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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전주엔 ‘백산자, 여뀌 나물, 생강, 죽순이 유명하다' 강후진의 '감영록' 4권에 지역 음식 스토리 소개



10일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부터 ‘찬집감영록(纂輯鑑影錄)’ 3~4권의 PDF를 받았다. 영조 때 고창 무장현 출신의 학자 강후진(康侯晉, 1685년~1756년)의 ‘찬집감영록(纂輯鑑影錄)’ 4권엔 조선의 식생활과 음식의 제조, 지역별 차이 등이 소개됐다. 이를 통해 전북 음식 스토리를 만난다. 편집자

전주엔 '백산자와 여귀나물, 생강, 죽순이 유명하다‘고 했다.(全州之白霰蓼菜薑筍)
이하곤(李夏坤, 1677~1724) 의 '전주의 풍속과 토산물을 노래하다. 장난삼아 오체(오체)로 짓다(述本州風俗土産 戱爲吳體 進退格)'란 시가 생각난다.'전주의 풍요로움 팔도에 드물고 토속 민풍이 도읍과는 다르네. 추녀는 누런 머릿카락에 말아 올린 머리 삐딱하고 약삭빠른 녀석은 하얀 얼굴에 산뜻한 옷으로 갈아입었구나. 마을 사람들은 패랭이 쓰기를 좋아하고 가게에는 모두 백산자(白散子)가 놓여 있네. 생강 수염으로 만든 절임은 그 맛이 일품이니 북쪽 객은 새 맛을 보고는 돌아갈 길 모르네’
이 시는 전주 생강과 박산(薄散)이 소개된다. 박산은 백산자(白散子)를 말한다. 이하곤은 1722년 전라도 일대를 유람하는 길에 전주에 들러 시장을 본 기록을 남기고 있다. '12월 12일 박지수와 경기전(慶基殿)에 갔다. 민지수도 왔다. …회경루에 올라 시장을 바라보았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빽빽이 모인 것이 흡사 서울의 종로의 오시(午市) 같았다. 잡화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패랭이와 박산이 반을 차지했다' 또 '남유록(南遊錄)'은 이하곤이 호남지방을 유람하면서 견문한 내용을 기록한 바, '전주시장에 진열된 상품 중에 평량자( 平凉子)와 박산(薄散) 이 그 반을 차지한다' 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백산자는 전주에서만 만드는 음식으로, 산자에 잣이나 호두를 붙인 과자의 일종이다. 이는 찹쌀 반데기를 튀긴 쌀로 만든 조청에 담궜다가 고물을 묻혀 만든 한과를 의미한다. 전주의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다는 박산은 요즘 말로 하자면 쌀강정이다. 박산을 전주에서 잘 만드는 것은 엿이 좋기 때문이다.
허균은 ‘도문대작’을 통해 “개성 엿이 상품이고 전주 엿이 그 다음이다. 요즘은 서울 송침교 부근에서도 잘 만든다.”고 했다. 전주의 엿은 전국에서 두 번째였다고 했다. 그는 또 ‘백산자’를 소개하면서 속명은 ‘박산’으로 전주 지방에서만 만든다고 했다.(白散子。俗名薄散。唯全州造之。 백산자(白散子) : 속명은 박산(薄散)인데, 전주지방에서만 만든다)
전주가 품질이 좋은 엿의 생산지였기 때문이다.‘세종실록’ 3년(1421) 1월 13일조에 의하면, 예조에서 진상하는 물목을 아뢰면서 ‘백산엿은 오직 전주에서만 만드는 것’이라고 하고 있으니, 그 전통은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산자는 고물의 색에 따라 홍산자, 백산자, 홍백산자 등으로 나뉜다. 오는 7일이면 대설이다.
이 책은 고창 무장출신 윤회(尹淮, ~1436)의 술버릇도 소개됐다.
그는 고창군 출신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 문신이다. 조선 초의 대표적인 문한관(文翰官, 문필에 관한 일을 하는 직책)으로서 국가의 여러 편찬 사업에 참여하고 많은 글을 지었으며, 경연에서 여러 차례 경사(經史)를 강론했다.
