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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역사로 만나는 전주 콩나물 이야기

역사로 만나는 전주 콩나물 이야기

1.1898년 5월 2일

잉골드의 일기 가운데 1898년 5월 2일의 기록을 보면 전주의 잔치에 초대돼 젓가락 쓰기에 성공했음이 단연 눈길을 끈다. '얼마 전에 우리 일원 중 한 명의 집에서 열리는 잔치에 선교부의 숙녀들을 초대했다. 그 잔치는 어느 76세 어르신의 생일이었는데 얼마 전 내가 당신에게 말했던 세례를 받은 그 여인, 바로 이씨 부인이다. 우리는 오전 9시 30분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한국인들은 보통 9시나 10시에 아침 식사를 한다. 보통 부엌에는 식탁이 없어 마루가 식탁으로 사용됐고 미리 준비된 음식들은 작은 놋그릇이나 토기마다 최대한 눌러 담았다. 거의 모든 음식에 고춧가루가 빠짐없이 들어갔다. 한국인들은 고춧가루가 넉넉히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 맛이 없다고 여긴다'

이윽고 접시들이 무릎 높이의 작은 식탁 위에 놓이자 커다란 무쇠 솥에서 조리된 쌀밥이 놓였다. 사람마다 음식을 가득 한 그릇 가득 담아 놋수저로 먹었다. 젓가락을 사용하기 위해 온 정신을 쏟은 노력은 친구들에게 유쾌하게 했고 큰 웃음을 주었다. 결국, 친구는 젓가락 대신 사용할 뾰족한 막대기를 가져다 주었지만 이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음식들을 집으려는 노력은 다행히 성공했지만 입맛이 한국식 음식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했다고 솔직히 시인했다.

'순무 튀김, 작은 해조류, 순무 김치는 충분히 먹을 만 했다. 기름에 튀긴 다양한 종류의 맛있는 다진 말고기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맛의 말린 생선, 젤리 같은 '묵'과 삶은 콩나물이 있었다. 소금이나 버터, 그레이비소스 없이 밥을 먹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많이 남기지 않도록 노력했다. 한국 음식에 적응하지 못한 그에게 음식 나누기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전에 알지 못했던 이 관습을 배우게 되어 너무 기뻤다'

2.1925년 최남선

"...꽃밭정이를 지나다가 길가에 벌려놓은 엿이 하도 먹음직하기에 사 먹으며 보니, 엽전꾸러미가 의젓이 돈 무더기에 놓여있다. 아직 전주도 그런가하여, 당연할 일이건만 퍽 의외로 생각된다. 다섯 닢이 일 전이라니 쇳 값에 지나지 않을까 하였다. 흰 엿 무슨 엿 할 것 없이 보기에나 먹기에나 퍽 만만한 것이 전라도 엿이요, 들깨쌈 콩쌈 따위 종류도 서울보다 많다. 콩나물이 연하고, 엿이 말쑥한 것은 아무래도 전라도의 특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25년 3월 30일 기록>


