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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고창출신 황윤석, 과거치르고 냉면 배달

[인문 문화 스토리] 실패는 두려운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고창출신 황윤석, 과거치르고 냉면 배달

"과거시험을 치르고 난 다음날 일행과 함께 점심식사로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

1729년 오늘(5월 25일),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일기처럼 쓴 '이재난고(전북 유형문화재 제111호)'에서 우리나라 ‘배달의 역사’를 250여년 전으로 끌어올립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 음식기록으로 보입니다.

1768년 7월 7일, 나이 마흔에 시험을 치른 뒤 맛본 냉면이었으니 얼마나 시원했을까요. 그는 서른한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했지만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결국 낙향해 생을 마감합니다. 

이는 영·정조시대 최고의 천문학자 탄생기입니다.

시험을 마치고 치맥을 먹는 요즘 대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큰 일을 치른 뒤에 맛있는 음식으로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자 하는 마음은 시대를 초월하는 심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배달 음식의 유혹은 주상 전하께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조선 말기의 실록에는 순조가 달구경을 하던 중에 내관에게 '냉면을 사오라고 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에디슨은 84년 생애 동안 무려 1천93개의 발명품을 남겼으며, 기록한 아이디어 노트만 해도 3,400권이나 됩니다. 하루 20시간을 연구에 몰두했고, 백열전구에 알맞은 필라멘트를 구하기 위해 6,000여 종의 식물을 탄소처리할 만큼 열성을 보였습니다.

이 많은 발명을 위해서 에디슨은 수백만번의 실패를 거듭했습니다.에디슨은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전구를 완성하기 위해 9,999번이나 실패를 했습니다

한 친구가 "자네는 실패를 1만번 되풀이할 작정인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에디슨은 "나는 실패를 거듭한 게 아니야. 그동안 전구를 발명하지 않는 법을 9,999번 발견했을 뿐이야" 라고 대답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재 황윤석이 평생에 걸쳐 보고 들은 모든 지식을 기록한 백과전서 ‘이재난고’ 일부가 황윤석의 고향인 고창군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재난고’는 대실학자 이재 황윤석이 열 살 때부터 세상을 뜨기 이틀 전까지 53년 동안 온갖 다양한 정보들을 상세히 기록한 일기입니다. 

당시 고창(흥덕)에서 서울까지 6박 7일 걸린 노정(路程: 580리)과 여행일지, 경승지나 유적지 등을 돌아본 내용도 있으며, 충청도 진천과 경상도 상주에서 호랑이로 인한 피해 상황과 호랑이 사냥 관련 현상금(큰놈 100냥, 중간놈 50냥, 작은놈 30냥), 하루에 20여 마리를 잡았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그는 정읍의 이언복이 60냥에 구입한 자명종을 18세에 구경한 후 1761년(영조 37)에 나경적이 제작한 자명종을 직접 봤으며, 1774년(영조 50) 염영서를 통해 선급금 5냥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장이 나서 황윤석은 이를 수리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수리비 4냥을 더 주고 고쳤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또, 1768년(영조 44) 7월에 과거시험을 본 날 점심으로 일행과 냉면을 시켜 먹은 내용, 주막 국밥값 3전, 고급 누비솜옷 4냥, 평민의 누비솜옷 2냥, 말 한 마리 40냥과 말을 대여할 경우 100리마다 1냥 7전, 전의현감 월급 15냥 등이 기록돼 있는 등 조선후기 생활문화에 대한 정보들을 담고 있어 ‘조선시대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재난고’는 조선 후기의 정치, 경제, 사회에서부터 수학, 과학, 천문, 지리, 어학, 역법 및 신문물인 서양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을 백과전서처럼 망라해 다른 일기와 차이가 크며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황윤석은 스물네 살 때부터 마흔여섯 살 때까지 23년 동안 적어도 스물일곱 차례 이상 과거에 응시했습니다. 그는 서른하나에 진사가 되었으나 이후 15년간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실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을 뿐 아니라 영조 45년(1769)에는 성균관 칠일제에서 2등을 하여 국왕을 알현하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과거는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그는 마흔 여섯 살이 넘어 결국 과거 응시를 포기했습니다.

 그의 부친 황전(黃㙻, 1704-1772)은 근 20년 동안 생원·진사시 초시에 여섯 번 합격하였으나 복시에서 모두 실패했고, 결국 마흔 여섯에 이르러 과거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았는지 쉰여덟에 다시 한 번 응시하였는데, 또다시 초시에만 합격하고 회시에서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수험 생활은 합격과 동시에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끝내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스스로 응시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몇 살 때까지 과거를 보느냐 하는 것은 시대마다 달랐던 듯합니다.

늦은 나이까지 과거를 보다보니 부자가 함께 과거에 응시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의 '청대일기(淸臺日記)'나 황윤석의 '이재난고'는 저자가 부친과 함께 과거를 보러 가는 일이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간혹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급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생원ㆍ진사는 4만7,000여명으로 연평균 100명가량이며, 문과급제자는 1만4,600여명으로 연평균 30명 정도였습니다. 이 관문을 뚫고 합격의 영광을 누린 사람은 표시도 나지 않을 만큼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몇 천 몇 만 명이 응시하여 불과 이삼십 명을 뽑는 시험에 이삼십년을 매달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조선시대 양반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누구나 관직 진출을 꿈꾸던 시절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과거가 그 꿈에 도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과거 급제는 집안을 일으키고 지탱하는 버팀목이었습니다.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하다 하더라도 한 집안의 자손이자 가장인 자는 그 길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수십 년에 걸친 과거 응시는 그들의 숙명이자 꿈을 위한 끝없는 도전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자자손손 대물림되었습니다.

과거제도, 출세의 사다리인가? 배움의 가시밭길인가요?

부처님 입멸전후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은 마음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사람을 그릇되게도 만들며, 마음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며, 마음이 훌륭한 수행자가 되기도 하며, 마음이 천사를 만들기도 하며, 마음이 사람답게 만들기도 하고, 마음이 축생으로 만들기도 하며, 마음이 지옥을 만들기도 한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내 삶의 길이 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요즈음 대한민국의 20대 젊은이들이 무한경쟁의 삶을 살면서 우울증이 크게 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리고 있습니다. 

스펙을 쌓아도 취업을 보장받지 못하고, 열심히 노력해도 행복한 삶을 가꾸지 못하는 현실이 청년층의 우울증을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취업에 실패하거나 아니면 창업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을 경우 더욱 큰 좌절을 맛보게 되고 이것이 우울증으로 이어지고 있다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도 따지고 보면 정신의 문제입니다. 인생에서 실패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 성공의 길로 자신을 이끌 수 있도록 마음 다스리는 공부를 해봅시다. 마음의 때를 벗길 때 성공이 눈앞에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실패는 두려운 것이 정상입니다.

황윤석은 비록 대과에 급제를 하지 못했지만 영·정조시대 최고의 천문학자가 되어 오늘날에도 그 이름이 빛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