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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병중에 완주 고산의 아들로부터 죽력과 빙어회를 받은 유진한

유진한(柳振漢, 1712-1791)이 자신의 호() '만화제(晩華齊)'를 딴 문집인 '만화집(晩華集)'을 썼다. 여기엔 한문시(漢文詩) 200구로 기록된 춘향가의 사설(辭說 : 판소리의 가사)이 실려 있다.

흔히 이것을 '만화본(晩華本) 춘향가'라고 한다. 그의 나이 43세인 1754년에 이를 지었다. 그의 아들이 쓴 글에 의하면 유진한은 1753년부터 1754년까지 호남지방의 문물을 구경하고 돌아와서 이때 들었던 '춘향가'의 가사를 한시(漢詩)로 옮겨 실었다고 한다.

'만화본 춘향가'의 내용은 현재의 '춘향가'와 거의 같으며, 긴 사설을 짧은 한시(漢詩)로 번역했기 때문에 자세한 세부 내용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춘향과 이도령이 연을 맺고-사랑하게 되고-이별하고-춘향이 수난을 당하고-재회'하는 구조와 등장인물은 현재의 것과 차이가 없다.

이로 미루어 보아, 늦어도 18세기 후반 경에 춘향가가 소리꾼들에 의해서 연주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살찐 고기 하얀 회는 남원 요천의 은어요 가늘게 썬 진안에서 난 담배(鎭安草)

 

가장 오래된 만화본 춘향가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현재까지 춘향의 이야기가 정확히 언제부터 판소리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유진한은 천안시 병천면 만화출신으로, 호남지방을 유람하며 직접 듣고 본 판소리 춘향가(春香歌)를 한시로 옮겼다. 이를 '만화본춘향가(晩華本春香歌)'라고 한다. 원제목은 '가사춘향가이백구(歌詞春香歌二百句)'이다. 이는18세기 중엽 호남에서 부르던 '춘향가(春香歌)'를 듣고 한시로 지은 것으로 당시의 춘향가를 비교적 충실하게 수용하고 있는 이본이다.

서사는 춘향가의 핵심 부분인 이 도령과 춘향이 오작교에서 결연하고 어사출두 후 용성관에서 재회해 기뻐하는 극적인 장면을 정리한 것이고, 본사는 춘향가의 내용이며, 결사는 유진한이 춘향가를 창작한 변으로 춘향가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서 지었음을 밝힌 것이다.

'만화본춘향가'는 현재까지 알려진 '춘향전'이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유진한은 '만화본춘향가'를 지은 것 때문에 당시 양반들로부터 기롱(譏弄)을 당하기도 했다. 유진한의 둘째 아들인 유금(柳琹)이 쓴 행록의 선고께서 계유년 봄에 남쪽으로 여행하시어 그 산천과 문물을 두루 보시고, 그 다음해 봄에 집으로 돌아와 춘향가 일편을 지으셨다. 그런데 당시의 유자들에게 기롱을 당하셨다(先考癸酉春南遊湖南 歷觀其山川文物 其翌年春還家 作春香歌一篇 而卒被時儒之譏)”에서 춘향가가 18세기 중엽에는 양반층을 향유자로 확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용 중엔 전북 관련 지명과 특산물 등이 나와 흥미를 더한다. 남원고을 용성관(龍城館) 동대청이 나온다. 용성은 대방(帶方), 고룡(古龍)과 함께 남원의 옛 이름이다. 남원부 객사의 이름은 휼민관(恤民館)이었지만 정유재란 때 불탄 후 부사 정동설과 정협 등이 다시 세우고 용성관이란 편액을 걸었다.

지금은 동충동에 계단과 기단만 남아 있다. 만북사(萬北寺)는 만복사다. 여지도서엔 만북사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엔 만복사(萬福寺)로 나온다.

해질녘에 탄식하며 슬치(임실 관촌)를 넘어가며 말치재(임실읍과 오수면 사이) 구름너머 님의 모습이 아련하다고 했다. 완산주 객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오수 물가를 빨리 갔다.

지역 특산물도 나온다. 살찐 고기 하얀 회는 요천(남원)의 은어이고, 귀한 과일 빨간 홍시는 연곡(구례)의 홍시라네. 또 실올처럼 가늘게 썬 진안에서 난 담배(鎭安草)를 관노에게 분부해 눌러 담아 올린다고 했다.

