을로 미루어 여러 고을의 수를 대개 알 수 있습니다. 대저 공천으로서 선상되는 자는 백성 중에서 제일 고역으로, 한번 선상되며 그만 가산을 탕진하고 그래도 지탱하지 못하면 가솔을 이끌고 도망합니다. 분배 받을 각사(各司)가 한결같이 경저(京邸, 서울에 있는,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 사무를 맡아 보던 곳. 소관 지방민에게 침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지방에서 번상(番上)하는 이예(吏隷)나 군인들에 대하여도 책임을 지며, 공납물(貢納物)을 대납(代納)하기도 하였다. 이 일을 맡은 자를 경저리(京邸吏), 혹은 경주인(京主人저인(邸人) 등으로 불렀다.)에 문책하니 경저의 주인은 월리(月利) 돈을 빌려 그 역을 대충하며, 이미 월리를 졌으니 또 그 수량을 배로 받아들입니다. 이러므로 자신이 지탱하지 못하여 또 같은 친족에게 징수하고, 친족이 지탱하지 못하여 또 절린(切隣)에 징수하여, 도로에서 걸식 대차하다가 구학(溝壑)에 떨어져 죽는 자가 자주 있습니다. 선상의 대가(代價) 같은 일은 거듭 법을 세워, 법이 좋지 않음이 아니지만 그래도 곤궁하여 원망하는 자가 있으니, 법의 죄가 아니라, 해조가 그 법을 받들어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번의 액수가 적었다 많았다 하는 것은, 신의 생각에는 간사한 이속이 농락하고 사정을 부려 그 수를 가감함인가 합니다. 실제로 공안 중 각 고을의 정액(定額)을 상고하면 그 정실과 허위를 분변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또 선상의 공문이 미리 기한을 앞서오지 않고, 혹은 공문이 온 지 45일도 안 되어 독촉해서 길을 떠나게 하니, 이것이 얼마나 영은 태만히 하고 기한은 급하게 하는 것입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선상을 이미 나누어 7번으로 하였으면, 마땅히 정해서 번안(番案)을 만들어, 하나는 여러 도 각 고을에 간직하며 하나는 해조에 간직하고, 번을 갈 시기를 당하면 번 이름으로 기일에 앞서 공문을 보내어 가감할 수 없게 한다면, 이속이 사정을 행사하지 못할 것이며 선상되는 종도 미리 번 차례를 알아 자연 행자(行資)를 마련하고, 대가를 준비하여 기한에 뒤지는 벌을 면하게 되겠습니다. 만일 부득이 정하여 보낼 곳이 증가되어, 선상의 액수가 부족하면 나누어 6번으로 하여도 되겠습니다. 지금 7번으로 나누고도 혹 34배로 행문 이첩하니, 이것은 명목은 7번이지만 실지는 34번으로 나누는 것만도 못합니다. 이것에 비한다면 6번도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대신들에게 내리어 의논하시어 만일 해조에서 이 몇 가지 일을 행할 수 있으면 행하게 하소서. 또 해조에 명하시어 법에 의해서 대가를 거두어 각사로 나누어 보내서, 각사의 관원이 마음대로 침책(侵責)하지 못하게 한다면 공천이 거의 제 자리를 얻게 되고 선상 또한 소생할 수 있겠습니다."

소를 정원(政院)에 내려 보내며 이르기를, "해사로 하여금 버릴 것은 버리고, 행할 것을 행하게 하라." 했다.(태백산사고본 71339B)’

 

부안현 서해에 활도(猾島)가 있는데, 옛날부터 청어(靑魚)가 많이 나서 서민(庶民)들 중 전답 없는 자들이 섬을 의지하여 어전을 매고 이를 보는데, 예전에는 15개가 넘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다.

 

