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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87> 황차(黃茶) 표류기와 전북 야생 차밭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87> 황차(黃茶) 표류기와 전북 야생 차밭
                         
찻물 따르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녹록치 않은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몸과 마음도 어느덧 고요하고 정갈해진다. 굳이 효능을 따지지 않더라도 잎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레 덖어 만든 차 한 잔의 정성이 그대로 명약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황차(黃茶)는 탕색이 황색이 특징이며, 반발효차로 찻잎의 색이 노란색의 황엽을 뛰고 있다. 이는 녹차를 제조한 후 보관과정에서 변형된 차로 반발효차이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우전, 세작을 중심으로 한 녹차가 차의 대세를 이루었으나, 제주 오설록에서 다양한 발효차를 제작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하동, 보성, 강진 등에서도 황차 중심의 발효차를 많이 만들고 있다.

1762년 11월 남해안에 이상한 배 한 척이 고군산에 표류해 왔다. 중국 절강성에서 표류한 청나라 난파선을 탐문하고 보니, 그 큰 배에 가득 실은 것이 모두 황차였다. 중국 경험을 한 서울의 높은 관리도 아닌 호남 지역의 일반 백성들은 중국에서 생산된 차란 물건을 태어나서 그때 처음 구경했다. 중국 사람들은 표류를 당한 난감한 처지에서도 특유의 장사 수완을 발휘해서 배에서 그 차를 팔았다. 호기심에서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사갔다. 7,000여 냥에 해당되는 여러 물화가 실려 있었고, 그중 엄청난 양의 황차였다.
황차로 인해 조선 조정이 소란한 적이 있었다. 영조 38년(1762년) 11월 7일의 일이다. 

승정원일기에는 '고군산에 표류한 자들의 짐이 많아 300 태나 되니 운반하기가 매우 어렵나이다(古群山漂人卜物, 多至於三百駄, 難以輸運云矣)'라는 기록이 있다. 태는 말 한 마리에 싣는 짐의 단위로 1태는 36관이며, 135Kg이다. 300태라면 40톤이 넘는다.

황차 기록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난파선에 가득 실려 있었던 것은 조선의 위정자들이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녹색황금인 황차이다. 그 배에 실려 있던 황차는 조선의 차시장에서 한 세대 동안 유통되게 할 정도의 양이었다. 어떤 수요가 있어 이와 같은 상선이 등장하는가에 대한 조사를 통해, 중국변방의 이민족들이 이 황차의 그 실수요자이고, 차와 말을 바꾸는 다마무역을 통해 청나라가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선지식인들에게 비쳐진 것이었다.

경진(1760)년과 그 다음에 임오(1762)년에 걸쳐 2차례에 황차를 실은 배가 표류해 들어온 사실을 알 수 있다.
표류선 관련 기록에서 황차가 등장하는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고군산진에 표착한 절강 상인의 배에 황차엽이 대량으로 실려있었고 당시 금주령 상태에 있던 조선에서 이 황차는 제사 때 쓰는 제주(祭酒) 대신으로 각광을 받아 수요가 갑작스럽게 급증하게 되었던 사정이 짐작된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서부터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 많은 지리서에서 군산 옥구의 차 재배를 언급하고 있고, 1893년의 '여재촬요(輿載撮要)'를 보면 옥구의 토산품으로 차가 나온다. 실제로, 조선조에 작설차를 토공으로 바치던 이들 지역은 모두 경상도와 전라도였다. 경상도의 밀양도호부·울주군·진주목·함양군·고성현·하동현·산음현·진해현, 그리고 전라도의 고부군·옥구현·부안현·정읍현·나주목·영암군·강진현·무장현·함평현·남평현·무안현·고창현·흥덕현·순창현·구례현·광양현·장흥도호부·담양도호부·순천도호부·무진군·보성군·낙안군·고흥현·동복현·진원현·영광현·해진군 등의 35개 지방에서 차를 토산물로 바쳤다. 차가 어느 정도의 양이 생산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부분 자생하는 토산물이었기 때문에 많은 양은 못 되었을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보다 약 70여 년 뒤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조(土産條)에도 차의 생산지가 기록되어 있다. 전자와 비교해 보면, 진해현·함양현·구례현·장성현·무진군·영암군 등 종래의 6개 지방이 빠지고, 양산군·곤양군·단성현·태인현·광산현·능성현·남양군 등의 7개 지방이 새로운 차 생산지로 나타나고 있다.차나무가 자생하던 지방민들은 매년 차의 공납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15세기 후반에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은 군민들의 차공납으로 인한 고통을 목격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원을 개발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기록된 차생산지를 조선 초기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10여 곳 이상이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황윤석(1738~1791)의 '이재난고' 에 남긴 기록 속에서 황차의 음다방법과 약리작용, 황차의 판매가격등을 알 수 있기에, 황차선에 실려온 황차가 어떻게 왕실 밖에서 유통되었는지 알 수 있다.

'어제 저녁 설사를 하여 고생이 심했다. 아랫사람에게 생강과 귤피 황차 맑은 꿀을 사오게 하였다. 달여서 두 차례를 마시자 배가 조금 안정이 된다. 밤이 되어도 역시 설사증세가 없다. 이렇게 이어서 평안하니 다행이다', '고직(庫直) 이세형(李世亨)이 생강을 사가지고 왔고 황차 한 봉지를 서명응가에서 얻었다. 세형이 서명응가의 고직이이기 때문이다. 즉시 탕약을 다려서 뜨겁게 마셨다'

군산 차의 명맥은 끊어졌지만 회현면 일대에는 차 나무가 몇 그루 남아 있다. 멸절을 면했으니 참 다행이다.  청암산에 몇 그루 남지 않은 차나무를 잘 가꾸어야 한다.

김제 금산사 심원암 주변의 약 1만 평의 차밭이 있다. 순창군 적성면 강경마을, 고창 선운사에도 차밭이 있다.

전주시 교동, 오목대가 서 있는 구릉지대 남사면 1백여평에는 도심지역에 전혀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차(茶)나무 군락지가 형성돼 있다. 이 군락지는 특히 그동안 인정돼 온 차나무 북방한계선을 훌쩍 넘어선 지역에 위치, 세계 최북단의 내륙지방 차나무 자연군락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익산시 웅포면의 차밭이 복원돼 여행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대한민국 최북단 차나무 군락지로 야생으로 군락이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봄가을에도 좋다. 봄에 파란 싹이 올라올 때 찻잎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명에 대한 한없는 경외감이 생긴다. 파란색은 생명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겨울에도 차밭은 푸르다. 눈 속에서 찻잎의 파란색을 보면 차의 강인함과 싱싱함을 연상하게 된다. 이런 느낌 속에 자주 있다 보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사상을 이해하게 된다. 동양 식자층의 염원이 대자연과 일체가 되는 물아일체였다. 유한한 인생의 슬픔을 극복하게 해주는 치료제가 물아일체였다. 어떻게 대자연과 일체감을 얻을 수 있는가? 이것이 곧 구원이기도 했다.

 싱그러움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바로  전북다향길. 물아일체의 푸르름, 차밭은 구원이다. 차 역사문화는 전북이 지향하는 문화 중심의 성장 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