이유원(李裕元)'임하필기(林下筆記)'에 담배 중 최상품은 광주(廣州)에서 나는 금광초(金光草)와 전라도의 상관초(上官草)라고 하고, 진안에서 나는 담배는 상관 담배의 영향으로 재배하는 것이라 했다. 상관초는 완주군 상관면에서 나는 담배로 전주와 임실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만화집' 1권엔 '병중에 아들 력()이가 보내온 약물을 보고(病中見瓅兒藥物)' 엔 전북 완주의 솔잎주와 빙어회 등의 음식이 소개된다.

 

'남방의 약물이 내 몸을 다 부지하니(南方藥餌摠扶吾)

가을 바람 불기 전에 어서 병을 낫고파라(不待秋風病欲蘇)

죽력(竹瀝)을 섞어 맑은 꿀 담은 그릇(竹瀝和來淸蜜器)

솔잎주를 다려낸 화로에다(松醪煎出練金爐)

정신을 번쩍 나게 해주는 빙어회와(精神發動氷魚膾)

맛이 서로 잘 어울린 석합(石蛤)으로 만든 요리(氣味相須石蛤需)

평지 길도 걷기 힘든 비쩍 마른 다리라서(瘦脚平途難步出)

부모 먹일 까마귀가 숲에 온 걸 누워 듣네(臥聞反哺在林烏)'

 

유진한의 아들 유력(柳瓅, 1741~1799)의 자는 맹명(孟明), 호는 용곡(龍谷)으로, 고산현(전북 완주군 고산면) 일대에서 살았다.

죽력은 푸른 대쪽의 불에 구워서 받은 진액으로, 성질이 차가워 열담(熱痰)과 번갈(煩渴)을 치료하는데 쓰는 약재다.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 평양의 감홍로’, 전주이강고와 함께 조선 3대 명주로 꼽힌 술이 바로 정읍 등 호남의 죽력고이다. 죽력은 푸른 대나무를 쪼개 항아리에 넣고 열을 가해 얻어진 대나무기름으로, 어혈을 풀어주고 원기회복에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다.

동학농민운동지도자 녹두장군전봉준이 일본군에 압송되어 만신창이가 되었을 당시 죽력고를 먹고 기운을 차렸다는 말이 전해져온다. 이 죽력과 꿀, 생강 등을 넣어 증류한 술이 죽력고이며, 오미가 조화를 잘 이루고 꿀과 생강에서 나는 부드러운 향과 맛이 코와 입을 자극한다.

완주군 고산면 동쪽에 있는 자포재를 넘어서면 종암, 기란, 약막, 오산 등 여러 마을의 넓은 들이 펼쳐지고 이곳에서 한참 걸어가면 삼기리에 다다른다. 오른편으로 가면 대아저수지가 나오고 왼쪽으로 빠지면 경천저수지에 이르는 갈림길인 이곳은 옛날에는 동상면 골짝에서 주옥같은 맑은 냇물이 들판 가운데로 흘렀으나 오늘에는 대아저수지에서 쏟아지는 물이 봉동쪽으로 굽어 틀어 흐르고 있다. 또 수석이 아름답고 겹겹으로 둘른 산에는 초목이 우거져 한폭의 동양화 같은 경관을 빚고 있어 사철 유람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유람객의 발길을 이끄는 이 지역의 아름다움은 그 중에서도 맑은 물, 아름다운 수석, 산의 초목 등 이 3가지가 기특하고 특이하게 아름답다고 전해진다.

고산지에 토산물로 꿀, 송이, , 석류, 석이, 붕어, 멸치, 잉어, 쏘가리, 송사리, 모래무지, 피라미, 가물치, 뱀장어, 메기,미꾸라지, 날치, , 가자미, 세우, 자라 등을 적고 있는 까닭이다.

대아저수지의 빙어도 유명하다. 빙어의 몸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는 은빛 비늘 또한 마치 얇은 비단옷을 걸친 듯 곱고 아름답다. 가늘고 긴 몸매에 가볍게 걸치고 있는 그 얇은 비단옷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빙어의 속살 또한 티 한 점 없는 물빛 그대로다. 언뜻 물이 빙어를 물결로 삼아 멋들어진 춤사위를 뽐내고 있는 것만 같다.

눈 시리도록 짙푸른 하늘 아래, 금세라도 쩌어엉~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꽁꽁 얼어붙은 하얀 얼음장 밑 티 한 점 없는 맑은 얼음물 속을 떼지어 미끄러지는 민물의 요정 빙어. 누가 빙어를 민물의 요정이라 불렀는가. 요염하고도 날쌘 몸놀림으로 헤엄치고 있는 빙어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물의 요정이 아름다운 춤을 추는 듯 눈이 부시다.