청어는 조선시대 전해역에서 많이 잡힌 어종으로 알려져 있다. 청어가 전해 역에 걸쳐서 다획된 사실은 세종실록 77(재위 19513번째 기록, 1437)과 선조실록 164(재위 367204번째 기록, 1603) 기록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청어는 연도별 어획량에 차 이가 많은 어종이었음이 조선시대 기록에 있다. 중종실록 13(재위 6483번째 기록, 1511)에 따르면, 전라도 부안현 활도(猾島)에서 과거에는 청어가 많이 생산되었지만 을축년(연산군 재위 11, 1505) 이후부터는 청어가 생산되지 않았다. 자산어보(玆山魚譜)’에도 영조 26(1750) 이후 10 여년 동안은 청어가 풍어였으나 중도에 뜸하였다가, 그 후 다시 순조 2(1802)에 대풍어였으며, 순조 5(1805) 후에는 또 쇠퇴하여 성쇠를 거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어는 어량(漁梁)과 수량(水梁)에서 많이 잡힌다는 기록이 세종실록 77(재위 19513번째 기록, 1437)에 있다. 따라서 청어는 어선 어업보다는 정치어구 어업에서 많이 잡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청어는 한반도 연안 모두에서 어획되어 타 지역의 수요 충족을 위해 역외 운반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청어는 해안에 인접된 정치어구를 통해 우 리나라 모든 해역에서 잡힌 어종이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도 역외 지역으로의 장거리 운반을 위해 청어 어업에서 빙장선을 이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부안의 어살에 관한 기록이 자주 보이다. 효종 때 전라감사 정지화(鄭知和)가 왕에게 올린 계문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부안현(扶安縣)에 예전에는 어전(漁箭)20군데가 있었는데, 그중 열한 개는 궁가에 점유당하고 여덟 개는 성균관에 소속되었으며 단지 한 곳만 본 현이 힘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숙경공주(淑敬公主) 집에 탈취당하였습니다. 부안은 격포(格浦)의 출입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사신 행차가 연이어, 유독 그 폐단을 받고 있습니다. 옛 어전 한 군데를 그대로 본현에 소속시켜 주소서

 

20군데의 어살 중에 현지인이 운영하는 어살은 단 한 곳도 없다니, 부안의 목 좋은 땅을 돈 많은 외지인들이 모두 장악하고 있기에 하는 이야기다.

 

어살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갯벌에 울타리처럼 대나무나 싸리나무를 엮어 함정을 만들어 놓고 밀물을 따라 밀려온 고기떼가 썰물 때 이 울타리 안에 갇히게 하는 어로 방법이다. 요즘처럼 어업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주로 연근해 어장에서 어업이 이루어지던 시절에 어찌 보면 원시적이랄 수 있는 이 어살이야말로 조수를 따라 회유해 들어오는 고기떼를 일시에 다량으로 포획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어로방법 중의 하나였다. 그러기에 좋은 목에 있는 어살은 못자리하고도 안 바꾼다는 옛말이 있다.

어살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한 중요한 수단이었지만, 어살에는 하고 많은 사연이 있었다. 땅이 땅을 경작하는 농민의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땅이 농민의 소유가 된 적은 유사 이래 드물었듯이, 어살이 물고기를 직접 잡는 어민의 것이었던 적 역시 드물었다.

김홍도의 그림엔 어살이 보인다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 속에 나무를 세워 고기를 들게 하는 울을 어살 또는 어전(漁箭)이라고 한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바다에 말장을 빽빽이 쳐서 길게 담을 만들어 두었다. 이렇게 말장을 빽빽이 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을 어살 혹은 어전(漁箭)이라 한다. 또 말장과 말장 사이에 그물을 치면 말장그물이라 한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작살, 낚시, 통발, 그물 등 여럿이다. 어살은 그 중 하나인 것이다.

지금 어살 안에는 사내 둘이 다리를 걷고 광주리와 채반 같은 것에 물고기를 담아 건네고 있다. 이 그림에는 배가 세 척이 있는데, 맨 아래쪽의 배는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살 바로 바깥에 있는 배 두 척은 하는 일이 분명하다. 그 중 위의 배는 어전 안에서 건네 주는 물고기를 막 받고 있는데, 배에 독이 둘이 실린 것으로 보아, 거기에 아마 담을 모양이다. 아래쪽 배의 맨 왼쪽에 서 있는 사내는 왼손에 큼지막한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있다. 방금 어살에서 받은 것일 터이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역시 독이 둘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오른쪽이다. 배 가운데에 솥과 그릇이 있다. 솥이 얹혀 있는 곳은 흡사 부뚜막 같이 생겼는데, 도대체 어떤 용도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요즘도 고기잡이 배는 바다로 나가면 배에서 밥을 해 먹으니, 비록 작은 배지만 역시 밥을 해 먹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형태를 어전(漁箭) 어업이라고 한다.

경국대전의 호전 어염(魚鹽)조에 다음과 같은 법적 규정이 있다.

 

여러 도의 어살과 염분(鹽盆, 소금 굽는 가마)은 등급을 나누어 장부를 만들어서 호조와 각 도, 각 고을에 보관한다. 장부에 누락시킨 자는 장() 80대에 처하고 그 이득은 관에서 몰수한다.(어전을 사사로이 점유한 자도 같다) 어전은 가난한 백성에게 주되 3년이 되면 교체한다.”

 

어전, 그리고 소금을 굽는 염분은 각각 그 사이즈에 따라 모두 국가에 등록하고, 그 등록 문서는 호조와 각 도, 각 고을에 비치해 두며, 만약 누락한 자가 있을 경우 곤장을 친다는 것이다. 곧 어살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것이었고, 특히 개인적 점유를 금했던 것이다. 여기에 어살은 가난한 백성에게 주되 3년이 되면 교체한다.’는 조항 역시 주목할 만한 것이다. 곧 재산이 없는 빈민에게 무상으로 주고 다시 3년이 지나면 교체한다는 것이었으니, 원래 어살은 가난한 백성이 먹고 살 길을 열어주기 위해 만든 것이었던 셈이다.

