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식

봉동진천송씨,백자(百子)편



변산 솔씨 서말


 

호남고속도로 익산 인터체인지 일대에는 진천송씨 선산이 있다. 이곳엔 아름답게 자란 오래된 육송들이 빽빽하게 서있다. 이 소나무들은 300-400여년 전에 심었다고 한다. 완주 봉동읍 제내리에는 진천송씨 종중의 재실인 우산정사가 있다. 제내리(堤內里). ‘방죽 제()’ 자에 안 내()’ 자를 쓰고 있는 만큼 방죽 안이다. 마을의 이름이 된 방죽은 지금도 있다. 여름이면 방죽에는 지금 초록의 백련 잎으로 가득하다.

우산정사에서는 두 그루의 소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 한 그루는 재실 마당에 있고 다른 한 그루는 방죽을 낀 산자락에 있다. 우선, 재실 마당에서 자라는 300년 된 용솔이 있다. 용이 여의주를 삼킨 형상이어서 용솔이라 부른다. 가지를 우산살처럼 옆으로 뻗어내 자라는 모습에서 우리는 영락없이 용을 떠올리게 된다. 소나무 둘레만 18m, 높이는 무려 14.5m에 달한다. 이 소나무는 재실을 향해 절하듯 키를 낮춰 자란다고 해서 효자솔이라고도 부른다. 그 이름대로 소나무는 키가 용마루 높이를 넘지 않는다.

진천송씨의 선산 소나무들은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 15551620)의 며느리 가운데 남원의 삭녕최씨 집에서 시집온 며느리로부터 연유된다. 남원의 삭녕 최씨라면 훈민정음을 언해하고 용비어천가를 주해한 최항(崔恒, 14091474)의 후손들을 지칭한다. 송씨 집으로 시집갈 때 친정아버지인 최상중(崔尙重)이 딸에게 물었다. “시집갈 때 무엇을 주면 좋겠느냐?”. 그러자 그 딸은 변산 솔씨 서말만 주세요라고 했다. 표옹(瓢翁) 송영구에게 며느리가 새로 들어왔는데, 그 친정 역시 변산(邊山)의 내노라하는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조용헌박사의 말을 빌리면, 며느리 친정에서는 딸 셋에게 각기 유산을 물려 주었다고 한다. 큰딸에게는 엽전 한 말을 주었고, 둘째 딸에게는 중국의 명품 벼루 단계연(端溪硯), 셋째딸에게는 변산의 소나무에서 채취한 솔씨 서 말을 시집갈 때 혼수품으로 주었다.

엽전 1말을 원한 큰 딸은 임실군 삼계면의 경주 김씨 집안 며느리로, 이 큰 딸의 후손들 중에는 큰 부자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둘째 딸은 대사헌을 지낸 노진(1518~1578)의 손자며느리로 이후 가문이 더욱 번성했다. 이때 상으로 받은 벼루는 가보가 되어 노진을 모신 남원의 창주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변산 솔씨 서말을 원했던 셋째 딸은 익산 진천송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부군은 단성 현감을 지낸 송흥시(1586~1649)라고 전한다. 이 송흥시의 아버지는 표주박 늙은이란 호를 가진 표옹(瓢翁) 송영구였다.

이 최씨 며느리는 백자(百子)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모습의 떡도 만들었다고 한다.

송재규 전 진천송씨 우산종중 의장은 사람 발뒤꿈치 모양의 흰떡 수십 개를 부채살처럼 둥그렇게 모아놓고 그 위에다 다시 계속해서 둥그렇게 얹어놓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피라미드처럼 67층을 겹쳐서 쌓아놓는다. 행사가 끝나면 이 떡을 하나씩 먹으면서 자손의 창성을 기원한다고 한다. 백명의 자손이라는 백자의 뜻과 같이 송씨 문중의 자손들이 번창하기를 의미하는 떡이다. 지금도 문중 시제 때 만들어서 모두 먹는다고 했다.

예로부터 변산은 해풍이 불어와 질 좋은 소나무 산지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벌목사(작목사)로 변산에 부임한 고려 문신 이규보는 변산은 우리나라 재목의 보고라고 기록했다. 고려 때 여몽 연합군이 일본에 원정을 가려고 선박을 만들 때도 변산의 소나무를 벌목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구진조선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소나무숲이 얼마나 울창했던지, 몽고가 고려에 침입했을 때, 일본 정벌용 배를 건조하기 위해 변산(진서리 구진마을)에 조선소를 설치했다고 한다.