빙어는 바다빙어목 바다빙어과에 속하는 물고기로 과거에는 살에서 오이 맛이 난다며 오이 과()자를 써 과어(瓜魚)’라고 불렀다. 몸 길이가 약 15cm인 빙어는 겨울철 얼음낚시의 대명사이자 겨울철 맛의 대명사다. 빙어는 산 채로 초장에 찍어 입에 넣으면 쫄깃하고 고소하게 씹히면서 입 안 가득 향긋한 오이내음을 풍겨주는 깔끔한 맛이 그만이다. 그런 까닭에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빙어를 오이맛이 나는 고기라 하여 '과어(瓜魚)'라 불렀다.

빙어(氷魚)란 이름은 조선 끝자락 실학자였던 전라감사 서유구(1764~1845)<전어지>(佃漁志)'동지가 지난 뒤 얼음에 구멍을 내어 그물이나 낚시로 잡고, 입추가 지나면 푸른색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다가 얼음이 녹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여, 얼음 ''() 물고기 ''()자를 따서 '빙어'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

싱싱한 빙어일수록 몸이 투명하다. 빙어는 얇은 배의 껍질이 벗겨지기 쉽고 선도가 빨리 떨어지는 어류이므로 싱싱할 때 신속하게 조리하는 게 좋다. 빙어는 육질이 연하고 비린내가 거의 나지 않아 다양한 요리에 이용할 수 있다. 초고추장과 채소를 곁들인 빙어회, 튀김가루를 묻혀 튀긴 빙어튀김, 갖은 채소로 무친 빙어무침 등이 대표적인 빙어요리다.

빙어는 고단백 저칼로리로 열량이 낮아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 빙어에 함유된 셀레늄은 비타민E와 함께 항산화 작용을 가진 성분으로 노화방지에 도움이 된다. 단백질과 필수아미노산이 풍부해 어린이 성장발육 촉진에도 좋다.

대아저수지 인근의 식당, 소주 한 잔 입에 털어 넣고, 발그스레한 빙어무침 속에서 파다닥거리는 빙어 한 마리를 나무젓가락으로 집어 들어 상추 위에 올려 쌈을 싸 입에 넣는다. 살아 파닥거리는 빙어를 통째로 씹으면 비린 맛과 함께 약간 쓴 맛이 나지 않을까.

여러 가지 채소와 과일, 시뻘건 초고추장과 함께 뒤섞여 있는 은빛 빙어들이 파닥파닥 튀기 시작한다. 그중 힘센 빙어 몇 마리는 어느새 하얀 종이가 깔린 탁자 위에 툭툭 떨어진다. 초고추장이 묻은 빙어가 떨어진 그 자리. 바로, 그 자리가 흡사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의 입술을 찍어놓은 것과 참 많이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지레 짐작하며 몇 번 씹자 향긋한 오이맛이 입안 가득 맴돌면서 쫄깃하게 씹히는 고소한 맛이 그만이다. 다시 소주 한 잔 입에 털어 넣고 물그릇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빙어 한 마리를 손으로 집어 초고추장에 찍는다.

얼른 입에 넣거나 서둘러 상추나 깻잎에 싸지 않으면 초고추장이 옷에 몽땅 다 튀어버릴 것만 같다. 이크, 싶어 초고추장 묻은 빙어를 상추나 깻잎에 쌀 겨를도 없이 얼른 입에 넣는다. 향긋하고 고소하다. 빙어무침과는 또 다른 맛이 입안 가득 맴돈다. 무슨 맛이랄까. 땡겨울에 맛보는 상큼한 봄나물 같은 맛이랄까. 아니면 밭에서 금방 따낸 싱싱한 오이를 바지에 쓱쓱 문질러 한 입 가득 베어 먹는 그런 맛이랄까.

소주 한 잔 입에 털어 넣고 맛보는 빙어튀김도 바삭바삭한 게 뒷맛이 아주 깔끔하다. 파닥거리는 빙어를 상치에 싸서 먹는 맛도 그만이다. 빙어회는 손으로 집어먹어야 한다. 빙어튀김도 바삭거리는 게 뒷맛이 깔끔하다. 회라는 음식 고유의 쫀득하거나, 담백하거나, 입에서 살살녹는 그 맛이 아닌 그냥 빙어회 맛이었다. 끔찍하지만 오늘, 나의 입에 의해 산채로 몸뚱이를 절단 당한 빙어들이 떠오른다./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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