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 80마리면 천자문을 읽을 수 있다
'반딧불’ 80마리면 천자문을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전북 무주에서 반딧불이 축제가 열린다.
무주에서는 6월 초부터 운문산반딧불이,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늦반딧불이가 출현한다. 그래서 9월이면 반딧불축제를 연다.
익산시는 청정 자연환경을 간직한 금마면 구룡마을 대나무숲 일대를 대상으로 반딧불이 서식처 보존 및 조성사업에 나선다. 이곳에서는 환경지표종인 운문산반딧불이 서식이 확인됐다.
세계적으로는 7월 3~4일이 반딧불이의 날이며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2021년의 주제는 “잡지(catch) 말고 보기만(watch) 하세요”였다.
진(晉)나라 차윤(車胤)이 반딧불을 모아 그 불빛에 글을 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형설지공이 풍시하는 대로 반딧불이는 예로부터 참 많이도 잡혔다.
중국 진나라의 차윤은 집이 가난해 밤에 불을 밝힐 기름을 살 수 없게 되자 여름철에 수 십 마리의 반딧불이를 명주 주머니에 넣어 그 불빛으로 책을 읽으며 벼슬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그 유명한 고사‘형설지공’(螢雪之功ㆍ반딧불이 및 눈과 함께하는 노력)이다. 이처럼 반딧불이로 책을 읽는 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예컨대 천자문은 글자가 매우 커 한쪽이 20자 쯤이다.
이를 읽으려면 반딧불이 80마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불을 밝히려면 반딧불이가 200마리쯤 있으면 된다.
최근에는 생태 테마공원의 전시 명목으로 붙들려 발광 퍼포먼스까지 해야 한다.
반딧불이를 손에 쥐고 있어도 뜨겁지 않은 까닭은 루시페린(luciferin)이라는 화학물질이 산화하며 빛을 발하는데 그게 열손실이 거의 없는 형광이기 때문이다.
반딧불이 수컷은 발광만 하는 게 아니라 약간 구리터분한 냄새도 풍긴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반딧불이를 종종 개똥벌레라고 부르는 것 같다.
한돌이 ‘한국 노랫말 대상’을 받은 ‘개똥벌레’에서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 걸”이라고 노래했다.
이어 그는
“마음을 다 주어도 친구가 없네/ …… / 손을 잡고 싶지만 모두 떠나가네”라며 아쉬워한다.
'나는 반딧불'은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라고 위로하는 가사가 오랜 무명 생활을 겪은 황가람의 삶과 맞물리며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안겼다. 그는 충북 옥천출신이다.
내가 빛나는 별인줄 알았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벌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괜찮단다. 눈부신 반딧불이니까.
소원을 들어주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줄 알았다. 그런데 개똥벌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괜찮다. 빛나고 있으니까.
우주에서 무주로 날아온 밤하늘의 별들이 반딧불이 되었다. 그 반딧불이 눈부시고 빛나고 있다고 반복하여 호소한다.
그런데 ‘우주에서 무주로 날아온 밤하늘의 별들이 반딧불이 돼 버렸지’ 가사에서 무주가 왜 나오는지 궁금증을 유발했다.
작곡자 정중식이 한 프로그램에 출연 그 비하인드를 소개했다.
‘나는 반딧불’ 은 정중식 작곡자 지인인 무주 반딧불축제 담당자가 여수 밤바다처럼 쉽게 무주 반딧불이를 알릴 수 있는 곡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으로 곡을 만들었단다. 그런데 축제 담당자가 인사이동으로 곡을 납품(?)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유튜브에 올렸고 반응이 좋아 앨범을 냈다. 그리고 황가람이 리메이크하며 역주행하고 있다.
‘나는 반딧불’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어요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한참 동안 찾았던 내 손톱
하늘로 올라가 초승달 돼 버렸지
주워 담을 수도 없게 너무 멀리 갔죠
누가 저기 걸어놨어 누가 저기 걸어놨어
우주에서 무주로 날아온
밤하늘의 별들이 반딧불이 돼 버렸지
내가 널 만난 것처럼 마치 약속한 것처럼
나는 다시 태어났지 나는 다시 태어났지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어요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란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이 한 편의 가사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듯하여 필자는 위로받기보다는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특별한 존재, 세상을 움직이는 별이길 꿈꾼다.
더 높이, 더 눈부시게, 중심에서 ‘빛나는 별’이 되어야만 의미 있는 삶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문득 깨닫는다.
