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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전주 땅생과 우물


<정인수 학인당의 땅샘>

당신의 예쁜 얼굴을 보려거든 우물로 가고, 우리네 본디 모습 보려거든 천년 전주에 닿을 일입니다. 상수리나무 빽빽한 오목대에서 찰방찰방 엎질러지는 초록바람을 몇 바가지씩이나 끼얹은 한옥마을은 경기전 뒷길이며 은행나무길, 향교길과 토담길, 쌍샘길 할 것 없이 골목골목마다 진초록이 남실남실 고여 있습니다.


△쌍샘길, 인후동에서도 물길러 왔어요


골목길을 넓히느라 잃어버린 샘터를 ‘쌍샘길(오목대길 5-19 일대)’이라 추억하던 사람들은 다시 곁길을 넓히며 소방도로를 내느라 듬직한 한옥의 마당을 지우고 있습니다. 최근 한두해 사이 한옥마을 지원이 많았지만 주민들의 집집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나 봅니다. 오래 전에는 교동이나 풍남동 주민뿐만 아니라 노송동, 멀게는 인후동에서도 쌍샘으로 물을 길러 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바가지로 떠서 쓰는 샘이었다가,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게 됐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6년전까지만 해도 두 개의 우물 중 하나는 남아 있었지만 도로가 생기면서 그마저도 없어졌습니다. 쌍샘은 현재 흔적이 남아있는 자리에 한 개가 있었고, 나머지는 그 위로 약 8m 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쌍샘 주변에 살고 있는 집에는 물지게며 두레박이며 물을 담아 두었던 커다란 물통이 남아있습니다. 쌍샘 주변은 미나리꽝과 호박밭이 있었으며, 밤에는 길이 얼고 낮에는 녹아 장화의 절반이 빠질 정도로 질펀해서 동네 사람들이 연탄재를 깨서 땅을 다져야 겨우 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가장 맛있다는 서리태 콩나물에 들어갔던 녹두포(교동 일대)의 샘물은 수질이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지하수이기 때문에 수온이 사계절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어 콩나물 재배에 적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250여년 된 학인당의 땀샘


한옥마을 남쪽에 자리한 학인당(전북 민속문화재 제8호)은 유일한 한옥 문화재로, 2개의 우물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종가로 전하여 내려오는 유구한 역사와 넓은 마당, 연못이 있는 정원, 독특한 땅샘은 학인당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일 것 같아요. 하나는 땅샘으로 250여 년이 넘었구요.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우물은 1908년 건립 당시엔 만들어졌다고 안주인 서화순여사가 말을 합니다.

땅샘은 정원의 돌계단 16칸을 내려가게 만들었으며, 한여름에도 일정한 온도가 유지돼 열무김치이며, 수박 등을 보관하는 냉장고랍니다. 계단의 길이는 420cm며, 입구에 대리석이 깔아져 있는데요, 작은 연못에서 금붕어가 이곳을 다녀간 김구 주석처럼 유유히 헤엄치고 있네요.

학인당 안채가 앉혀지기 전에 원래 그 자리에 초가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땅샘은 바로 그 초가집 앞에 있던 우물이었습니다. 그 우물을 메우려고 했으나 집안의 우물을 메우면 자손이 끊긴다고 하여 샘을 살려 놓았습니다. 이곳은 청수정(옛 지명)이 있었을 만큼 물이 맑은데다가 마당의 땅샘을 살리기 위해 정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용혈이 있는 명당으로 용소가 바로 땅샘이며, 용의 꼬리와 용의 머리가 집안 곳곳마다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물 속에 파아란 바람이 붑니다. 학인당 정원 한가운데 근사한 박우물 하나. 샘을 둘러싸고 높직이 쌓아올린 아름드리 돌에는 푸릇한 이끼가 곱게 덮였습니다. 황금빛 도는 갈색 돌계단을 밟아 내려가면 홀연 계곡에 들어선 듯한 서늘함과 아늑함 속에 옹달샘이 들앉아 있습니다. 땅 밑으로 내려가 있다고 해서 땅샘이란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다문’에서 두꺼비 세 마리 잡으세요