어살이 부가가치가 높고 국가적으로도 귀중한 세원이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왕실이나 권문세가들이 요즈음 투기꾼들이 땅 투기하듯 목 좋은 어살을 장악했다. 이처럼 어살을 놓고 서로 이익을 다투다보니 피해를 입는 쪽은 자연 힘없는 어민들이었다. 어민들은 왕실이나 권세가들에게 어업권을 박탈당하고 소작어민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어세로 어물을 부과해야 마땅함에도 피륙이나 포목 따위의 과중한 세금을 부과해 이를 견디다 못한 어민들의 야반도주가 속출하였을 정도로 어살 운용의 폐해가 심각했다.

 

특권층이 어살을 독차지하는 문제는 영조 때까지 계속된다. 연산군 때부터 수입이 좋은 어살을 왕은 자기가 총애하는 후궁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고, 연산군을 쫓아내고 새로 왕이 된 중종도 왕자들이 자기 몫으로 토지를 받지 않았기에 대신 어살을 주었을 뿐”(‘중종실록’ 36220)이라면서 왕자들에게 어살을 하사하였고,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국가와 가난한 백성들의 소유여야 할 어살을 가장 많이 차지한 곳은 이처럼 왕자나 공주의 집안, 곧 궁방이었다. 왕들은 자기 자식이 자라서 궁 밖으로 나가 딴 살림을 차리게 되면 토지와 어살을 내려 주었던 것이다. 어떤 왕이든 예외가 없었다.

 

효종실록’ 61125일 전라감사 정지화의 보고에 의하면, 전라도 부안현 소재 20곳의 어살은, 궁가 점유가 11, 성균관 소유가 8곳이었고, 부안현 소유는 1곳이었던 바, 1곳마저도 숙경공주 집에 빼앗겼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백성의 몫은 한 곳도 없었던 것이다. 양심적 관료들이 궁방의 어살 독점을 문제 삼고, 백성들을 위해 어살을 궁방에서 되찾아 다시 국가가 관리하고 백성에게 어업권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현종실록의 사관은 어살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살펴 보건대, 우리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어 조석도 보전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폐단은, 오래 전부터 쌓이고 쌓여 전례가 된 것들로서, 위사람 아랫사람이 모두 그냥 따라 할 뿐, 고칠 수가 없게 된 데서 근거를 두고 있다. 삼사의 관원들이 해를 넘기면서까지 굳게 다투고 입이 닳도록 말을 해서 겨우 허락을 받은 것을, 정부에서는 늘 여기로 저기로 돌리며 긴 세월 방치해 두면서, 위로는 임금의 명을 팽개치고 아래로는 여론을 막는 것을 상책으로 여긴다. 시장(柴場), 염분(鹽盆어살을 혁파하는 일은 모두 임금의 윤허를 받았지만, 끝내 실효가 없다. 이른바 소결청(疏決廳)과 공안(貢案)을 고치는 일도 윤허 받은 뒤 역시 모조리 폐기하였다. 대신들이 나랏일을 처리하는 데 불충하고 왕명을 어기는 데 거리낌이 없으니, 정말 통탄스럽기 짝이 없다.”(‘현종실록’ 5111).

 

수많은 개혁책이 강구되었지만, 소수의 양심적 관료의 소리였을 뿐, 조정의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은 오불관언이었던 것이다.영조의 균역법을 칭송하고 있으니, 그나마 영조는 개혁의지가 있었던 왕이었던 것이다. 균역법 이후 어살을 둘러싸고 작은 소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살이 다시 궁방의 차지가 되지는 않았다. 김홍도는 정조 때 사람이다. 그림 속 어민들의 표정이 밝아 보이는 것은 영조 때 이루어졌던 개혁 때문인가.

조기어장으로 유명한 칠산바다를 끼고 있는 줄포만은 수심이 얕은데다 조수간만의 차가 커 어살 목으로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전국에서도 이곳의 어살 규모가 가장 컸었고, 해세(海稅)의 납입도 가장 많았던 곳이었음을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전 어업은 줄포만에서만 성행했던 것은 아니다. 부안의 포구마을마다에 예외 없이 한두 곳의 어살이 있었고, 1960년대까지 성업을 이루었다. 위도의 전막리(箭幕), 격포의 살기미(얼마 전까지 만해도 격포 해수욕장을 살기미 해수욕장이라 불렀다), 계화도의 살금 마을 등의 어살과 관계된 땅이름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목 좋은 어살은 못자리하고도 안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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