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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마도3호선과 마도4호선에 숨겨진 이야기

△마도3호선과 젓갈

고려땐 ‘개고기포’도 공물이었다. 13세기 중엽 어느 날, 한 척의 배가 전남 여수항을 출발해 인천 강화도로 향했다. 배는 전복젓갈, 말린 생선, 개고기포, 사슴뿔 등 권력자에게 보내는 물품으로 가득했다. 선원들은 조약돌로 장기를 뒀고 구석에 놓인 볏섬에서는 쥐가 낟알을 갉아먹고 있었다.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해역에서 2009년 9월 발견된 태안 ‘마도 3호선’은 고려시대 생활유물의 보고였다. ‘마도 3호선’에서는 청어, 전어, 밴댕이, 조기와 같은 소형 어류 뼈들이 뒤섞여 담겨있는 항아리가 보였다. 즉 전어, 밴댕이와 같이 쉽게 부패되는 소형 어종을 뒤섞어 염장하고 발효시켜 만든 ‘잡젓’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마도 3호선'은 고려 무인집권 말의 권력자였던 김준(金俊, ?~1268)과 주변 인물, 고려시대 특수부대인 삼별초, 무신 합좌기구인 중방 등으로 보낸 화물을 싣고 있던 선박으로 1265~1268년 사이 난파됐다. 마도 3호선은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시대 선박으로서는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배다. 고려시대에는 판매 목적이나 조세(租稅)로 거둔 전라도의 각종 물품들이 서해안을 따라 배로 개경까지 운송됐다. 태안 마도에서 발견된 세 척의 고려 난파선에서 수십 점의 도기 항아리가 나왔다. 항아리 안에 담겼던 물질을 분석한 결과, 벼, 조 등의 곡물과 각종 젓갈이 있었다.
젓갈은 물품 내역과 수취인을 기록한 일종의 송장인 ‘목간’과 함께 발견된 바, 분석 결과와 젓갈의 종류 및 수취인이 일치했다. 마도 3호선에서 발견된 목간엔 ‘죽산현에서 개경에 있는 윤방준 댁에 게젓 한 항아리를 올린다’는 내용이 있어 해남에서 개경의 권력자에게 게젓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마도 난파선의 도기 항아리에 담겨 있던 젓갈로 게젓, 새우젓, 전복젓, 홍합젓, 고등어젓과 청어·밴댕이·전어·조기를 한데 담은 잡어(雜魚)젓도 있었다. 요즘도 먹는 젓갈들이다. 배에 실렸던 젓갈들은 각종 곡물, 식재료와 함께 전남 나주, 장흥, 해남, 여수, 전북 고창, 정읍에서 개경과 강화도에 보내졌다. 받는 사람은 당시 고려의 권력층이었다. 무신정권기 최고 권력자 중 하나였던 김준, 왕명 출납을 담당한 3품 고위직 관리인 승제 유천우, 정4품의 시랑 신윤화, 대장군 윤기화, 무관인 교위 윤방준 등의 수취인이 확인됐다. 난파선에서 발견된 전라도의 젓갈은 예부터 지금까지 귀하게 대접받고 사랑받은 지역의 전통 음식문화가 잘 이어져왔음을 보여준다.