어린 시절 비가 오면 마당에서 혼자 놀며 빗물고인 땅에 부러 발자국들을 찍던, 발자국을 비잉 돌려 꽃잎을 만들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주의 특징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는 바, 한옥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다문(茶門)'이 바로 그곳입니다. 1939년에 지은 이 한옥의 마당 한쪽에는 그 내력마냥 깊은 우물이 있기도 합니다. '다문'에 처음 온 사람들이라면 '어라~' 신기해하며 모여들었다가 '어, 진짜 물이 있네' 다시 한번 가슴 두근거리며 우물안으로 깊숙이 고개 쳐박고 들여다보게 되는, 또 그래서 한두번쯤 두레박질을 하며 아이같은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그런 우물로, 집을 건립할 당시에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문의 서쪽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습니다. 깊이가 560cm에 이르며 지금은 식수로 사용하지 않지만 손님들이 와서 손을 씻고 설거지를 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고 박대표의 아내 오여사가 말합니다.

기묘년인 1939년에 이 집을 건립한 만큼 우물이 그 때 만들어지지 않았을 까요. 그런데 이게 웬 횡재입니까. 이 집엔 두꺼비 세 마리가 살고 있군요. 우물이 나오는 석상에 아주 큰 두꺼비는 집에 이사올 때부터 있었으며, 문 밖 입구의 물이 빠져나가는 곳의 새끼 두 마리는 20여 년전에 지인이 선물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 집에 오면 많은 복을 받아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가워요, 다문의 복두꺼비.


  △경기전에는 어정이 2개 있어요


어정(御井)은 임금의 음식을 만들거나 임금이 마실 물을 기르는 우물을 말합니다. 그리고 종묘(역대 여러 임금의 위패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 사직단(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토신인 사와 곡신인 직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등에서 임금이 참여하는 제례(제사)에 사용하는 우물도 어정이라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셨던 경주의 집경전, 평양의 영승전, 전주의 경기전의 우물도 어정이라고 합니다. 깨끗하고 성스럽게 취급해야 하므로 주위에 담을 두르고 문을 설치해 두기도 했으며, ‘여지승람’을 보면 ‘성 안에는 우물이 223개가 있었는데 이것이 그중 첫째가는 우물이다’고 소개됩니다.

전주시는 2004년 4월 20일 경기전 서쪽 부속 건물인 어정을 비롯, 수복청(守僕廳), 수문장청(守門將廳), 마청(馬廳), 동재(東齋), 서재(西齋), 제기고(祭器庫), 전시청(典祀廳), 용실(?室), 조과청(造菓廳) 등 제사 관련 9개의 유물을 복원했습니다.

경기전 조경묘의 어정을 생각하면 고종황제의 딸 황녀 이문용(1900-1987) 여사가 생각납니다. 그녀는 말년에 이곳에서 기거를 하였다고 하며, 10년 동안 어정을 사용했습니다. 1975년 5월 20일에 수직사 건물에 이사를 온 후, 그해 11월 20일 75회 생일을 맞아 그녀를 돕기 위한 바자회가 열렸구요, 1987년 3월 28일 오후 5시 30분에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그녀는 도래샘을 꿈꾸지는 않았을까요.

승광재 옆 전주 최부잣집은 예전엔 작은 빨래는 작두샘에서 하고, 큰 빨래는 식모 할머니가 전주천에 가서 삶아 빨았다고 합니다. 교동 ‘우물 좋은 인생 부동산’은 1960-1970년대 어려운 시절, 우물에서 물을 길어 콩나물을 팔았다고 전하는 바, 깊고 물이 맑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전주공예품전시관 맞은편 골목의 소리풍경에서 작두샘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의 샘은 120년이 됐다고 하며, 주둥이를 등위에 대고 작두질을 할 수 있지만 물은 나오지 않습니다.

한옥 마을의 우물을 하나둘씩 복원할 수 있도록 지원해 방문객들로 하여금 낭만을 선사하면 안될런지요. 과거엔 더운 여름밤에는 마당에 돗자리나 멍석을 깔고 모퉁이에 쑥으로 모깃불을 피워 모기를 쫓으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더위를 잊고 지냈습니다. 어릴 적 돗자리에 누워 밤하늘의 수많은 별을 바라보며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를 듣고 부채바람을 맞으면서 잠이 들던 때가 그리워지는군요.

너무 더운 날에는 저녁을 먹은 뒤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에서 멱을 감거나 우물가에서 ‘등목’을 해서 몸을 식힌 후 잠자리에 들었는데, 등은 한기를 잘 느끼는 곳이라 웃통을 벗은 채 찬물을 끼얹으면 그 시원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등목! 생각만 해도 몸이 시원해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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