'예전에 배를 만들던 조선소가 있었던 자리로 지금도 마을에 오래된 배의 널판이 남아있다.' 고려시대 김방경(金方慶)을 총감독관으로 임명해 목수와 인부 250 여 명을 모집해 부안 변산과 장흥 천관산 등 2곳에 조선소를 설치했다. 당시 원()나라는 오로지 일본 정벌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어떠한 희생도 생각하지 않고 강행했다. 고려는 조선(造船) 공사를 맡아서 그 괴로움과 부담이 컸다. 6개월을 들여 300척의 건조를 마친 후 김해(金海)로 수송했다고 변산면지는 기록하고 있다. 그 뒤 변산은 원의 일본정벌이란 자극과 영향을 받아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침략이 심해 200여 년 동안 계속된 바 인적, 물적 피해가 컸다고 하며, 당시에 구진조선소가 자리했다.
<동국여지승람> <택리지> 등 조선시대 지리서에도 변산의 하늘을 가리는 울창한 숲첩첩한 바위골짜기들이 언급돼 있다. <격암유록>을 쓴 풍수가 남사고는 변산을 십승지지’(전란을 피해 살 만한 곳)의 한곳으로 꼽았다. 변산반도는 고려 적부터 울창한 숲으로 주가를 올리던 곳이다. 진서면(鎭西面) 구진(舊鎭)마을은 어찌 보면 순서가 바꿔었다.

고려시대 이래로 서해를 지키던 수군이 있던 터였던 검모포진(黔毛浦鎭)이 있던 곳이 구진마을이다. 그러가 1812년 진영이 지금은 없어진 진서초등학교가 있는 터로 옮기면서 진의 서쪽이란 뜻의 진서가 생긴 것이다. 옛 동헌(東軒)이 있었다는 터에 올라보면 바닷가와 선을 같이하는 일자형의 마을 구조가 한 눈에 들어온다

당시 변산의 소나무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황장목이었다. 황장목은 전선을 만들거나 궁궐을 짓는 귀한 소나무였다. 조선시대엔 변산면 격포리 격상마을 앞 산쪽으론 행궁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 행궁은 관찰사 원두표가 1580, 격포를 행궁이 들어설 적절한 위치로 보아 상소를 올렸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이 변산을 유람하고 두 편의 산문을 그의 유고집 '표암유고(豹菴遺稿)'에 남겼다. 변산 유람은 둘째 아들 강흔(1739~1775)1769년 부안현감으로 부임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그는 17705, 채석강과 격포진을 유람한 후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유격포기(遊格浦記)'를 지었으며, ‘우금암도(禹金巖圖)’를 남겼다. 때마침 정읍의 수령으로 있던 친구 임성여(任聖與)가 부안으로 찾아와 함께 격포를 유람하게 됐다. 강흔은 읍지를 만들고 후선루(候仙樓)를 새로 세우고 낙성식을 열었다. 관아의 후선루가 완성되자 한겨울이 왔다. 그래서 이름을 하설루(賀雪樓)로 바꾸었음을 '하설루기(賀雪樓記)'를 지었다. '부안 격포의 행궁(格浦行宮記)'엔 젊은 지방관으로서 구축한 요새가 부실한 정도를 넘어 완전히 무너져 있음에 한숨을 쉬었다고 적었다.

방죽을 끼고 있는 마을 어귀 산자락에는 삼정승 소나무가 있다. 일본 사람들이 진천송씨들의 이 소나무를 많이 베어 가 버렸지만 300-400년 전 최씨 할머니 당대에 심은 35m 높이로, 아직도 살아 있다. 하나의 굵은 둥치에서 곧게 뻗은 세 개의 가지가 늘씬하게 하늘로 치솟았다고 해서 삼정승 소나무라고 부른다. 나무의 기세가 얼마나 당당하면 붉은 기운의 세 개의 굵은 가지에서 정승을 떠올렸을까.여느 노거수처럼 풍만하지도 기이하지도 않지만, 여윈 듯 단아한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조선의 선비가 연상된다. 기품 넘치는 강직한 선비 말이다. 3, 4세대 손자 소나무들은 지금도 1만여 그루나 자라고 있다. 변산 소나무 씨앗 세 말을 갖고 출가해 자손 대대로 길렀다는 스토리가 잊혀지지 않음은 왜 일까.(사진 출처:좋은정치시민넷

 

 


'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돈반과 골동반  (0) 2020.05.09
풍산김씨 세전서화첩(豊山金氏 世傳書畵帖)  (0) 2020.05.09
먹시감식초,우슬식혜,함라반지  (0) 2020.05.09
전북의 감  (0) 2020.05.09
고창음식(둠벙주,굴김국,지국장)  (0) 2020.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