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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진묵대사의 음식 이야기 찾아 활용해야


진묵대사의 음식 이야기 찾아 활용해야

진묵대사(1563~1633)가 변산 월명암, 전주 원등사, 대원사 등지에 머물며 수행에 전념했다. 수많은 일화와 종교적 체험을 통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당쟁과 전쟁이 극심한 시기였다. 서른한 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지만 승병을 조직해 국난을 극복했던 서산과 사명대사처럼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민중들과 함께 삶의 현장에서 살면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호흡했다. 7년에 걸려 이어진 전쟁에서 의지할 데 없이 불안한 백성들에게 진묵대사는 구원자이자 살아있는 부처였다.

진묵대사가 간중천에 이르니 어린아이들이 천렵을 하여 물고기를 끓이고 있었다. 스님께서 끓는 솥을 들여다보고 “발랄한 고기들이 죄 없이 삶아지는구나” 탄식하니 한 소년이 희롱하며 말했다. “스님께서도 한 그릇 드시겠습니까?” ​“주면 잘 먹지” ​“그럼 저 한 솥을 스님께 맡기겠으니 알아서 하십시오” 스님께서는 입을 솥 가에 대고 순식간에 다 마셔버렸다. 이에 소년들이 모두 놀라 이상히 여기면서 말했다. ​“부처님은 살생을 금지하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고깃국을 마시고도 스님이라 할 수 있습니까?” “죽인 것은 내가 아니지만 살려주기는 내가 하겠다”하고 마침내 옷을 벗고 물가에 등을 돌려 설사하니 무수한 물고기들이 항문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봄물을 타고 금빛을 번쩍거리며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스님이 이야기 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저 강가로 가서 다시는 미끼에 걸려 가마솥에 삶아지는 고통을 격지 말아라” ​이에 모든 소년들은 탄식하고 그물을 거두어 가지고 갔다.

그는 바다를 술통 삼았다.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잠자리요 산은 베개라 달빛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이요 바닷물은 술통이라 크게 취해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니 긴소매 옷자락이 곤륜산 자락에 걸릴까 걱정이라네’ 대사는 기행을 일삼은 스님으로 유명하다. 원래 스님은 계율에 따라 술을 마시지 않지만, 술을 즐겨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곡차를 마신다고 하는 것도, 진묵대사의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렇게 진묵대사는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를 넘나들다 보니,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자처하며 유가의 학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술에 취하면 사물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대사는 술에 취한 뒤에 하늘, 땅, 산 그리고 달, 구름, 바다를 자신이 생활하는 안방에서 술을 마시는 광경으로 간주하고 있다. 흥겹게 춤을 추는 춤사위로 옷소매가 중국의 서쪽에 있는 곤륜산에 닿을까 염려하고 있다. 일상에 얽매여 사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대사의 호탕한 세계를 따라가기가 어렵다. 하늘과 땅을 이불과 잠자리로 여기는 ‘천금지석’은, 일상을 벗어난 해방감을 보여준다. 야외활동을 하기에 좋은 시절에 자연을 찾아 낮에는 편하게 산길을 걷고 밤에는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본다면, ‘천금지석’을 만끽할 수 있을 터이다.

대사가 사미 시절 창원 마상포(馬上浦)를 지나갈 때 한 동녀(童女)가 사랑을 느꼈으나 따를 수 없었다. 그녀는 죽어서 남자가 된 뒤 다시 전주 대원사에서 만나 기춘(奇春)이라는 시동이 됐다. 대사가 그를 각별히 사랑한 바, 대중들이 비난했다고 하나. 대사는 그것이 이락삼매행(離樂三昧行 : 일체의 즐거움에 대한 애착을 떠난 삼매행)임을 보여주기 위해 기춘을 시켜 국수로 대중공양을 하겠다는 것을 알리게 했다. 대사는 대중에게 발우를 펴게 한 뒤 기춘으로 하여금 바늘 한 개씩을 각자의 바루 속에 넣어 주게 했다. 대사의 바루 속 바늘은 국수로 변하여 바루를 가득 채웠으나 다른 승려들의 바루에는 여전히 한 개의 바늘이 있었다.

이같은 진묵대사 사료에 대한 꾸준한 발굴 작업을 통해 문화관광과 음식 스토리로 널리 활용되어야 함이 마땅하다./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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