나는 별이 아니었구나. 작고 어두운 밤에야 보이는, 그저 반딧불 같은 존재였구나.
우리 사회가 상식이 무너지고 소통이 단절되면서 이 시대의 젊은 세대들의 심리적 고립은 더욱 증가됐다.
내가 별인 줄 알았지만 벌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고백은 실패나 실망의 표현이 아니라 진짜 빛의 의미를 알게 된 성장의 고백이며 겸허함과 자기 성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서 꺼지지 않는 작은 빛으로 나의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와 희망이 담겨 있다.
이러한 깨달음을 지닌 사람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지만 오히려 더 깊은 빛을 내며, 필요한 사람에게 조용히 그 빛을 전하는 사랑을 실천할 것이다.
시인 윤동주는 아마 이 말을 누구보다 이해했을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았고, 민족과 인간에 대한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자 했다.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시는 오늘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밝혀준다. 별이 되지 못한 그의 삶은 오히려 반딧불처럼 오래도록 살아 있는 빛이 되었다.
그리고 이태석 신부. 아무도 가지 않던 아프리카의 낯선 땅에 들어가 의사로, 교사로, 음악가로, 신부로 살아갔다.
그는 수단의 한 마을에서 마치 반딧불처럼 조용히 빛났다.
수 많은 아이들이 그의 손길을 통해 살아났고, 죽은 뒤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적절한 시기에 그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준 ‘나는 반딧불’이 고맙다.
충남 금산의 금강 상류 한 지천에서 지난 2019년 촬영한 반딧불이 군무.
해마다 5∼6월 짝짓기 철이면 이곳에서는 반딧불이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불빛을 볼 수 있다.
개똥벌레 수컷은 빛 신호를 보내며 날아다니다 풀섶에 앉은 암컷이 은밀하게 답신하면 날아 내려와 짝짓기를 한다.
그런데 미국 동부에 사는 포투리스(Photuris) 속의 암컷은 다른 종 수컷의 신호를 보고 그걸 해독한 다음 그 종 암컷의 신호를 보내 유혹한다.
뜨거운 밤을 기대하며 풀섶에 내려앉은 순진한 수컷은 결국 그 냉혹한 팜파탈(femme fatale)의 저녁 식사가 되고 만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이 암컷이 한 종이 아니라 여러 종의 암호를 해독할 줄 안다는 사실이다.
이런 개똥벌레와는 손을 잡지 말아야 한다. 이런 친구는 없어도 좋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개똥벌레가 여름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반딧불을 가뭇가뭇 밝히며 초신성 폭발 후 해질녘 아스라이 어두워진 동네 어귀 길모퉁이 꽃담을 무리를 지어 넘나들며 그 빛으로 우리들 고단한 삶 속에 따뜻함을 비추어 주듯이 우리에게도 자그마한 위안을 주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우주먼지인 우리 존재의 미약함에 절망하면서 무수한 불면의 여름밤 또다시 반딧불빛이라도 쫓아 헤매야 하는 것은 아닐까?
AI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하지만 AI와 첨단 과학이 모든 것을 복제해도 인간적 감성과 관계를 대체할 수 없으며 사라지는 북극 얼음을 되살릴 수 없다. AI 사회로 나아갈수록 상생과 자연을 지키는 기업의 노력은 더욱 소중하다.
요란한 홍보나 화려한 광고보다 ‘그래도 괜찮아 난 빛날 테니까’라는 노랫말처럼 진정성으로 빛나는 기업을 화면에서, 거리에서 만나고 싶다. 반딧불 같은 기업들이 지구촌 동네마다 출현하길 기대한다.
또, 위기의 골목상권이 반딧불처럼 빛나기를 바란다.
눈부시지는 않지만, 따뜻한 사람.
멀리서 보이지는 않지만, 가까운 이에게 꼭 필요한 사람.
별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가까이에서 빛이 되어 준 사람.
나는 그런 반딧불 같은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당신도, 그 빛을 품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어쩌면 그냥 그렇게 아주 작은 빛을 내는 반디였을지도, 그 무수히 많은 반딧불중에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빛은 빛이니까.
작거나 크거나,
적거나 많거나,
반짝반짝 빛나는 빛이니까.
노래 가사처럼
괜.찮.다.
조금 늦었을 뿐,
그래도 언제나 꽃은 핀다.