‘문도공(文度公) 윤회(尹淮)가 하도 술을 좋아하자 건강을 걱정한 세종대왕이 "앞으론 하루에 딱 석 잔 만 마시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얼마 후 윤회가 취해서 집현전 경연에 불참하는 일이 생기자 화가 난 세종이 윤회를 불러 어찌 된 일인지 캐물었다. 그는 ​어명을 거역하지 않으면서도 술을 잔뜩 마시기 위해 앞서 보았듯 윤회는 평범한 술잔 대신 놋자배기에 술을 담아 마셨다. 그렇다보니 남들보다 두배(倍飮)이상을 마셨다. 이를 듣고 세종대왕이 웃었다고 했다.’
윤회는 술을 좋아했다. 세종 12년 어느 날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빈객(賓客) 윤회(尹淮)가 서연(書筵)에 나아가서 강의를 맡아야 하는데 술에 취하여 참석하지 아니하였으니, 도무지 공경하며 삼가하는 뜻이 없습니다. 청하건대,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허락하지 아니했다. 그리고 회에게 이르기를, "경이 술을 마시어 도를 지나치는 일이 한 차례가 아니었고, 내가 경에게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게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이 임금의 명령에 대하여는 물이나 불 속을 들어가라 하여도 오히려 피하지 않을 터인데, 하물며 그 밖의 일이겠는가. 자기의 주량(酒量)을 생각하여 한두 잔쯤 마시든지, 반 잔쯤만 마신다면 그렇게 정신이 없고 체면을 잃게까지야 되겠는가. 이제부터는 부디 지나치게 마시지 말라. 따르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다." 하고, 들어와서 김종서에게 이르기를, "윤회가 술을 좋아하지만, 나는 그의 재주를 아껴서 과음하지 말라고 경계한 적이 있었는데, ... 조금도 고치는 빛이 없었고, 지금 또 취해서 서연(書筵)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세자(世子)를 도와서 바르게 이끄는 도리에 있어 어떻겠는가. ... 도리를 알 만한 선비도 이러하니 무식한 소인의 무리야 말할 것도 없다." 하였다.(‘세종실록’)
고창 인천강(주진천)이야기도 나온다.
‘숙종 계사년(1713년) 봄 무장 인천강의 흐름을 잘랐다. 하루 아침에 보는 자가 많아 인천강의 고기를 많이 얻었다. 이같은 이야기를 들은자가 말하기를, 만력임진(萬曆壬辰)년(1592년) 이 천의 흐름을 자르니 하룻만에 큰 변화가 있어, 크게 흉년이 들었다.’
주진천(舟津川)은 축령산 명매기골에서 발원하여 방장산에서 발원한 고창천과 합수하여 선운산을 지나 고창평야를 관류하고 곰소만으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인천강이라 부른다. 고창군 성송면 노령산맥 기슭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며 고창군을 가로질러 심원면과 부원면의 경계부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이 하천은 원래 인천강이었다. 고창평야에서 자주 범람하는 주진천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로 어질인(仁), 내천(川)을 써서 인천강(仁川江)이라 부른다. 1911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주진]으로 바뀌었다. 유로를 살펴보면 발원지인 노령산맥을 내려와 고창군의 평야 및 구릉지대를 관통한 뒤 선운산 산악지대를 S자로 관통하여 서해 줄포만 갯벌에서 끝난다. 주요 지류로는 성송천, 무장천, 고수천, 고창천, 운곡천 등이 있어 고창군 중부, 남부, 동부 지역 대부분이 이 하천의 유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하천에서는 고창의 명물인 풍천장어가 낚이기도 한다. 그리고 지류인 운곡천에는 운곡저수지와 함께 운곡 람사르 습지가 조성되어 있다. 주변에는 선운산, 운곡저수지, 운곡 람사르 습지, 서해 줄포만 외에 용오정사, 고창 고인돌 유적 및 공원, 고창 용산리 분청사기 요지, 미당 서정주 생가 및 미당시문학관 등이 있어 연계하여 관광할 수 있다. 바다와 민물이 섞이는 인천강 30리 구간에서 성장한 뱀장어를 풍천장어(風川長魚)라고 한다.
이밖에 집이 가난하고 자녀가 없는 남원 황진동(黃晋同), 역시 가난하게 살던 정읍현 영리(營 吏) 이씨(李氏)의 이야기 등도 소개,민초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소개됐다.
한편 4권엔 ‘경기전의 태조화상(太祖畵像)’도 흥미를 더한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