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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임금 부럽지 않았던 전라감영 관찰사..'황제혼밥'까지

전라감영은 조선시대 전북은 물론이고 전남과 바다 건너 제주까지 관할했던 관청이었다. 당시 관찰사는 8개로 나뉜 각 도(道)에 파견돼 지방 통치를 했다. 감사(監司) 도백(道伯) 방백(方伯) 외헌(外憲) 도선생(道先生) 영문선생(營門先生) 등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감영 내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연히 도의 으뜸벼슬이었던 관찰사였다. 자신의 근무 기간 동안 만큼은 임금 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감영 내 기생 역시 지금에 와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밖에 감찰사 비서실장 역할을 했던 예방비장과 잔심부름꾼까지 많은 사람들이 감영 안에서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전라감영 안에서 어떤 생활을 했을까.

◇임금 부럽지 않았던 관찰사

전주문화재단(대표이사 정정숙)이 복원을 앞둔 전라감영을 주제로 최근 펴낸 '2019 문화벗담'을 보면 관찰사는 아침에 선화당에 출근해 집무를 보고, 오후에 내아에서 식사를 하는 등 개인생활을 했다.

장명수 전북대학교 명예총장은 "취미 생활은 내아 동쪽에 있는 연신당에서 했고, 연신당 출입문 앞에는 관찰사의 내아 공사 생활을 지원하는 비서실장인 예방비장이 근무하는 응청당이 있었다"고 했다.

관찰사가 내아에서 잠을 깰 무렵이면 시종들이 댓돌 양쪽에서 기립을 했다고 한다. 관찰사가 일어나 기침을 하고 방울을 흔들어 일어났음을 알리면, 시종들이 안부를 여쭙고 마루에 세숫물을 준비해 올렸다.

장 명예총장은 "흔히 임금이 생활하는 궁을 구중궁궐이라 말한다. 관찰사의 처소인 내아도 이에 못지않게 깊숙이 놓여 있었다. 감영을 들어가는 포정문에 들어서면 중삼문이 열리고 다시 내삼문을 지나 선화당을 건너 연신당을 거쳐 내아에 이른다. 구중내아였다"고 했다.

◇관찰사의 '황제 혼밥'

조선시대 백성들의 식사는 먹을 양식이 부족했기에 아침과 저녁 2끼가 표준이었다고 한다. 양반과 부유층은 새벽에 죽을 먹고, 아침, 점심, 저녁에 이어 야식까지 5끼를 먹었다. 임금 밥상은 수라상으로, 관찰사 밥상은 진지상으로 불렸다. 관찰사 밥상의 기본은 3탕, 9첩으로 전해지고 있다.

관찰사 밥상을 차리는 곳은 감영 주방인 영고청이었다. 영고청에는 지금으로 치면 셰프인 칼자이를 필두로 고기 담당, 채소 담당, 밥 짓기 담당, 물 담담 등이 있었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밥상은 노비들이 들고 내아 부엌으로 가져갔다. 내아 부엌으로 옮겨진 이 밥상은 죽과 찌개를 데우고 반찬을 다시 차리는 과정을 거쳐 예방비장의 지휘에 따라 관찰사 앞에 놓여졌다.

관찰사 밥상에는 기생 교육기관인 교방에서 온 기녀가 앉아서 잔심부름을 했다고 한다. 수저를 올리고 반찬을 집어주며 생선 가시를 발라 먹기 좋게 입에 받쳤다. 식사 중에는 반주가 곁들여졌다고 한다.

◇관찰사 밥상은 한정식 원류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으로 경사스러운 날에 임금의 은혜가 만백성에게 퍼지도록 하기 위해 감영 벼슬아치들에게 음식이 제공됐다.
이때 관찰사 밥상 물림이 있었다고 한다. 관찰사 비서인 비장이 먼저 먹고 나면 잔신부름꾼들이 먹고 이어 하급 관리들까지 먹은 뒤 마지막으로 부엌데기 등이 남은 음식을 나눠 먹었다고 한다. 그러고도 남은 음식은 기름종이에 집으로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 이렇게 가져간 음식이 요리 표본이 됐다.

장 명예총장은 "아전집 부엌에서 모방과 재창조 과정을 거친 요리법이 부유층으로 갔고, 바로 이것이 전주 한식의 뿌리가 됐다"면서 "관찰사의 밥상이 전주 한정식의 원류"라고 말했다.

◇'전라감영 관찰사 밥상' 개발

송영애 전주대학교 교수는 올해 전주비빔밥축제 때 전라감영 관찰사 밥상을 전시했다. 관찰사 밥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여러 고문헌과 전주역사박물관 소장 유물 등을 토대로 관찰사 밥상을 재현한 것이었다.
비빔밥축제 때 선보인 밥상은 9첩 밥상이었다. 기본음식으로 쌀밥과 고깃국을 올렸고, 김치는 배추김치와 물김치, 강수저(생강뿌리를 넣은 김치)를 차렸다. 찌개는 생선조치와 조기찌개를, 찜은 닭찜을, 전골은 쇠고기 전골을 올렸다. 장류는 간장, 초간장, 초고추장 등을 올렸다. 반찬은 무생채, 미나리나물, 숭어구이, 생치조림, 양하전, 죽 순해, 쇠고기자반, 새우젓, 어채 등 9가지를 차렸다.

9첩 밥상의 '첩'은 밥, 국, 김치, 장, 찌개, 찜, 전골 이외의 음식을 말한다. '쟁첩'에 담는 반찬의 수에 따라 첩의 수가 달라진다. 반찬은 가짓수에 따라 3첩, 5첩, 7첩, 9첩 반상으로 나뉘었다. 임금에게 올리는 수라상은 12첩이었고, 민가는 최고 9첩까지 제한됐다고 한다.

송 교수는 "조선시대에는 계급에 따라 의식주가 뚜렷하게 구분됐다"면서 "관찰사는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지방 8도에서는 왕권을 대행하는 최고 통치자였음을 감안해 전라감영의 관찰사 밥상을 9첩으로 제시했다"고 밝혔다.

◇"전주기생들, 전통문화 중추적 역할"

전라감영 근처에는 관기들, 즉 감영에 속한 기생들을 관리하는 교방청과 장악청이 있었다. '호남읍지'에는 '전주부에 기생 34명 등이 거주했고, 그들은 전라감영의 각종 연희에 참가했으며, 전주의 전통음악 보존을 위해 교방청 중건에도 힘을 합쳤다'는 기록이 있다. '완역 완산지'에는 '정유재란 이후 60년 동안 전주에 교방이 없었는데, 부윤과 관기, 주민들이 힘을 모아 교방 5채를 짓기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이 있다.

황미연 문학박사는 "평양기생과 진주기생, 전주기생이 이름나 있었다"면서 "미색은 평양기생이라면 전주기생은 각종 행사에서 풍류를 선보이며 문화예술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전주기생이 단지 관찰사에서 밥을 떠먹여주거나 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 박사는 "전주가 예향과 전통음악의 본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밑거름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라며 "일제의 강점이 시작되면서 전통문화는 말살되고 공식적인 교방청과 장악청과 같은 교육기관도 사라졌지만, 이런 위기 속에서도 전주의 전통문화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전주 만의 독특한 문화풍토로 인해 관기를 전승한 기생조합의 기생들이 일제강점기에도 맥을 이으면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 News1 김춘상 기자입력 2019. 12. 2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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