3.1929년 12월 1일

탁백이국(『별건곤』)
1929년 12월 1일자 『별건곤』 잡지에 ‘진품 명품 천하명식 팔도명식물예찬(珍品 名品 天下名食 八道名食物禮讚)’이라는 재미난 기사가 실렸다.
이는 평양 개성 전주 진주 등 조선팔도의 유명한 음식을 소개한 특집기사인데, 여기서 ‘다가정인(多佳亭人)’이라는 필명을 쓰는 사람은 전주지역의 명식물로 ‘탁백이국’을 소개하였다. ‘탁백이’란 뚝배기의 사투리이다. 위의 글을 쓴 다가정인은 “탁백이국은 원료가 단지 콩나물일 뿐”이고, “콩나물을 솥에 넣고 (시래기도 조금 넣기도 한다) 그대로 푹푹 삶아서 마늘양념이나 조금 넣는 둥 마는 둥한다.
간장은 설렁탕과 마찬가지로 넣으면 안 되고, 소금을 쳐서 휘휘 둘러놓으면 그만”인데도, “그와 같이 맛이 있다”며 신통해했다. 더불어 값이 저렴하면서도 맛이 구수하고 숙취가 잘 풀리는 것을 보면, “어복장국이나 설렁탕과 어깨를 견줄만한 명물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어복장국이나 설렁탕은 고기라도 들어가지만, 탁백이국은 재료가 단지 콩나물과 소금뿐임에도 그처럼 훌륭한 맛이 나니 오히려 어복장국이나 설렁탕보다도 더 낫다고 하였다.
행간에서 필자의 대단한 자부심이 읽힌다. 이것으로 볼 때, 이 글을 쓴 다가정인이라는 사람은 아마도 전주 다가동(多佳洞)에 사는 지역주민이거나 전주 다가동 출신의 출향인사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미 여러 곳에서 단서가 제시된 것처럼, 탁백이국이란 지금의 콩나물국밥을 말한다. 그런데 이 콩나물국밥이라는 명칭은 1970년대 이후에서야 일반화된 것이고, 그 이전의 전주지역에서는 이를 ‘탁백이국’, ‘술국’, ‘해장국’, ‘콩나물해장국’과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이 명칭들은 서로 다른 이름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두 술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탁백이국이란 술을 마신 이튿날, 속을 푼다는 명목하에 또다시 술과 함께 곁들여 먹는 국물음식이었던 것이다.
다가정인은 앞의 글에서 국밥집 풍경과 자신이 직접 탁백이국을 먹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탁백이국은 “아침 식전에, 그렇지 않으면 자정(子正) 이후 일찌감치 일어나서 쌀쌀한 찬 기운에 목을 웅숭거리고 탁백이국을 찾아간다”고 했다. 구수한 냄새와 더운 김이 푸근하게 쏟아져 나오는 선술집 같은 곳 안쪽으로 들어가면, 개다리상처럼 생긴 걸상이 놓여 있었다. 걸상에 걸터앉아 “텁텁한 탁백이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탁백이국 그놈 한 주발에 밥 한 술을 놓아 훌훌 마시는 맛은 산해의 진미와도 바꿀 수 없이 구수하고 속이 후련하였다”.
게다가 그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속이 몹시 쓰릴 때에는 탁백이국 외에는 먹을 것이 없다고도 하였다. 들어가는 주재료와 부르는 명칭은 다를지라도, 어느 지역, 어느 곳에서나 과음을 한 뒷날 숙취를 푸는 해장국은 존재했었다. 그런데 전주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콩나물을 넣고 끓인 해장국을 선호해왔다. 그뿐인가? 전주지역에서는 콩나물비빔밥(지금은 ‘전주비빔밥’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콩나물잡채 등과 같이 유독 콩나물을 이용한 음식을 즐겨 먹었다. 이는 전주 사람들이 그만큼 콩나물을 많이 길러 먹었음을 의미한다.
앞에서 다가정인은 “물로 기르는데 맛이 그렇게 달다면 결국 전주의 물이 좋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며 나름의 이유를 설명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보다 실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전주 토박이들에 의하면, 전주는 예로부터 토질(土疾)이 심해서 해수병과 같은 풍토병을 앓았다고 한다(최승범, 『남원의 향기』). 그런데 콩나물을 먹으면 풍토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어서 집집마다 콩나물을 기르고 또 콩나물이 들어간 음식을 해 먹었다고 한다.
다가정인 또한 글의 말미(末尾)에 “전주에는 토질이 몹시 심한데 콩나물국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예방한다”고 언급하였다. 전주지역에 전승되는 콩나물국밥은 ‘말아주는 국밥’과 ‘끓여주는 국밥’, 이렇게 두 가지 방식의 콩나물국밥이 공존하고 있다. 말아주는 국밥은 주로 남부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식은 밥에 따뜻한 국물을 계속 토렴함으로써 따뜻하게 덥혀주는 방식이었다. 말아주는 국밥은 전주 완산교 인근에 있었던 도래파와 김제파라고 하는 국밥집이 유명했는데, 소금물을 넣고 끓인 콩나물에 마늘과 파를 썰어 담근 깍두기, 해묵은 겹장을 넣은 다음, 참깨를 한 수저 넣고 부뚜막에 말린 붉은 고추를 수저로 깨뜨려 넣으면 그만이었다(<경향신문> 1977년 11월 5일).
반면, 끓여주는 국밥은 객사 뒤쪽에 위치한 ‘삼백집’이라고 하는 국밥집에서 처음 시작했는데, 뚝배기에 밥, 콩나물, 묵은 배추김치, 양념을 모두 넣고 부글부글 끓여주는 방식이었다. 그 옛날 전주 사람들의 쓰린 속을 달래주던 탁백이국이 지금은 배고픔을 달래주는 한 끼 식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전주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점과 여전히 전주의 명물(名物)이라는 점이다.

4.1946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은 우리나라의 지방 명식(名食)으로 개성의 엿과 저육, 해주의 승가기(勝佳妓) 평양의 냉면과 어복장국, 의주의 대만두, 전주의 콩나물, 진주의 비빔밥, 대구의 육개장, 회양의 곰기름정과 강릉의 방풍죽, 삼수갑산의 돌배말국, 차호의 홍합죽 순으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