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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전주 유곽

전주 한옥마을을 지나 다가교(1981년 확장)를 지나면 도토릿골교(1999), 구 진북교(1975), 쌍다리(어은1, 1962) 어은교(어은2, 1990), 진북교(1996), 서신교(1996), 백제교(1991), 사평교(2007), 가련교(1997), 추천교(2000)가 잇따라 모습을 드러낸다. 불과 수십년전만 하더라도 전주천 냇물의 양편에 반듯한 돌들을 배열해 놓고 여기에 여인들이 앉아 맑은물에 빨래를 씻으며 방망이질을 하던 풍경이 있었다.

도토릿골과 어은교 사이에 길게 뻗어내린 산자락 부근에 일본인 작부들이 기거하는 유곽이 들어섰다는 김남규선생의 기록이 보인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 말로는 도토릿골 쪽 유곽에 가려면 배를 타고 건너야 했으며 그래서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당시 방귀 꽤나 뀌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유곽이 생긴 것은 왜인들이 전주부성의 서문과 부근의 성벽들을 허물고 형성한 근대적 도시 공간의 끝부분에 자신들을 위한 욕망의 배설 창구를 만든 까닭이다. 구 진북교는 이로 인해 만들어졌으며, 1936년 홍수로 유실되었다가 1938년에 다시 가설하여 당시 태평동의 구 명칭인 상생정의 이름을 따서 상생교라 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상생교를 진북교라 부르게 되었으며, 최근에 서살미자락에 진북터널이 뚫리면서 전주천에 놓인 다리가 진북교가 되고, 원래의 진북교는 구 진북교가 됐다.

유곽(遊廓)’은 본래 일본어로서 유카쿠가 원 발음이다. 유곽(遊郭)이라고도 쓴다. 예전에, 관의 허가를 받아 일하는 창녀들을 두고 손님을 맞아 매음 행위를 하게 하는 집이나 그 집들이 모여 있는 구역을 이르던 말이다. 그 주위를 도랑이나 울타리로 에워싸고 출입구를 한 곳으로 제한하여 외부와의 관계를 차단한 경우가 많았던 것에서 비롯한다. 유곽은 16세기 후반, 도요토미의 치세 하에서 오사카, 교토 등에 처음 출현했으며, 조선이 개항된 직후부터 부산과 원산, 인천, 군산의 개항장에 일본인 유곽 업자와 창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정부는 1880년대부터 이들의 성매매에 대한 관리정책을 시행하며 일본의 조선 진출을 촉진했다.

1930년대 군산에는 신흥동(군산역) 인근에 유곽이 6곳이 자리한 가운데 60여 명의 성매매여성이 활동했다고 한다. 전주에 성매매업소 집결지가 들어선 것은 1930년대 전주부 상생정(소세이죠, 전주역이 자리함 현재의 태평동)에 들어섰던 유곽이 시초였다고 한다. 이곳에 유곽이 들어선 배경은 호남권 최대의 재래시장이었던 중앙시장과 전주역이 인근에 있었던 때문같다. 조선인과 일본인 접대부가 절반 정도씩 50명 정도가 5곳의 유곽에서 영업했던 상생정 유곽에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때문에 전주 유곽은 제법 돈이 있는 사람들만 드나들었던 곳이었다. 그렇게 진북동 동국아파트 자리와 태평동 SK아파트자리에도 소규모 유곽이 들어서기도 했다.

전주시 다가동 3가 중앙길 174번지와 156번지 사이 골목 앞에 2m 간격을 두고 쌍으로 돌기둥이 서 있다. 도로명으로는 전라감영11714로, 선명인쇄사 바로 옆이다. 살아 생전, 서예가 작촌 조병희(1910~2005)선생은 필자에게 이곳이 일제 강점기 시절 유곽이었고 돌기둥은 그 표시라고 설명했다. 밤이면 때론 청사초롱이 걸려 있어 지나가는 남성들을 유혹했다고 했다. 어느 누구는 애시당초 중앙동, 다가동 근방에 유곽이 있었고, 후에 그것이 현재 전주초등학교 근방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의 증언대로라면 이 돌기둥은 옮기기 전의 다가동 유곽을 표시하는 '물건'이니 그 내력이 적게 잡아도 90~100년이다. 이젠 성매매 특별법으로 인해 찬바람이 불고 있지만 옛 영욕으로서 전주유곽의 역사는 쉽게 잊히지 않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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