△마도4호선과 조선시대 세금 운반선의 비밀

'마도 4호선'에는 매우 중요한 코드가 숨겨져 있다. 이 배는 마도 해역의 확장 조사 중에 확인된 ‘조선시대 조운선’이다. 선체 내부에서 분청사기 150여 점 확인됐다. 우선 ‘내섬(內贍)’명 사기가 3점 눈에 띄었다. 1403년(태종 3) 6월 29일 설치된 ‘내섬(시)’은 궁궐의 물품을 관리하는 호조 산하의 관청이다. 그런데 10년 후인 '태종실록' 1413년 7월16일자는 “전라도관찰사에게 해마다 사기그릇을 진상하도록 명했다”고 기록했다. 또 출토된 63점의 목간 중에는 ‘나주(羅州) 광흥창(廣興倉)’명 목간이 도드라졌다. 나주에는 전라도 27개 고을에서 거둔 조세를 보관하던 ‘영산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광흥창은 관리들의 녹봉을 관리하던 서울의 중앙관청이었다. '마도 4호선'에서는 상당량의 벼와 보리, 새끼줄에 묶인 숫돌 15개가 다발상태로 확인됐다. 숫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나주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마도 4호선'은 나주(영산포)에 거둬둔 전라도 세곡 및 특산물을 서울의 광흥창으로 옮기는 ‘조운선’이었다.
이 조운선은 1403~1413년 이후 15세기 초 사이에 마도 해역에서 침몰했다. 처음에는 고려시대 선박인줄 알았지만 조사결과 15세기초 세금으로 거둔 곡식과 특산물을 서울로 실어나르는 조운선으로 확인됐다. 어떤 해난사고였을까. '태종실록'에는 “전라도 조운선이 여러 척 침몰했다”(1404년 7월 3일)는 기사와 “전라도 조운선이 바람을 만나 침몰해서 6명이 사망했다”(1412년 10월 11일)는 기록이 잇달아 등장한다. 또 1414년(태종 14) 8월 4일에는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전라도 조운선 66척이 태풍으로 파선, 200여명이 익사하고 미두 5, 800여석이 침몰됐다”('태종실록')는 것이다. 당초 태종은 “태풍이 빈발하는 7~8월에는 조운선을 띄우지 말라”는 교지를 내린 바 있다. 그런데 이 영을 따르지 않아 이와같은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인재(人災)였다. '태종실록'은 “반드시 안흥량(태안 앞바다)를 통과해야 하는 전라도 조운선은 늘 위험에 노출된다”고 지적했다.
마도 4호선은 15세기초 궁중의 물품을 관장하는 내섬시의 주도 아래 나주(영산창)에서 서울의 광흥창으로 세금으로 거둔 곡식과 공물을 싣고가는 조운선이었음을 증거해준다.'세종실록' 1448년 4월 6일자는 “전라도 조운선 1척이 안흥량(태안 앞바다)에서 전복됐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문종실록' 1451년 5월 26일자는 “영산성(나주)에서 출발한 조운선이 안흥량에서 풍랑에 휩쓸려 7척이 표몰(漂沒)하고, 4척은 실종됐고, 선원들은 겨우 생존했다”고 전했다. '세조실록' 1455년 9월 10일자는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안흥량에서 파손되어 침몰했거나 실종됐다고 했다.
'마도 4호선' 출토 유물 가운데 선상생활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127점 확인됐다. 금속유물은 철제솥과 솥뚜껑, 청동숟가락 1점이 나왔다. 나무젓가락 38점과 함께 참빗과 목제빗, 뜰채, 그리고 수선용 바늘형 목제품 등 목제유물도 다수 확인됐다. 초립, 짚신 등도 나왔다. 선원들의 땀내가 물씬 풍기는 생활용품들이었다. 이처럼 난파선에서 출토되는 숟가락과 젓가락은 배에 탑승한 인원들의 숫자를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그렇다면 뱃사람들은 숙식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조운선이든 식량 및 청자운반선이든 기본적으로 화물적재가 우선이었다. 따라서 선창 안은 태반이 화물을 적재하거나 선상용 생활물품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사용됐다.뱃사람들은 좁고 흔들리는 선체에서 힘들게 불을 피우며, 선체에 불똥이 튀지 않도록 조심조심 음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선체에서 확인된 각종 육식류로 선원들의 식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마도 2·3호선의 경우 돼지·사슴·개·고라니·오리·닭뼈들이 다수 확인됐다. 이들 뼈에서는 절단의 흔적이 관찰되고 있다. 식료품으로 사용되었다는 뜻이다.조선에서는 “어른이 하루에 두번, 한 끼에 7홉(1홉=0.18ℓ)을 먹는다”('오주연문장전산고')는 기록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하루에 현대인들의 4배 가량 많이 먹은 대식가였다. 달리 말하면 ‘밥심’으로 버텼다는 이야기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