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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도문대작(屠門大嚼) 과 함라 반지

예로부터 팔도 감사 중에 전라감사와 평안감사가 제일이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전주는 산물이 풍족하고 평안도는 여색으로 호강할 수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전북은 비옥한 들과 너른 바다에서 생산되는 넉넉한 농수산물이 있어 푸짐한 음식 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전주는 눈처럼 희고 소담스러운 백산자가 유명했다. 백산자를 전주에서 잘 만드는 것은 좋은 전주엿이 생산됐기 때문이다. 세종실록 3년(1421년) 1월 13일조에 의하면, 예조에서 진상하는 물목을 아뢰면서 “백산자는 오직 전주에서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봄철이면 고사리고 비취나물을, 가을에는 호박가지, 무, 버섯들을 말렸고, 끊는 물에 슬쩍 데쳤다가 말리는 고춧잎, 날것대로 썰어 말리는 고지나물은 종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서해안 생굴을 소금 탄 물에 깨끗이 서너 번 씻어 헹군 뒤 소금 뿌리고 끊는 물에 탄 고춧가루 넣어서 버무려 담근 어리굴젓.(하략, 최명희 ‘혼불중에서’)’


고전소설 ‘춘향전’과 최명희의 소설 ‘혼불’을 보면 전북의 다양한 음식이 소개되고 있으며,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는 뱅어요리가 일품으로 소개된다. 고창 도산 김정회고가는 집안대대로 전승돼온 즙장의 맛이 일품이다.
소설 ‘남부군’에서 이태가 회문산에 가기 전, 전주 오목대 부근에서 떡을 사먹고 출발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록에 의하면 전주의 고속버스터미널 부근과, 삼천 부근에도 떡전거리가 각각 있어 지나가는 길손들이 떡을 사먹었다. 먼 옛날에 이 거리는 전주를 통과점으로 정하고 전라좌도쪽에서 상경길에 오르거나 한양으로부터 하향길을 잡아 내려오는 나그네들이 거쳐갔으니, 과거를 보러 괴나리 봇짐으로 집을 나선 선비와 상사치들이 떡 한 입을 오물오물 먹으면서 건너갔다.

하지만 지난 1960년대 전주비빔밥으로 유명세를 탔던 옴팡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전주의 명주였던 장군주와 간을 맞출 때 썼던 전주즙장(全州汁醬, 白氏醬)이 거의 실전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리라. 즙장은 여러 달 발효시키는 것이 아닌, 담가서 먹는 속성장이며 별미장의 하나다. 이보다 앞서 1766년에 발간된 ‘증보산림경제’의 9권 ‘치선(治善)’편에서는 ‘전주즙장’이 별도로 언급된다. 이는 고문헌에서 소개하고 있는 즙장류 중 유일하게 지역 이름이 붙은 장이다. 이어 1930년대 발간된 서유규의 ‘임원십육지’에서도 전주즙장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익산시 함라면은 전통 ‘반지김치’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이는 전체를 버무리는 일반 김치와는 달리 김치소만 버무려 멀건 배추 속에 차곡차곡 넣고 지푸라기로 꽁꽁 묶은 후 단지 속에 넣고 젓국을 부어 숙성시키는 게 특징이다. 지금의 물김치와 비슷하지만 맛에서는 확연히 다르다.
‘병이류에서 소개한 대만두는 보만두라고도 불리며 자잘한 만두들을 거대한 만두피에 한데 넣고 다시 한번 복주머니처럼 묶은 음식으로 평안도 의주 지방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만큼 대만두를 잘 만든다. 백산자(박산. 쌀로 만든 백당을 고물에 묻혀 먹는 한과)는 전주, 석이병은 금강산, 다식은 안동, 엿은 개성, 약밥은 경주 등이 잘한다’


바로 인근의 함열에서 허균이 '도문대작(屠門大嚼)’을 펴냈지만 이를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 이는 광해군 시절 당쟁에 휘말려 함라에 귀양을 온 허균이 귀양지에서 그간 자신이 먹어본 팔도 음식들을 지역별로 기록한 책이다. 조리서가 거의 없던 조선 중기 팔도 음식을 기록한 것이라 사료적 가치가 높다.
미륵사지에 가면 김장독 하나가 있다. 오늘날의 김치 냉장고에 해당된다. 전주 학인당에는 250여년 된 땅샘이 있다. 냉장고 회사의 홍보물과 방송에 나오게 할 수는 없나. 익산 왕궁리유적에서는 백제 사비기 왕궁의 부엌(廚)터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발견되기도 했다. 백제시대의 음식을 파는 곳, 옷을 파는 곳을 만들어 관광객들을 끌어들일 수 없나. 그것이 어렵다면 이를 체험할 수 있도록 했으면 어떨까 한다. 세계문화유산 미륵사지에 오면 백제인들의 옷을 입고 그들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